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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트러몰로지스트 1 - 괴물학자와 제자
릭 얀시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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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라? 띠지에 적는 마케팅 문구야 워낙 인상적인 말을 골라야 하겠지만 이건 도가 너무 지나친 게 아닐까.



"러브크래프트와 스티븐 킹의 절묘한 조합"


현대 괴수물의 아버지와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을 한 접시에 내놓다니. 근래 책 띠지에서 마주친 것 중 가장 도발적인 문구였다. 그래서인지 어떤 책일까, 하는 호기심보다는 어디 얼마나 대단한 책인지 한번 싸워 보자는 마음이 더 앞섰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싸우자! 하는 마음이 끈적끈적한 만족감으로 변하기까지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안트로포파기"와 그 "희생자"가 처음 등장하고, 파리한 소녀의 배가 예리한 메스로 잘려나가던 장면을 읽어내려가고 있노라니, 어느새 뭉근하게 뱃속을 자극하는 강렬한 묘사와 끊임없이 어둠 속을 파고드는 잔혹한 서술에 절로 찌푸려지는 눈살을 애써 다스려야야 했다.



몬스트러몰로지스트 위키에 있는 위 이미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팔이 여리게 그려져 있지만, "입"의 묘사만큼은 내 상상보다 더 끔찍한 것 같다.


압도적인 근력으로 포식자를 그야말로 "뜯어 먹는" 이 안트로포파기 무리의 활약이 이 작품의 백미다. 어딘가 청소년 소설 같이 말쑥하게 다듬어진 표지에 속았다가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선혈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호러 소설의 애호가라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책이 될 테고.


대단히 괴팍하지만 현명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수를 사랑하는 "괴물학자" 박사, 답답할 만큼 착해빠졌지만 필요할 때 움직일 줄 아는 조수이자 우리의 주인공, 살인마인지 영웅인지 아리송한 괴물 사냥꾼, 이해할 수 없는 일 때문에 혼란에 빠져버린 경찰들.


어디서 본 것 같은 인물들이 뒤엉켜서 무시무시한 사건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드문드문 우스꽝스러운 유머를 발산하는 모습. 이런 유머가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속을 달래주며 아주 영리한 리듬으로 작품의 강도를 적당한 선까지 끌어내려 줬다.


안드로포파기에 얽힌 이야기를 추리 소설의 얼개를 빌어 여유롭게 풀어나가면서도, 주인공이자 "제자" 윌의 장수의 비밀, 까메오(또는 또 한 명의 주연)로 출현한 유명 살인마의 이야기, 액자식 구성 밖에 남아 있는 현재 시점에서 윌이 죽음에 이른 과정까지, 만족스러운 독서를 마치고 나서도 수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어 다음 권을 읽지 않을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엔 이 작가가 얼마나 영악한지 새삼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렇게 책을 내려놓고 나니, 이제는 띠지의 문구가 정말로 허튼소리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의 밑바닥에 숨어 있던 침대 밑 괴물을 글자로 풀어내는 탁월한 상상력과 이리저리 뒤틀린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늘어놓는 재주까지. 릭 얀시는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지만 분명히 잊지 못할 이야기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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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더스 키퍼스 - 찾은 자가 갖는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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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너" 시리즈를 써내 엄청난 성공을 거둔 후, 외딴 거처에 은둔한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노작가 존 로스스타인. 여전히 매일매일 강박적으로 작품을 쓰지만, 이를 발표하는 일도, 공개하는 일도 없고, 꾸준히 들어오는 수입도 차곡차곡 집 안 금고에 보관하기만 할 뿐, 조용하고 외로운 나날을 보냅니다. 이 돈과 미공개 작품을 노린 강도가 찾아오면서 자그마치 삼십여 년에 걸친 집착과 광기, 작가에 대한 비뚤어진 애정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빌 호지스 3부작"을 소위 스티븐 킹의 "탐정 추리소설 시리즈"라고 하지만, 글쎄요, 솔직히 일반적인 "추리" 소설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생각합니다. 범인의 범죄 행각과 이후의 행적은 첫 장부터 상세히 묘사되고, 우연찮게 이 범죄에 얽혀드는 아이는 대활약을 하고, 이제는 심장 박동 조율기까지 차고 있지만 적절한 다이어트와 운동을 한 덕분에 "미스터 메르세데스" 당시보다는 조금 더 건강해진 빌 호지스 아저씨는 이리저리 동분서주하긴 하지만 딱히 사건 해결에 크게 기여하지는 않습니다.


