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원수는 벌써 너를 잊었다.... 마술사는 너를 무대 위의 허공에 둥둥 떠 있게 하고는 그냥 가 버렸다.-98쪽
늦여름 복숭아는 아무렇게나썩는다 썩는 것의 몸가짐에대해 배운 바가 없으므로-72쪽
나는 참아주었네 ...죽을 필요도 살 필요도 없는 오늘을, 참아주었네, 미리써놓은 십 년치의 일기를, 미리 써놓은 백 년치의 가계부를, 참아주었네-25쪽
요즘 우울하십니까? 돈 때문에 힘드십니까? 문제의 동영상을 보셨습니까? 그림의 떡이십니까? 원수가 부모로 보이십니까?...개나 소나 당신을 우습게 봅니까? ... 곧 미칠 것 같은데, 같기만 하십니까?-31쪽
유심히 보면 담벼락 아래에는 잘게 부서진 백묵 가루가 수북하다. 아이는 정말 온 힘을 다 주어서 꾹꾹 눌러 쓴 것이다. 허리를 굽혀 손가락에 묻혀본다. 씨발놈아, 미영인 내꺼다...... 참 부드러운 증오다.-127쪽
가방 속엔 빈 도시락 통이라도 들었는지 소리가 요란하다. 아이는 벌써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지만 아직도 들려온다. 수치심이란 저렇게 오래도록 덜그럭거리는 것일까. 발걸음을 옮기다 나는 문득 본다. 수많은 빛살들이 같은 쪽으로 도망치다가 컴컴한 그림자들로 길바닥에 와르르 넘어지고 있는 것을.-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