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서 간간이 표출되는 '고백에의 성향'은 두 개의 상이한 원천으로부터 나옵니다. 이미 말한대로 첫번째 원천은 그 어떤 고백도 작가의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장차 나타나게 될 자신의 결점들을 치유시키거나 악화시키지도 못한다는 뿌리깊은 확신입니다. 요컨데 이 확신은 반정신분석적 확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또한 이 확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과 더불어 내가 늘 품고 있던 생각 중 하나입니다. 두번째 원천은 스스로 희생양이 되곤하는 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 그 어떤 고백으로도 내 인격을 다 길어올릴 수 없다는 나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이런 과대평가는 나의 가능태라는 대양 속에서 사람들이 끝없이 물을 길어낼 수 있다는 확신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요컨데 만약 누군가가 나를 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보 부족으로 인한 오해의 소산일 것입니다. ...-0쪽
어쨌거나 나는 수년 전부터 경멸에의 유혹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점점 더 그 유혹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유혹은 나를 굴복시키고 말 겁니다. 휴가중에 아버지가 고속도로 휴겟소 근처에서 캠핑차를 주차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과거에 자주 있었던 일입니다. 단 몇 분 사이에 아버지의 표정에는 수많은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대부분은 위로할 길 없는 무력감이었지만 떄에 따라 흥겨움과 무상함이 스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배적인 것은 거대하고도 탐지하기 어려운 모멸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주차해놓은 차에서 내린 나는 휴가를 떠나는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기 보다는...휴가 인파속으로 합류하기 직전의 아버지의 표정을 몇 분 동안 살폈습니다. 그 몇 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아이가 세상을 접하는 모종의 표지를 부모들에게서 찾기 위해 어느 정도로 애쓰는지를 생각해보는 어른들은 많지 않습니다. 또한 사춘기의 광풍에 선행하는 그 몇 년 동안 아이의 지성이 어느 정도나 날카로워지고, 요동치며, 종합과 일반론에 능숙해지려고 하는지 알고자 하는 어른 역시 몇 안 됩니다. -0쪽
내가 아는 아버지는 항상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그 끔찍하고 모욕적이고 절망적인 가난을 증오하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기와 같은 정도로, 아니 자기보다 더 많은 돈을 번 사람, 돈과 늘 함께하는 사람, 지나친 소비, 모욕적인 언행, 무례함을 증오했ㅅ브니다. 아버지는 부르주아에 속했지만 부르주아들을 경멸했습니다. 아버지는 대기업의 사장이었지만 다른 대기업의 사장들을 경멸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람'이었습니다. ...홀로 성공하고,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구축한 역사를 무너뜨리고, 그 누구에게서 아무것도 물려받지 않고, 고삐를 죄듯 자신에 대한 기억을 될 수 있는 한 적게 가지려고 했던 분입니다. 하지만 콧대가 높고, 고상함이 마르지 않는 분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사회적 지위로 얻을 수 있게 된 쾌락과 즐거움을 완전히 부정하기도 하고, 또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기도 하면서 '최소한의 균형'으 ㄹ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지녔던 겁니다.-0쪽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와 같은 금욕,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채 자기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방식, 특히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정체성으로 대치하려 하지 않으며 자기가 직접 체험한 삶과 꿈군 삶으로 대치하지 않으려는 결심, 바로 이 모든 것 속에 추상적이고, 닻을 내리지 못했으며, 공동체라는 비옥한 토양 속에 발을 디디는 대신에 별을 생각하는 머리를 가진 아버지 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르지 않는 샘 하나가 있다고 말입니다. 후일 나는 여러 권의 책에서 특히 '프랑스 이데올로기'에서 그런 유형의 사람을 철학적으로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0쪽
...15년 전에 '투쟁 영역의 확장'에서 사용하던 틀... 프랑스...생각컨대 '투쟁 영역의 확장'은 유익한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이라면 이런 작품이 출간될 수 없었겠지요.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현재의 불만 상태를 인정하려 하지않고 또 꿈과 무사태평의 허상을 요구하는 최후의 단계에 도달해 있으니까요. 게다가 우리 사회는 더 이상 현실을 마주 볼 용기가 없어 보입니다. 그 결과 불만 상태는 계속 악화되고만 있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술을 얼마나 많이 마셔대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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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의 편지 무질서보다는 불의가 낫다? 괴테의 문장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노파의 방문'이라는 작품의 주인공인 잡화상 알프레드 3세의 이야기이기도 합닏다. 뒤렌마트 아주 흥미로운 작품 귈렌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노파의 이야기. 노파는 늙어 마을에 돌아왔습니다. 있는 대로 멋을 부리고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이 성공을 과ㅏ시하는 방식으로. 며칠동안 음흉하지만 주도면밀하게 심리전을 준비한 끝에 그녀는 마을 주민들에게 이렇게 선언. '여러분은 클라라를 기억합니까? 석공의 딸이자 알프레드의 애인이었던 그 클라라를요. 임신하고서 알프레드에게서 버림을 받았던 그 클라라를요. 그 어린 클라라는 순교자와 같은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나는 복수를 하고 또 내 고향 마을을 구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지금 당신들은 파산 지경에 있지 않습니까? 공장들은 문을닫지 않았습니까? 500억 마르크를 내놓겠습니다. 거기에 당신들이 나누어 갖게끔 500억 마르크를 더 내놓겠습니다. 그 대가로 내ㅐ가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저 남자를 죽여주세요!" 정직한 주민들 '공갈이다! 모욕이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기다릴 겁니다. 당연-0쪽
