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총 6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 차례를 봤을 때에는 잘못 봤는 줄 알았고,
다음엔 이 책이 1권짜리 책이 아니라 몇권 더 있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2-5페이지 짜리 장으로 구성된 굉장히 호흡이 짧은 소설이다.

호흡만 짧은 것이 아니라 문체도 짧다. 중학교 때 국어시간에 배운 간결체, 건조체의 전형이다.
문장이 짧고 간결하면, 내용은 경쾌하고 쉽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그렇게 경쾌하고 밝은 어조로 수용소의 삶을 이야기한다.
헉!

그런데 이 책은 행간의 의미가 그만큼이나 농밀하게 담겨져 있어,
문장을 문장 그대로 읽으면 그 감동을 쉽게 전달받기 힘들다.
첫 페이지에 짐을 싸는 장면이 나오는데, 주인공은 게이에게 쏟아지는 눈초리를 견디다 못해
좁은 나라를 떠나고 싶어한다는 심정이 담겨져 있는 그 장면에 대한 묘사 한 마디 없는 문장은
단순히 “내가 가진 것은 모두 가지고 간다”로 표현되어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묘사는
아침 식사 시간에 우연히 라디오에서 총격전에 대한 뉴스를 보게 된 장면이다.

“할아버지는 폴란드에 대해 말하는 대신 오이샐러드를 한 번 떠 먹고 침묵했다.
할머니는 식사는 가족들끼리 보내는 시간이라며 라디오에서 떠드는 정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미술교사였던 아버지는 블라우풍크트 옆에 놓인 재떨이 안에
빨간 삼각깃발이 달린 알록달록한 시침핀을 놔두었다.
지도에 꽂힌 아버지의 깃발은 18일에 걸쳐 동쪽으로 전진했다.
끝났구나, 폴란드는. 할아버지가 말했다.
깃발은 멈췄다. 여름도 저물었다.”


작가는 전쟁의 참혹함, 수용소 생활의 처절함 따위에 대해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상황을 묘사할 뿐이다.
따라서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사람과
그냥 이 책을 소설 읽듯 훑어본 독자와의 간극은 ‘꽤나’ 멀 것이다.
어쩌면 같은 책을 읽었다고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이나 농밀하고 진한 이 글을 읽기에는 나역시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또 그에 대한 배경지식이 얕은 철부지 독자에 불과하니,
이 책을 읽으면서 책과 나와의 사이에 놓인 벽을 실감하여 안타까웠다.
‘단순히 어려웠다’가 아닌, ‘좀 더 알면 더 많이 보일 책인데’라는 아쉬움이랄까.
충분히 흡입력있고 재미있었지만,
읽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는 살아있는 생물체로 펄떡일 것이다. 이 책은.

조만간, 다시.
그리고 공부를 좀 더 하고 나서 또 다시,
그리고 나이가 좀 더 들어서 또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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