이렇듯 미스테리는 사실상 거의 찾을 수 없는 작품이긴 하지만… 역시 스티븐 킹의 이야기답게 스릴과 호러는 그득그득 넘치고도 남습니다.


가장 감탄스러웠던 부분은 앞선 "미스터 메르세데스"와의 연결 고리였습니다. 탐정 연작 소설이 늘 그렇듯 새로운 사건과 새로운 의뢰인이 우리의 주인공을 찾아오지만, 그 새로운 요소들의 상당 부분은 모두 전편의 그 끔찍했던 메르세데스 대학살 사건이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이며, 역시 그 전작에서의 인연으로 빌 호지스가 새로운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역시 처음부터 모든 연작의 구상을 끝내 놓고 집필을 시작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솔직히 스티븐 킹 선생님이라면, 오히려 그랬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요. 혹자는 로스스타인의 "러너" 시리즈 역시 따로 써 두었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러너"의 발췌본이 더 많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작품 내에 그다지 많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리처드 바크먼 때처럼 예명으로 출간하시는 건 아닐까… 괜히 기대해 봅니다.)


스티븐 킹은 200여 편의 단편 소설은 제외해 두고도, 54편의 장편을 발표했습니다. 첫 번째 작품인 "캐리"가 1974년에 나왔으니, 43년 동안 매년 한 편 이상의 장편이 출간되었겠죠. 단편집도 쉬는 편이 없으니, 해마다 두세 권씩은 선생님 작품을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매일 이천 단어씩 일정하게 글을 쓰신다고 하는데… 사실 이번 작품 속 "은둔한 노작가"의 모습은 평행 세계에서 스티븐 킹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훌륭한 소설가는 등장인물들을 선도하지 않아. 그냥 따라가지. 훌륭한 소설가는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아. 벌어지는 사건을 주시하다가 목격한 그대로 기록하지. 훌륭한 소설가는 자기가 신이 아니라 비서라는 걸 알아." - 작중 모리스의 어머니 애니타의 말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이자 (조지 R. R. 마틴의 행보와 비교해 보면 더욱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작가로서 이야기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계신 선생님이, '혹시 내가 독자들의 애정에 등 떠밀려 계속해서 억지로 책을 출간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내가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은둔 생활을 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와 같은 짓궂은 상상을 하며 자신의 모습을 비춘 존 로스스타인을 창조하자, 이 책의 모든 인물들이 바로 그곳에서부터 전력 질주를 시작한 결과물이 바로 이런 유려한 작품이 된 것은 아닐까… 멋대로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늘 그렇듯,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또 한 편의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생생한 등장인물들이 모두 손에 잡힐 듯 날뛰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삶이, 세상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그들의 앞에 너무나도 당연하고 필연적인 사건들이 펼쳐져서 만들어지는 스릴의 대향연. 그렇게 물 흐르듯 흘러가는 작품을 모두 읽고 나면, 시리즈의 제3부를 예고하는 묘한 복선에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렇게 스티븐 킹 선생님의 필력이 여전하다는 것이, 그리고 이 시리즈에 아직 한 편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역시 이 작품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할까요.


