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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의 집
수전나 클라크 지음, 서동춘 옮김 / 북노마드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모로코에 대한 진실, 혹은 오해
담배피우는 모습이 멋진 험프리 보가트와 우아한 잉그리드 버그만의 애잔한 로맨스, 그리고 주제곡, As Time Goes By가 감미로웠던 영화, 카사블랑카Casablanca, 스페인 남부의 도시, 그라나라Gradana를 관광대국 스페인에서도 손꼽히는 관광지로 만들어준 일등공신, 알함브라 궁전Alhambra, 처음 먹어보곤 밍숭맹숭했던 그 맛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데다 이름마저 맛 뺨칠 정도로 기묘해 잊을 수 없었던 쿠스쿠스, 마치 산토리니의 하얀벽에 푸른 지붕을 연상시키던 선명한 모로칸 블루의 집들,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 신실한 기도를 올리고 라마단을 엄격히 지킨다던 무슬림의 나라, 배를 타고 스페인으로 밀입국 해 사회문제를 일으킨다며 스페인 남부 사람들이 싫어하던 이들이 사는 곳,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이국적인 경험을 꿈꾸는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곳.
내가 모로코에 대해 알고 있던 사실들, 혹은 오해들.
그리고 나에게 모로코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삶의 향기를 전해 준 ’중세의 도시’ 페스Fez에서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부부 저널리스트의 생활밀착형 여행기, 『페스의 집(A House in Fez)』
"그게 웬 19세기적 발상이니!"
1961년 모로코를 여행하던 젊은 호주인 부부, 메그와 헨리는 마라케시 근처의 한 야영장에서 부모만큼이나 열정적인 수전나 클라크Suzanna Clarke를 잉태한다. 당시 그들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몇 십년이 흐른 후 모로코의 부름에 운명적으로 이끌린 그들의 딸이 모로코의 옛 수도, 페스Fez에 덜컥 집을 사버리는 사고를 저지를 줄은. 그리고 여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몇 개 있다. 하나. 수전나와 그녀의 남편, 샌디가 이 중요한 결정을 한 것은 페스를 단 두 번 방문하고 난 후였다는 것. 둘. 그들의 집과 직업과 친구, 가족이 있는 생활의 근거지는 비행기로 26시간 거리, 다시말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호주라는 사실. 그리고 셋. 그들이 사들인 집은 잔금을 지불하자마자 바로 대들보가 내려앉을 수도 있을만큼 낡은 아랍전통가옥이었다는 점. 한껏 꿈에 부풀어 "페스에 있는 아랍전통가옥 리아드Riad를 살 거야!"라고 선언하는 그들의 면전에 "그게 웬 19세기적 발상이니!"라는 친구의 대답이 당도한 것은 어찌보면 불 보듯 뻔한 일 아니었을까!
그러나 우리는 사고를 쳤다.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긴 26시간의 비행 끝에야 가까스로 다다를 수 있는 환상적인 접근성, 각각 호주의 신문사와 국영방송국에서 일하는 수전나와 샌디에게는 먼 타국에서 여유롭게 휴가를 즐길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고무적인 사실, 페스에서 집을 장만하는 절차와 방법에 대한 지식 전무, 도움의 손길은 고사하고 간략한 설명서나 안내서도 기대할 수 없는 축복받은 상황, 학창시절에 배운 프랑스어 몇 마디와 어디서 주워들은 다리자(모로코의 아라비아 사투리)어 몇 단어만으로 의사소통을 해야 한다는 행복한 현실.... 페스에서 집을 구매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처럼 끝도 없었다. 하지만 모로코, 그 중에서도 모로코의 옛 수도인 페스에 집을 구해 전통모습 그대로 복원하겠다는 생각은 그들의 머리에서 좀처럼 떠날 줄을 몰랐고, 결국 그들은 사고를 치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페스에 도착해서 저 아래 메디나의 고대 성벽과 낡은 집들을 내려다보았다. 그 집은 꿈과 돈, 그리고 시간과 정열이 있는 사람이 자신들을 복구해주길 기다리며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샌디와 나는 우리도 그들 틈에 끼어 있다는 동질감을 함께 나누었다."
인샬라(신의 뜻대로)
『페스의 집』을 통해 페스에서 집을 사고 개·보수하기 위한 A부터 Z까지의 노하우나 조언을 얻고자 한다면 지금 당장 이 책을 덮을지어다. 책은 ’방 O개에 정원이 딸린 O층짜리 집의 적정 가격은 O디르함, 매물이 많은 지역은 O구역’ 따위의 숫자가 가미된 구체적인 정보보다는 오히려 ’모로코의 삶에 대해서는 생 초짜’인 외국인 두 명이 페스에서 집을 사고 그 집을 복구하면서 겪게되는 문화충격 혹은 충돌, 그리고 이를 헤쳐나가며 모로코와 페스를 배우고 느끼고 사랑하게 되어버리는 마음의 여정을 보여준다. 물론, 페스에 보다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게끔 돕는 소중한 정보를 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인샬라’와 같은.
