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를 당하는 것도 다수결이다.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엔 치수가 원인의 전부라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둘러싼 마흔한명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다수의, 다수에 으한, 다수를 위한 냉풍이 다시 폭포처럼, 송풍구에서 쏟아져내렸다. 손을 뻗어 송풍구의 밸브를 잠그려 애써보았다. 퓌퓌, 고장 난 밸브의 덮개 한쪽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다시 밸브를 열었다. 확실히 춥긴 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9쪽
치수의 패거리들은 전부 마리와 잤다. 내가 알기론, 그렇다. 들어올래? 란 말을 들었을 때 우선 그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1910년에 태어나신(아마도) 걸레라는 이유로, 내가 마리를 피한 것은 아니다. 그게 어때서, 오히려 정말이지 그게 어때서냐는 생각이다. 신이 굽어봐도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 얼마든지 마가져도, 인간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나와 마찬가지로 - 마리는 마리를 둘러싼 마흔한명의 인간, 그런 인간들의 다수결이다. 그 결과다. 인류를 대표해 치수의 패들이 전부 마리와 잔다. 노인들이, 아저씨들이 돈을 주고 마리와 자는 것이다. 다수인 척하는 것이다. 섹스를 해본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다수인 척 섹스를 하기 싫어서도 아니었다. 이유는 한가지, 나는 누군가와 의미있는 관계를 맺기가 싫다. -33쪽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따 같은거 당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다수인 척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일정하게, 늘 적당한 순위를 유지하고, 또 인간인만큼 고민(개인적인)에 빠지거나 그것을 털어놓을 친구가 있고, 졸업을 하고,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활보하거나 전철을 갈아타고, 노력하고, 근면하며 무엇보다 여론을 따를 줄 알고, 듣고, 조성하고, 편한 사람으로 통하고, 적당한 직장이라도 얻게 되면 감사하고, 감사할 줄 알고, 이를테면 신앙을 가지거나, 우연히 홈쇼핑에서 정말 좋은 제품을 발견하기도 하고, 구매를 하고, 소비를 하고, 적당한 시점에 면허를 따고, 어느날 들이닥친 귀중한 직장동료들에게 오분, 오분 만에 갈비찜을 대접할 줄 알고, 자네도 참, 해서 한번쯤은 모두를 만족시킬 줄 아는 그런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34쪽
이상한 끝이구나. 그럼 그 순간 세계를 <깜박>해버린 거야? 그럴 수도.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거야. 그 순간 그가 세계를 <깜박>한 게 아니라 세계가 그를 <깜박>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 모아이, 그러고 보니 나도 분명 그런 적이 있었던 듯해. 나 여태 그걸<깜박>하고 있었어. 잘들어 못, 여기 온 후로 나는 줄곧 그런 생각을 해왔어. 왜 우리일까? 답 같은 건 찾을 수도 없겠지만, 내 결론은 그거야. 뭐?
너와 나는 세계가 <깜박>한 인간들이야.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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