훌륭한 소설가는 등장인물들을 선도하지 않아. 그냥 따라가지. 훌륭한 소설가는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아. 벌어지는 사건을 주시하다가 목격한 그대로 기록하지. 훌륭한 소설가는 자기가 신이 아니라 비서라는 걸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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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세상에서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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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소설이다. 첫 장을 펴든 순간부터 축축한 손아귀로 목덜미를 움켜쥐더니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놓아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데니스 루헤인 작품은 물 흐르듯 읽혔다.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도, 미스틱 리버도, 셔터 아일랜드도, 머리를 싸매고 눈에 불을 켜고 복선과 은유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그저 인물들의 이야기를 터벅터벅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짜릿하고 경이로웠다. 


이번 작품만은 달랐다. 이야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너무 벅차서 눈과 머리가 따라가기도 쉽지 않을 만큼. 누구에게나 익숙한 느와르. 마지막 장의 제목을 흘긋 엿보고는, 결말이 어떤 방향일지 알면서도 책을 내려놓지 못했다. 모든 일을 미루고 바삐 글자를 쫓았다. 정신없이 읽어 넘기면서도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조와 의사가 마주앉아 과도한 스트레스에 대해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각자의 뒤를 따르는 유령을 보는 장면이 소설의 백미였다. 너와 내가 가슴 깊은 곳에 묻은 이야기와 그로 인해 짊어져야 하는 짐, 샅과 혈연을 잘라내는 잔인한 폭력까지 하나로 어우러진.


루헤인이 그리는 갱은 정말로 잔인하다. 과장되지 않고 담백하게, 절명의 정경까지도 차분하게 그려내기 때문일 테지만. 그러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건 멱이 잘리고 피가 쏟아지거나, 흘러나오는 장을 애써 그러모으거나, 44구경 총에 얻어맞는 사체가 춤을  추는 모습이 아니라, 담백한 대화와 묘사 사이 행간에 고여 찰랑거리는 감정들이 여기저기 아프게 흘러 넘치는 모습이다.


좋은 작품을 읽고 나면 늘 언젠가 꼭 다시 한 번 읽어보겠노라 다짐하지만, 실제로 그 다짐을 실행에 옮긴 적은 많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렇게 다짐만 할 테지만, 가능하면 커글린 가문 3부작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앞의 두 작품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상당히 많은 곳에서 옛 인물들과 사건이 언급되고 있는 만큼 전작을 읽는 편이 더 좋긴 하겠다.


책을 덮을 땐 한숨이 나왔다. 오랜만에 읽어 들러붙은 콩깍지 때문일까. 루헤인 최고의 작품이었다. 하긴, 매번 이런 얘기를 했었겠지만. 팬은 그저 좋은 작품에 감사하고, 좋은 번역에 감사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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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맨의 재즈 밀리언셀러 클럽 144
레이 셀레스틴 지음, 김은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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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음식은 뉴올리언스에서만 먹을 수 있어."


작품 속 뉴올리언스는 엄숙했던 장례식도 한 순간 밴드의 연주와 함께 흥겨운 축제의 장으로 바뀌는 땅입니다. 주인공 중 한 명인 마이클이 "프랑스, 아프리카, 스페인, 이탈리아의 영향을 한데 모아 탄생한 독특하고 풍성한 요리"라는 뉴올리언스의 음식을 가리키며 했던 위 말처럼, 이 소설은 재즈와 흑인 문화가 융성하는 가운데에도 백인 우월주의가 강하게 남아 있던 뉴올리언스의 시대상에, 미궁에 빠져 버린 "도끼 살인마"의 정체에 대한 미스테리를 뒤섞으며 흥미진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즉흥 연주와 복잡한 리듬이 한데 어울려 귀를 즐겁게 하는 재즈처럼, 작품에서는 세 팀으로 나뉜 주인공들이 나름의 박자에 따라 도끼 살인마를 추적합니다.


