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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이야기
존 카스티 지음, 이민아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9년 4월
평점 :
절판
인공지능 이야기. 제목만 들으면 꼭 사이버펑키 소설쯤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사고혁명(Mind Tools)'의 저자 루디 러커가 실제 사이버펑키 소설을 몇 권 집필한 소설가 겸 수학자인 것과는 달리 캐스티가 본격적인 소설을 썼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다. 저자 자신은 이 책이 '과학 소설'이라고 주장한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과학 관련 강연이나 논문 내용들을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캐스티가 쓴 이 책은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작가의 주제 의식을 구체적 환경과 인물이라는 구체적 이야기를 통해 형상화시켜 총체적 이미지로서 독자에게 들려주고 보여주어야하는 소설의 규칙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쉽게 풀어 쓴' 과학 이야기쯤 되겠다. 왜? 이 책의 중심적 서술 대상은 '구체적 느낌과 사건으로서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학적 사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의 중심은 캐릭터가 아니라 과학적 사상이다. 사람으로서 물적 조건과 그에 따른 제약을 받는 정신을 지닌 튜링과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 튜링의 사상과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이 바로 이 책 이야기의 중심이다. 관계와 그 관계를 통한 사상의 형성 및 전환 등이 아니라 다른 사상과의 지적 전투 및 자기 논리의 완결성에 의한 지적 전장에서 대립적 사상들의 경쟁-진화적 과정이 바로 이 '과학 소설'의 줄거리를 결정짓고 있다.
여러 서평자들과 언론 서평에도 소개되는 것처럼 이 책에서 저자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중요한 이론적-사상사적 내용들을 간단하게나마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술적 세부 사항들을 시시콜콜하게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인공'지능이라는 전대미문의 존재자의 출현이라는 가설적 현상을 둘러싸고 우리에게 지금까지 익숙해있던 '정신'이나 '문화'라는 철학적 관념습관들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상호대립적인 비트겐슈타인과 튜링 입장의 논쟁을 통해 아주 생생하고도 고도로 지적인 긴장감을 놓지지 않는 방식으로 아주 재미있게 저자는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책에서 중심적 논란 거리들은 결국 '인간처럼 언어 사용 능력을 지닌 기계, 또는 규칙 체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로 축약된다. 계산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창조적 사고를 인간처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간의 언어 사용 능력이 전제된다는 점에 책 속의 등장인물들 모두 동의한다. 문제는 '언어는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사회적 성격을 지녔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즉, 어떤 단어나 어구를 실제 현실의 어떤 대상이나 상황에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언어 사용인지 결정하는 것은 언어적으로 표현 가능한 어떤 단일한 '원리'가 아니라 그 언어를 이미 사용하고 있는 기존 집단, 권력이라는 것이다. 즉, 언어의 현실 대응 관계는 언어로 이야기될 수 없고, 삶을 통해 보여질 수 있을 뿐이며, 이는 어떤 규칙으로 환원될 수 없고 오직 '삶의 방식의 공유'를 통해서만 습득될 수 있다.
반면, 튜링은 어린 아이의 언어 학습 능력을 예로 들며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어린 아이가 어떤 언어를 습득하게 되느냐는 그 어린 아이가 어떤 언어 사용 환경에 노출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보편 언어 기관이 있어서 학습이라는 자극에 의해 구체적인 언어 사용 능력을 습득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다른 신체 기관처럼 보편 언어 기관 역시 유전자적 정보 구조만 알아낼 수 있다면 기계적 과정인 소프트웨어로 프로그래밍해 만들어낼 수 있으며, 이는 곧 인간처럼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을 지닌 계산 기계인 인공지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어린 아이처럼 보편 언어 기관을 완벽하게 흉내내는 프로그램을 내장한 기계가 출현한다면, 그 기계는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또 진정 감정을 느낄 수도 있을까? 이 책에 소개된 훌륭한 여러 학자들의 고견들을 참고하여 독자 스스로 숙고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