"’신의 뜻대로’라는 뜻을 가진 ’인샬라’는 여러모로 유용한 표현이다. 신의 뜻이라면 서두르지 않아도 때가 되면 이뤄진다는 의미도 여러 가지 상황에 쓰인다. 내가 무슨 일을 하겠노라고 ’인샬라’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신의 뜻이 분명 거기에 있다는 의미이며, 만일 방해를 받으면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알라의 뜻이라는 것이다. 모로코에선 늦는다고 조급해하거나 좌절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양도계약서도 마찬가지였다. 해결될 날이 오면 해결될 거라는 말만 줄곧 들어야 했다. 인샬라."
역사면 역사, 사회면 사회, 정치면 정치, 관광이면 관광
사실 수전나와 샌디는 저널리스트라는 그들의 직업적 특성을 십분 살려 이 책을 더욱 맛깔스럽게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전체적인 이야기의 뼈대는 이렇다.
<모로코의 옛 수도??대를 무릅쓰고 그곳의 오래되고 낡은 전통가옥을 매입한 후 페스에 거주하는 이방인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모로코인 건축가들을 고용해 페스의 집을 전통 모습 그대로 복원해 나간다. 물론 집을 복원해 나가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도 여러 번 봉착하게되나 이를 통해 페스와 모로코, 그리고 모로코인들에 대해 배우고 이해하게 되었으며 결론적으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의 전체적인 뼈대 사이사이에 모로코의 역사며 사회상에서부터 축제, 그리고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로코인들의 소소한 일상 모습, 심지어 과거 모로코인들의 손길이 닿은 스페인 그라나라 여행기까지, 영양가 넘치는 튼튼한 잔뼈들이 중심뼈대를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본 우리
개인적으로 정말 흥미롭게 읽고 있는 시리즈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이 본 우리>총서다. <그들이 본 우리> 총서는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취재기자 신분으로 한국을 찾았다가 한반도를 따라 신혼여행까지 하게 된 독일인 부부의 기록이라든지, 백두산을 목적지로 하여 한반도를 여행했던 영국 군인들의 기록 등을 책으로 편찬한 것으로 16세기부터 20세기 중엽까지 서양의 눈에 비친 우리의 궤적을 살핌으로써 오늘 날의 한국, 한국인이 형성되어온 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우리의 과거사를 그토록 꼼꼼하게 기록하고 남겨준 것이 감사한데다, 단순히 여정을 기록한 일지라기보다는 흥미롭고 재미있는 소설과도 같기에 푹 빠져읽던 참이었는데, 호주인 저널리스트 부부의 눈으로 본 페스와 모로코의 이야기, 『페스의 집』을 통해 나는 모로코판 <그들이 본 우리>를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수전나와 샌디가 모로코인들을 자신들과 대등한 눈높이에서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을 보이는 점은 분명하다. 허나 ’서구화’가 ’현대화’, 혹은 ’더 나은 것’과 동일한 의미로까지 이해되는 세상이기에 수전나와 샌디의 어투나 태도에서 짐짓 젠체하는 부분이 전혀 없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씁쓸하기도 했던 게 사실이고.
모로코인들에게, 페스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나중에 1층 객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페스 메디나의 미래를 낙관하느냐고 라치드에게 묻자 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랫동안 걱정하는 문제입니다. 메디나는 20세기 초까지는 조화롭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통적인 가치를 파괴하는 변화의 물결이 너무 거셉니다. 이 도시의 포용수준을 넘어섰죠."
그는 계속해서 메디나를 구하려는 피상적인 접근의 위험성을 말했다.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위험했다.
"정확히 맥을 잡고 구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위험은 외국인들이 집을 구매하는 새로운 유행입니다. 외국인들이 와서 집을 복원하는 것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집을 수리하고 개조하는 방식 때문에 우려하는 겁니다. 메디나는 그 정신을 잃어가고 있어요.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사람이나, 아라비안나이트에 대한 환상을 가진 동양주의자들은 그 정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전통적인 것’과 ’전통을 지켜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페스의 생활밀착형 여행기, 『페스의 집』은 전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 ’사라져가는 것들’이나 ’변화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한 의문까지 자연스레 던지며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수전나와 샌디의 ’사고’는 결국 그들에게 있어서는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는 엄청나고 유쾌한 경험’으로 남게 되었지만, 몇 십년, 아니, 몇 백년, 몇 천년이 지난 후에 그들의 ’사고’는 과연 무엇으로 남게 될까-.
가볍게 웃으며 읽을 수 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까지도 아련하게 떠도는 생각의 울림을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