현직 경찰인 마이클은 흑인 여성을 사랑합니다. 흑인은 여전히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당시의 미국 남부에서, 흑인과 함께 살고 자녀를 낳았다는 사실은 주위 사람들에게 조롱과 손가락질의 대상일 뿐입니다. 게다가 과거에 상관인 루카의 비리를 고발하여 감옥에 보냈다는 사실은 지금 그를 경찰서의 외톨이로 낙인 찍은 원죄가 되었습니다.


한때 뇌물과 각종 비리로 부패한 경찰이었다가 마이클의 내부 고발로 감옥에 수감된 지 5년만에 출소한 루카는 마피아에게 일자리를 구걸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마피아에게 목숨을 저당잡히고 도끼 살인마에 대해 조사해야 하지만, 쇠약해진 탓에 비리 경찰 시절 투옥시켰던 시민에게 구타당하고, 무단 침입으로 경찰에게 체포되는 등 온갖 시련과 수모를 겪습니다.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소설을 즐겨 읽고 탐정이 되고 싶은 꿈이 있지만 지금은 그저 보잘것없는 한 탐정 사무소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는 아이다는 흑인이지만 피부색이 백인에 가깝게 밝습니다. 그래서인지 흑인과 백인 모두와 거리를 두게 되고 아무런 이유 없이 폭행당하면서도, 친구인 루이(스) 암스트롱과 함께 묵묵히 자신의 명민한 두뇌를 이용하여 도끼 살인마를 추적합니다.


각자 나름의 아픔을 지닌 이들이 서로 다른 리듬으로 어우러지며 사건의 전모를 파헤칩니다. DNA 감식과 감시 카메라가 등장하지 않는, 두 발로 뛰고 머리로 골똘히 추리해야 하는 구식 수사를 만나는 건 어느새 무척 신선한 경험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에도 까메오로 등장했던 재즈를 좋아하는 도끼 살인마라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급격한 굴곡을 보이던 1900년대 초반 미국 남부에서 교묘하게 엇갈리는 세 무리의 주인공들을 통해 사건의 해결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전달해 준 작가의 멋진 글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번역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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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라이징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지음, 이원열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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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인적으로 모르는 채로 책을 읽는 게 좋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대괄호로 닫고 글자색을 달리 표기하겠습니다.

 

* * *

 

"화성은 중력이 약하다. 그래서 목을 부러뜨리려면 발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건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시킨다."

 

바로 여기 이 강렬한 오프닝에 책 전체를 끌고가는 힘이 담겨 있었습니다. 화성으로 진출할 만큼 발달했지만, 진보한 환경에서도 이토록 야만적인 교수형의 전통을 유지하는 지구의 후예들. 주인공 대로우는 철저한 계급 사회의 밑바닥인 레드의 일원으로, 자원이 고갈되어 고통스럽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지구인들을 위해, 식민지 개척에 필요한 자원을 화성의 지하에서 캐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힘들지만 사랑하는 부인과 알콩달콩 살던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날 가장 끔찍한 삶의 굴곡이 찾아옵니다.

 

작품 초반 대로우는 [아버지와 부인, 자기 자신까지 교수대에 매달리는 끔찍한 세 번의] 교수형을 경험하며 결코 지울 수 없는 증오와 슬픔을 가슴에 새깁니다.

 

"너희와 나는 '골드'다…

우리는 인간의 살무더기들 위에 높이 솟아

우리보다 하등한 '컬러'들을 인도한다."

 

[특이 체질 덕분에 죽은 것으로 위장한 후 다시 살아난 대로우는] 사실 화성은 이미 개척이 완료되었고, 그저 하등 계급에 대한 착취를 합리화하고 현재의 불평등한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상위 계층이 조직적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자신들을 억압해 왔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들 지배층의 내부로 침투해 들어가 체제를 전복시키는 도화선이 되기 위해 외모뿐 아니라 뼈와 피부 전체까지 교체하는 대수술을 거쳐 최상위 계급인 '골드'로 다시 태어납니다.]

