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피 민음 경장편 1
김이설 지음 / 민음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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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전공하고 몇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누군가를 맹렬하게 원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테면 이전에는 어떤 잘못을 했거나 상황이 좋지 않으면 내 탓을 했다. 그리고 끝도 없는 자기 혐오와 자기 비하의 날들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누군가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고 있었고, 전화로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어느 쪽이 더 낫느냐고 묻는다면, 두 쪽 다 못할 짓이라고 말해두겠다. 내 안으로 삭히는 것은(내 탓을 하는 것)은 골병이 든다. 남의 탓을 하고 원망을 하면 관계가 허물어진다. 어느 쪽도 좋지 않다. 최상의 방법은? 아직은 나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모든 원망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던 사람들 중에 당연한 듯이 가족이 끼어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 울어서 말이 말 처럼 나오지 않았다. 입안에서 돌돌돌 굴러가는 말은 당연히 상대방 귀에 가 닿지 않았다. 나는 그저 시뻘개진 얼굴로 가슴을 치고 그런 나를 보고 엄마는 너무 놀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울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마음은 빠르게 식었다. 무엇을 봐도 놀랍지 않았다. 분노라는 감정도 애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어떤 주기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가족은 할 수 없이 연기가 필요한 공동체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행동하지만 모두들 조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화숙에게는 정신지체인 엄마가 있었다. 어린 화숙은 외삼촌에게 짓밟히도록 얻어맞는 엄마를 보았다. 외삼촌이 하는 고물상 인부들부터, 친척들, 동네 청년까지 집을 드나들며 엄마를 범했다. 자신은 그런 많은 남자들 중에 하나의 씨앗이었을 것이다. 화숙은 화를 먼저 배웠다. 외삼촌이 엄마를 때릴 때마다, 외삼촌의 고물상 인부들이 엄마를 범할 때마다 화숙은 외삼촌의 딸 수연을 때렸다. 수연을 괴롭히면서 화를 풀었다. 수연은 아무 말도 못하고 맞기만 했다.

삶은 갈수록 팍팍했다. 결혼을 한 수연은 애를 버려두고 도망을 갔다. 결혼을 하고도 그 전에 몰래 만나던 재현을 계속해서 만나왔다는 것을 화숙은 알게 되었다. 화숙은 사랑받는 수연에게 질투가 났다. 그래서 수연의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
화숙에게는 술만 마시는 외할머니만 있었다. 이제는 자신과 외삼촌을 보면 끝도 없이 욕을 해대는 할머니였다. 화숙에게 이 모든 인생은 '화' 그 자체였다.

'나쁜 피'에 나오는 수연과 화숙, 외삼촌과 진숙, 아저씨, 할머니, 곧 허물어질 상가에 빌 붙어 사는 사람들... 그 모든 이들의 삶은 커다란 다람쥐 통에 한꺼번에 몰아 넣은 듯 끊임없이 돌아갔다. 그것도 더욱 더 더럽고, 냄새나는 곳으로만.

모든 이들의 딜레마는 이것이다. 가족은 껴안기에는 맺힌 것이 많고, 버리기에는 그네들도 결국 불쌍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결국 중간에 서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면서 아침에는 버럭 화를 내고, 저녁에는 과일 한 봉지를 사갖고 들어간다.

그렇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나쁜 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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