카피책 - 당신이 쓰는 모든 글이 카피다 카피책 시리즈
정철 지음, 손영삼 비주얼 / 블랙피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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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씨는 참 열정적이시네요” 살면서 많이 들은 칭찬 중 하나다. 지금껏 다녀온 회사들에서, 트레바리에서, 그 외의 다른 어떤 독서모임들에서 나는 이따금 이런 종류의 말을 듣곤했다. ‘열정적이다.’ 내가 정말 열정적일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을텐데,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열정’이란 말을 싫어한다. 구체적으로는 ‘열정’이라는 개념을 싫어한다. 말이 좋지. 열정이란 거, 인간을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주체’로 만드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개념 아닌가. 10년 전에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제시한 자기착취의 주체, 그 주체에게 필수적인 덕목이 바로 열정 아닌가 싶은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고, 이른바 올바른 자기경영을 해나가야 한다는 압박에 짓눌리는 삶. 열정이 추동하는 삶이란 그런 삶처럼 느껴진다.

그럼 열정이 없는 삶을 지향하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 한 번도, 무기력한 삶을 원한 적은 없으니까. 열정이란 걸 품지 않는 삶, 냉소적인 삶이 과연 행복할까. 궁금한 것도 없고 하고싶은 것도 없는 삶, 그런 삶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내게 이상적인 건 이런 거다. 가능하면 열정에 사로잡힌 삶을 살기. 하지만 자신의 열정과 욕망이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상황, 삶의 기쁨을 갉아먹는 상황은 피하기.

광고인으로서, 카피라이터로서 열정을 품고 일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고 또 필요할테다. 하지만 그것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다. ‘하루 8시간의 수면’과 ‘출근 전에 하는 운동’,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보고싶은 영화를 보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듣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 ‘마음 맞는 사람들과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히히덕거리는 것’도 직업인으로서 열정을 품는 것만큼 내 삶에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 열정이란 것도 지속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피라이터 정철의 <카피책>을 읽었다. 열정적이어서가 아니라, 카피라이터라서. 카피라이터가 카피를 잘 써야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카피, 잘 쓰려고. 언제나처럼. 앞으로 계속. 이 책엔 카피는 어떻게 쓰고 아이디어는 어떻게 내야하는지, 그 방법론이 32가지로 소개되어 있다. 카피라이터로 나름 연차가 쌓였고, 이런 광고주들, 저런 광고주들 참 많이 만나왔기에, 아예 처음 보는 내용들은 아니었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도, 실무에서 적용해온 것들도 많았고. 책의 맨 마지막엔 32가지의 실전 연습 페이지도 실려있다. 근데 맨날 하는 일이 이거라, 실습 예제들을 하나 하나 다 해보진 않았다. 😅

정리하자면 카피는 이렇게 쓰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깔나는 카피든 제품 혹은 브랜드와 연결되게. 때론 말과 글로 장난을 쳐서. 대구를 만들든지, 앞말을 맞추든지, 동음이의어를 활용한다든지 뭐 그런 방식으로. 그리고 무조건 쉽게. 초등학교 5학년생이 봐도 이해될 정도로. 그리고 이런 것도 필요하다. 소비자/고객의 언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것. 단어의 낯선 조합을 만들어 내는 것. 글자수를 맞추거나 각운을 맞춰서 카피에 리듬을 부여하는 것. 가능한 한 짧게 쓰는 것. 의성어나 의태어를 활용해 생동감을 더해보는 것. 단어를 더하거나 (즉 단어를 더해 구조를 맞추거나), 아예 빼거나(이를테면 동사만 남기는 식), 곱하거나(같은 단어를 반복하는 것, 이를테면 “같이의 가치”, “집중에 집중하다” 같은 식으로), 나누는 것(핵심 내용을 헤드와 서브로 나누기). 반복과 나열을 활용하는 것. 제품이 아니라 사람에 초점을 맞춰보는 것. 브랜드 네임에서 카피를 따오는 것. 소비자/고객의 편익이 드러나게 하는 것. 제품이나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았을 때 생길 위협을 소구하는 것. 비주얼로는 어떻게 나올지, 어떻게 비주얼과 엮을지까지 함께 생각하는 것. 한자어는 최대한 지양하는 것. 소비자가 얼마나 현명하고 똑똑한지를 칭찬하는 것.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싶기도 하다. 마침 침대 머리맡엔 아직 읽지 못한 정지돈, 금정연, 모리스 블랑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자크 데리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책들이 놓여있다. 조만간 또 광고나 카피라이팅 관련 책을 읽겠지만, 당분간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싶다. 열정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따금은 나답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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