당연한 것이지만...보통 인간은 도덕적으로 그리 감탄할만한 창조물이 아닙니다. 보다 섬세하게 살펴보자면, 보통 인간은 도덕적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동경하고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하고자 합니다. 티베트인들의 저항은 그 시작에서부터 '존경을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보아 그 전략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논술 주제에나 나올 법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말한 바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칸트의 손은 너무나 깨끗해서 결국 손이 없어져 버렸다'(칸트주의에 의해 표방되는 도덕, 즉 '더러운 손'과 대조되는 '깨끄한 손'에 의해 상징되는 도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주의에 '손'이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의미) 하지만 이 바보는 오늘날 그냥 침묵을 지키고 있는 편이 더 낫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법에는 매우 강한 손이 있습니다.-0쪽
티베트 사태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고 혼잡한 이 나라의 모습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명사회 전체의 시각에서 보면 티베트 사태의 핵심은 바로 도덕법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야말로 희생자들의 무고함을 통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티베트인들을 선동하는 것은 이른바 국민적 감정이라고 불리는 빼앗김에서 유래하는 원한과 유치한 자부심이 뒤섞인 근거 없는 환영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 질서의 원리'입니다. 정말로 극복하기 어려운 원리입니다. 나는 특별히 한 사람의 '영적 지도자'를 숭앙하고 싶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현재 진행중인 이슬람 혁명을 고무하느 ㄴ것도 바로 이 '영적 질서의 원리'입니다. 나치즘의 경우에도 역시 도덕법이 문제가 되었습니ㅏㄷ. 그것도 좀더 높은 강도로 말입니다. 거기에도 여전히 '영적 질서의 원리'가 있었습니다.... ....-0쪽
내 모든 소설을 가로지르는 때로는 강박관념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일단 시작된 '타락의 전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절대적인 불가역성'입니다. 이와 같은 타락은 친구관계, 가족, 부부, 더 중요한 사회 집단과 사회 전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내 소설에는 용서라든가 반성, 두 번째 기회라는 것이 졵재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모든 것은 아름답고 훌륭한 법입니다. 그리고 절대 쓸데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다 본질적입니다. 마치 무기력한 대상에도 잘 적용되는 보편적 법칙과도 같습니다. 문자 그대로 그것은 '엔트로피적'입니다. 따라서 모든 쇠퇴와 상실의 필연적인 특성을 이 정도나 확신하게 된 누군가에게 반동이라는 개념은 적용될 수 없습니다. 나는 조국 프랑스에 대해 아무런 의무나 책임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거주할 나라를 선택하는 것은 호텔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그저 지구에 잠시 체류하는 것 아니던가요. 나는 이 점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뿌리도 내리지 못했고 열매도 맺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공중으로 던져진 돌과 같습니다. -0쪽
'성서' 모델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장점은 에피쿠로스주의가 장애물에 부딪혀 실패한 부분인 상호 주관성 차원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점. 왜? 이유는 아주 간단. 개인은 혼합물이고 항상 진행 중인 사행이기 때문이며 또한 깨인은 내부에 있는 것과 변화하는 외부, 이렇게 말하자면 매일 경쟁적인 개별화가 중단없이 자기를 내맡기는 전쟁, 이 개별화 전체가 세계 전체에 반해서 시도하는 투쟁에 따라 변화하는 외부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이기 때문이며 그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이것 속에 들어있는 것이 내일은 저것 속에 들어 있게 되는 것이죠.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이 순간 내 본질에 관여하는 것이 편지 교환이 끝나고 나면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심연과 마찬가지의 가교가 있고, 또한 전쟁 중이거나 투쟁 중에 있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공평한 세게가 있습니다. 원자론을 주창하는 철학자들이 강요하는 고독이라는 감정에 대한 참다운 부인은 정확히 이와 같은 공평함에 대한 경혐, 오늘날에도 여전히 결합과 교환과 같은 분명한 갈등 속에서 그 존재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 주체-0쪽
나에게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이것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한 자를 보면 나는 모종의 연민을 느낍니다. 그런데 이 때 내가 느끼는 연민은 덫에 거린 짐승을 볼 때의 연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그 동물을 보고 덫의 올가미만을 제거하려고 애씁니다. 왜냐하면 신경과 살의 상처를 상상하기 때문이빈다. 그리고 고백컨데 나는 '인간으 ㅣ존엄성'이라ㅡㄴㄴ 개념에 대해 애초 그런것이 있었던 것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 안에서 그 어떤 특별한 존엄성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내게 고통을 줄 수 있고, 부당하게 대우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 나를 아주 피곤하게 만들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힐 수도 있습니다. -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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