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천명관 장편소설
문학동네 출판

첫 장부터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 설화소설이라고 할 만큼 초인적 인물이 등장하는데,
붉은 벽돌의 여왕이라 불리는 벙어리 여자 벽돌공 ‘춘희’이다. 춘희는 평대 마을에 팔백 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화재의 방화범으로 교도소 수감되었다가 오랜 교도소 생활 후 벽돌공장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평대 마을로 돌아오는 과정도 더위에 옷을 벗어던지거나 허기짐에 뱀을 익히지 않고 생으로 뜯어먹는 모습은 인류의 초기모습처럼 야만적이다.
고래 소설은 금복, 금복의 딸 춘희, 국밥집 노파, 노파 딸 애꾸, 금복의 남자들(생선장수, 걱정, 칼자국, 文 등), 쌍둥이자매, 코끼리 점보, 고래, 엿장수, 약장수, 벽돌공장, 영화관, 감옥, 다방 등 강렬하고 다채로운 캐릭터와 장소가 나온다.
시작은 거대한 몸집의 벙어리 춘희이야기였지만, 소설은 금복의 휘황찬란한 삶이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전설같은 이야기들이다. 책을 덮고나서 얼마나 금복이 남자들을 만났는지 남자들이 끊이지 않았던 기억밖에 없었다;; 첫 번째 남자인 나이많은 생선장수에게 재산을 불리게 해주고(금복이 생선을 10월에는 말리지 말라고 했지만 말을 안듣고 태풍을 만나 재산을 다 날린다), 춘희 아빠일 것 같은 임꺽정처럼 힘세고 거구인 걱정, 걱정이 다친 후 영화관의 서부영화를 보여주는 칼자국을 만나는데 이 칼자국이라는 인물은 이름 한번 길다 ㅋㅋ
'희대의 사기꾼이자 악명 높은 밀수꾼에 부둣가 도시에서 상대가 없는 칼잡이인 동시에 호가 난 난봉꾼이며 모든 부둣가 창녀들의 기둥서방에 염량 빠른 거간꾼인 칼자국'
게이샤를 사랑해서 손가락 6개를 자르며 오야붕이 되어야 했던 칼자국이란 인물을 죽이면서 금복은 거리의 부랑자 생활을 하게 된다.
춘희를 낳은 금복은 (생물학적으로 죽어 부랑자 중 누구일테지만) 죽은 걱정과 똑닮은 것을 보고 자식이지만 자신이 저지른 과오때문인지 멀리한다. 그 때문에 춘희는 항상 엄마의 품을 그리워하고 보고 듣지만 말할 수 없는 벙어리의 신체적으로 제한된 상황 때문에 더 삶이 외롭게 느껴졌다.
박색으로 인한 자격지심으로 세상의 원망만큼 돈을 많이 모은 국밥집 노파가 있다. 건달들이 찾아오고 자신이 눈을 찔러 애꾸가 된 딸도 찾아오지만 노파의 돈은 찾지 못했는데 시간이 흐른 후 금복이 그 국밥집을 사게된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추한 노파의 국밥집 지붕에서 쏟아져 나온 돈으로 남발안에 넓은 땅을 사서 벽돌 공장에서 벽돌을 찍어내는데 노파의 딸 애꾸가 벌을 뒤집어 쓴채 기이한 모습으로 나타나 금복에게 자신의 것이라며 돌려 달라 말한다. 노파는 귀신인지 실제 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평생 모은 돈으로 사업 성공한 듯 보이는 금복에게 복수하는 듯 모든 것을 빼앗는다.
소설에서 자본주의의 법칙, 사랑의 법칙 등 법칙은 40번도 넘게 나오는데 꼭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는 것일까. 벗어날 수 없는 운명같은 느낌으로 그놈의 법칙들은 계속 된다.
개망초는 일제강점기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강한 번식력으로 농사를 망칠만큼 많이 피어 개망초라 불리었다고 하는데 춘희가 가는 곳마다 개망초가 있었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다는 의미로 춘희가 죽음을 깨닫고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차를 타고 평대 도착해서부터 친근한 개망초를 글 모르는 춘희는 서명란에도 개망초로 사인을 했는데 이상하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 춘희가 벽돌을 굽고 죽음과 가까워지는 페이지에서도 텅빈 페이지에 개망초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어 춘희의 쓸쓸함이 더 느껴졌다.
작가는 중간 중간 “독자여, 조금만 더 들어보시라.” 라고 말하여 이야기꾼이 되어 읽는 재미를 더 돋우어주고, 화법은 아주 능란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 속 인물들의 개성들을 화려하게 표현해주었다. 소설 전반적으로 금복의 특이한 향과 풍만함같은 전설적인 표현을 위해 쓰여야 했겠지만, 금복을 향한 남자들의 색정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외설스런 느낌이 많았다.
교양있는 지식인, 일반적이고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기 급급했던 밑바닥 인생들의 모습이 많았던 『고래』 속 여성들은 소설의 주인공이었고 남자들을 이용하고 죽이면서 욕망을 채워가는 모습이 흥미롭게 기억되었다.