 

대로우가 알게 된 실제 우주는 이미 발전 혹은 개척이 완료되고 모든 것이 '골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인간은 먹이사슬 정점에 있는 골드 외에 그들의 시중인 그레이, 골드를 위해 무력을 행사하는 옵시디언, 쾌락을 담당하는 핑크와 과학 기술을 담당하는 그린, 그리고 대로우와 같이 자원을 채취하며 세계, 아니 지상의 진짜 모습은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억압되고 스러져 가는 하이/로우레드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사회에 처음 진출하는 상류층의 어린 골드들과 함께, 모두가 가문별로 나뉘어 가장 강한 자를 선발하는 적자생존의 무규칙 가상 전쟁에 뛰어들며 작품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장난스럽게 시작되지만 이내 검과 활이 더해지고 사망자가 속출하는, 규모는 작지만 엄청난 속도로 실제와 같이 펼쳐지는 전쟁 속에서, 부유하게만 자라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지하 출신의 대로우는 동료들과는 전혀 다른 전술과 새로운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며 전장을 지배하는 존재가 됩니다.

줄거리만으로도 절로 머리에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을 겁니다. 당연히 엔더의 게임이 제일 처음이겠고, 소년소녀들의 생존기라면 어딘가 메이즈 러너 시리즈와도 어울리는 구석이 있습니다. 조금 넓게 보면 해리 포터 시리즈와 배틀 로얄도 그렇고, 또 작품의 핵심적인 구조에는 디파티드(혹은 무간도)와 트루먼 쇼의 클리셰까지 담겨 있습니다. 파리 대왕은 뭐 따로 언급할 필요도 없지요.

 

이런 유명한 소설들의 장점을 여럿 채용한 익숙한 구조가, 여러 가문과 인물들이 빠른 속도로 명멸하는 이 소설의 중심을 단단히 붙들어 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걔가 어떤 애길래요? 알렉산더가 될 운명을 타고 났어요?

카이사르? 징기스? 위긴? 이건 말도 안 돼요."

 

엔더 위긴은 먼 미래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는, 우리 세계사의 위대한 지배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네요. ^^; 엔더 위긴 시리즈에 영향을 받아서만은 아닐 테지만, 저자는 레드라이징 한 권으로 대로우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퍽 매력적으로 발전한 우주와 공감 가는 여러 가문 간의 알력, 매력적인 인물들을 다수 배치하면서 이야기를 넓혀갈 여지를 많이 준비해 놓았습니다. 익숙하면서도 흥미진진했던 1권 뒤편에는 참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었던 터라, 후속작은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안됐지만, 넌 이기도록 허락 받지 않았는데 승승장구하고 있었지."

 

[대로우는 애초에 불평등한 조건 하에서 시작된 가상의 전쟁에서 경쟁자와 감독관을 모두 꺾고 대총독의 가문으로 선택받습니다.] 수많은 방해 공작과 배신을 딛고 이름을 알린 대로우를 시발점으로 봉기하는 레드의 반란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올해 시리즈 2권인 Golden Son이 출간됐고, 내년 초 3권인 Morning Star가 계획되어 있는데, 시놉시스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2권까지는 대로우의 성장기가 계속될 것도 같습니다..

 

나를 속이고 억압하고, 가족을 교수대에 매단 사회 체제에 대한 증오. 이런 원초적인 감정에 공감하는 데는 작품이 SF, 판타지든, 역사 소설이든, 순정 소설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의 바로 그런 장기를 건드리는 이 작품의 도입부를 읽고 난 후에는, 절로 대로우의 절망과 분노에 공감하고, 지배층의 혈육을 쓰러뜨리는 그의 승리에 환호하고, 어느새 그가 세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그 순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그런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지 않았다."

"화성은 중력이 약하다. 그래서 목을 부러뜨리려면 발을 끌어내려야 한다. 그건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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