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눕는다 - 김사과 장편소설
김사과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책을 조금씩 아껴가며 읽는 것이 어렵다. 마음에 들고 눈길을 사로 잡으면 딱 하루면 충분하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만에 읽고야 만다. 읽고 싶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 책은 결국 끝을 보지 못하거나 억지로 질질 끌며 끝을 보지만 석연치 않은 경우가 많다. 오랫만에 하루만에 읽은 소설이 있다. 김사과의 장편소설 '풀이 눕는다'였다.
 고백하건대 나는 김사과라는 작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미나'라는 소설 때문이었는데 어쩐지 나는 그 소설을 두장만에 덮어버렸고 내가 좋아할 수 없는 이야기와 문체라고 단정지어 버렸다. (신문 인터뷰에 소개된 그녀의 차가워 보이는 눈매도 어쩐지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 한 몫했다.)
 그런데 '풀이 눕는다'는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내가 요즘 부쩍 조급해진 이유를 찾았다. 나는 그녀와 풀이 했던 사랑을 하지 못할까봐 불안해 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나이가 들 수록 나는 보통의 인간 집단에 점점 편승하게 될 것이며 지금보다 더 눈치를 보고 현실과 타협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어릴 때 풀과 그녀가 했던 사랑을 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문학상에서 상을 하나 받은 소설가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집안에서 무용지물의 인간이었다가 소설상을 받고나자 그 동안의 쓸모없었던 행동들을 소설가가 되려고 그랬구나. 라는 말로 인정받는다. 그녀의 동생은 옷을 파는 인터넷 쇼핑몰로 엄청난 돈을 벌게 되고 그녀의 부모님과 그녀 모두 동생에게 기생하는 삶을 산다.
 어느 날 '나'는 길을 걷다가 '풀'을 만난다. 그리고 처음 보는 그를 따라간다. 무작정 따라가 그에게 말을 건다. 처음에는 그도 이상하게 '나'를 바라봤지만 이내 길을 되돌아 온다. 그렇게 둘은 연인이 된다. 그가 초록을 좋아하고 풀을 좋아해서 '나'는 그를 '풀'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집을 나와 풀의 옥탑방으로 들어온 '나'는 풀과 산다. 풀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시를 쓴다. 풀과 나는 돈 버는 일은 모두 그만두고 서로에게 집중한다. 사랑하는 일 외에는 하지 않는다. 하루종일 걷고, 맥주를 마시고, 그림을 그리고, 대화를 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이 거대한 괴물같은 세상은 돈이 없으면 단 며칠도 버틸 수 없게 만든다. 금새 월세가 밀리고, 공과금 고지서가 쌓인다. 풀이 돈을 벌러 나가고 혼자 남겨진 나는 적막한 옥탑방을 견뎌낼 힘이 없다. 그래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고 또 마신다.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 아름답게. 그게 내 꿈이었다.'

 우리는 사랑의 무게로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을 속인다. 하지만 사랑이 750원짜리 컵라면 보다 못한 순간이 온다. 그럴 때 눈물이 날 만큼 생이 하찮아 보인다. 결국 사랑은 모든 것을 해결 할 것처럼 그 동안 우리에게 그려졌지만 정작 아주 작은 것도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꺼이 나를 속이고 싶었다. 길고 긴 (어쩌면 짧을) 생에서 딱 한번만은 그런 사랑에 아주 처절하게 속아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다. 내 생이 칠십평생이라면 칠십평생 동안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서 거대한 빌딩 숲에서 빅브라더스의 노리개로 살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쯤은 그들의 지시에 역행하는 삶, 보란 듯이 혀를 내밀고 그들을 조롱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결국은 그들이 또 이기게 되겠지만(이 사회를 사는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굴복하진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라고 믿고, 사랑이라고 믿는다.
 미친 사랑에 매혹되는 것은 그것이 그동안 나에게 없었던 무모함과 용기를 실어주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지금 그런 용기가 진정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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