📖 책 속 밑줄긋기
살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자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天刑)의 유니폼처럼 그녀를 안에 가둬놓고 평생 이끌고 다니며 멀고 먼 길을 돌아 마침내 다시 이곳 벽돌공장까지 데리고 온 그 살들을 춘희는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P19
그녀가 진정 사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드는 그 단순한 세계였다. 그녀는 그의 육체를 신뢰했으며 그 거대한 존재 안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행복했다.
P72
그가 원하는 것은 그녀의 투정이었고 그녀의 눈웃음이었으며 그녀의 포옹과 눈물, 그녀의 숨소리, 그녀의 사랑만이 그가 진정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이 궁극은 나오꼬, 금복의 모든 것이었으며 그것을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랑의 법칙이었다.
P107
🔖❁개망초.
그것은 춘희가 금복의 손을 잡고 평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역 주변에 무성하게 피어 있던, 슬픈 듯 날렵하고, 처연한 듯 소박한 꽃의 이름이었다. 이후, 그 꽃은 가는 곳마다 그녀의 뒤를 따라다녀 훗날 그녀가 머물 벽돌공장의 마당 한쪽에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간을 보낼 교도소 담장 밑에도, 그녀가 공장으로 돌아오는 기찻길 옆에도 어김없이 피어 있을 참이었다.
P150
춘희는 비로소 생전의 점보가 말하던 죽는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것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거였다. 파리가 눈에 앉아도 눈을 깜빡여 쫓지 못하는 거였고 차가운 비가 내려도 피하지 못하는 거였으며 다리가 아파도 앉아서 쉴 수 없는 거였다. 춘희에게 있어서 박제된 점보는 더이상 점보가 아니었다.
P218
사람들은 하는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헛헛해 다방을 찾아가 독한 커피라도 한 잔 들이부어야 겨우 속이 차는 듯싶었다. 또한 다방에 앉아 하릴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다보니 사람들간의 관계는 더욱 번잡스러워졌고 시비는 늘어났으며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느라 술값이, 혹은 커피 값이 더 많이 들어가 소비가 더욱 촉진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 마음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P220
🔖그녀가 좁은 산골마을을 떠난 것도, 부둣가 도시를 떠나 낙엽처럼 전국을 유랑했던 것도, 그리고 마침내 고래를 닮은 거대한 극장을 지은 것도, 모두가 어릴 때 겪은 엄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P271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궁극, 즉 스스로 남자가 됨으로써 여자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P271
그날 춘희가 종이 위에 정성스럽게 그려넣은 것은 바로 공장 주변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개망초였다. 춘희가 서명란에 왜 개망초를 그려넣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기차를 타고 평대에 처음 도착할 때부터 단숨에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후, 개망초는 언제나 그녀에게 가장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던 터라 그녀가 조서에 개망초를 그려넣었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P309

마당엔 다른 잡초는 눈에 띄지 않고 오로지 개망초만이 하얗게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마당 한쪽엔 짐승의 뼈로 보이는 뼈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며 벌통으로 보이는 썩은 나무통이 몇 개 나뒹굴었다. 살림집으로 쓰인 듯한 건물은 이미 폭삭 주저앉아 그 위에도 개망초가 무성했다.
P402
그녀는 우리와 달랐으며 다르다는 이유로 평생 고독 속에서 살았다.
P415 에필로그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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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
그것은 춘희가 금복의 손을 잡고 평대에 처음 도착했을 때 역 주변에 무성하게 피어 있던, 슬픈 듯 날렵하고, 처연한 듯 소박한 꽃의 이름이었다. 이후, 그 꽃은 가는 곳마다 그녀의 뒤를 따라다녀 훗날 그녀가 머물 벽돌공장의 마당 한쪽에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시간을 보낼 교도소 담장 밑에도, 그녀가 공장으로 돌아오는 기찻길 옆에도 어김없이 피어 있을 참이었다. - P150
사람들은 하는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헛헛해 다방을 찾아가 독한 커피라도 한 잔 들이부어야 겨우 속이 차는 듯싶었다. 또한 다방에 앉아 하릴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다보니 사람들간의 관계는 더욱 번잡스러워졌고 시비는 늘어났으며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느라 술값이, 혹은 커피 값이 더 많이 들어가 소비가 더욱 촉진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 마음속엔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 P220
그녀가 좁은 산골마을을 떠난 것도, 부둣가 도시를 떠나 낙엽처럼 전국을 유랑했던 것도, 그리고 마침내 고래를 닮은 거대한 극장을 지은 것도, 모두가 어릴 때 겪은 엄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 P271
그날 춘희가 종이 위에 정성스럽게 그려넣은 것은 바로 공장 주변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개망초였다. 춘희가 서명란에 왜 개망초를 그려넣었는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기차를 타고 평대에 처음 도착할 때부터 단숨에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은 이후, 개망초는 언제나 그녀에게 가장 친근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던 터라 그녀가 조서에 개망초를 그려넣었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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