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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유토피아 -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 ㅣ 키워드 한국문화 5
서신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그날이 그날 같아서 지루하다는 생각조차 들던 일상이 깨어졌을 때, 그렇게 평범했던 나날이 행복이었음을 깨닫곤 한다.
"저는 뭐 대단한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냥 너무 가난하지도 너무 부유하지도 않게 평범하게 살다가 평범하게 생긴 아내를 맞이해 아들딸 낳고 평범하게 살다가 죽게 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랬더니 염라대왕이 화를 버럭 내면서, "그런 게 있다면 내가 하겠다. 이놈아!" 했더란다.(p136) 앞서 두 선비의 거창한(?) 부탁은 수월케 들어주던 염라대왕이 "평범한 삶"을 원하는 선비의 소원은 들어주지 못했다는, 조선시대 고소설 [삼사횡입황천기三士橫入黃泉記]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라는 부제를 가진 책 [조선인의 유토피아]를 읽었다. 문학동네에서 펴내는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의 다섯번째 책이다. 키워드 한국문화라는 이 시리즈의 제목은 책에 실린 내용이 다소 딱딱하고 전문적인 것이리라는 짐작을 하게 했다. 그래서 나 같이 초보적인 독해력과 이해력을 가진 독자가 읽어내기엔 어려울 것 같다는 짐작에, 선뜻 읽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이 시리즈는 오히려 나와 같은 독자들을 위해 씌인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것이니 당연히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같은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어 자연스레 책을 펼쳐볼 수 있게 했다."('키워드 한국문화를 펴내며' 中) 그래. 저 문구 "조근조근 들려주어"가 내가 읽은 이 책 [조선인의 유토피아]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책이 얇기도 하거니와 글쓴이가 조근조근 들려주는 이야기가 재미있어 책장이 잘 넘어가는 책이기도 했다.
책에서는 안평대군이 꾼 꿈과 그를 바탕으로 안견이 그렸다는 [몽유도원도]로 이야기를 시작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우리가 꿈꾸고 있는 세계 - 유토피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안견의 [몽유도원도]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사실밖에 몰랐는데, 안평대군의 [몽유도원기]에 대해서도, 그리고 당대 최고의 문인 21명에게 받아 붙인 찬문에 대해서도, 1939년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며, 덴리대天理大에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뜻밖이라 놀랍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안평대군이 꾸었던 도원은, 그의 안타까운 삶과 연결되어 더욱 간절해진다. 만약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지 않았다면 안평대군의 삶은 어땠을까. 도원에서의 삶은 아니더라도 타고난 학문과 예술적 자질로 더 많은 "도원"을 꿈꾸고 이야기 나누며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몽유도원도]와 관련한 이야기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의 "이상향"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글쓴이는 조선시대의 여러 글과 그림에 소개된 유토피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세상들은 다른 듯하면서도 한 줄기로 엮어낼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유토피아는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먹고 노는 사람들의 세상이 아니라, "그저 다같이 땀 흘려 뽕나무를 심어 가꾸고 농사도 지어서 그것으로 밥을 먹으면서 닭이나 개 등의 가축을 기르고 이웃과 나란히 함께 조용히 살 수 있는 세상!"(p43)이다. 외부와는 몇 세대 동안이나 단절된 채 살아왔으며, 외부인이 유토피아에 갈 수 있는 것은 우연한 기회일 뿐 의도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공간이 아니기에, 다시 찾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의미하듯 '좋은 곳'이지만 '없는 곳'이기도 한 그런 공간.
일상에 지쳐 유토피아를 꿈꿀 때가 많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하고..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본다. 그 "어딘가" 역시 이 마음을 그대로 안고 간다면 "여기"와 다를 바 없음을... "여기"도 내가 꿈꾸었던 "어딘가"로 만들 수 있음을.. 종이 한 장의 차이일런지도 모른다. 내 마음대로 뒤집을 수 있는 손바닥의 앞뒤와 같을지도 모른다고..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꾸었던 세계를 들여다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내게 준 선물은 바로 그런 깨달음이다. "한국문화의 정수를 찾아 그 의미와 가치를 정리하는"(p151), "책으로 만든 '한국문화 특별전시관'"을 표방하고 있는 이 시리즈의 책이 이렇듯 긍정적인 이미지의 옛 이야기들을 친근하게 풀어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