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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형민우 초한지 1 : 떠오르는 태양 ㅣ 이문열 형민우 초한지 1
이문열 원작, 형민우 그림 / 고릴라박스(비룡소) / 2009년 7월
평점 :
어렸을 적에 동화책이든, 만화책이든 책이란 것과 그닥 친하지 않았던 탓인지, 나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종종 겪곤 했다.("한다."가 더 적당하겠군.)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지 중학생 때였는지, 고사성어를 간추려 소개해주는 어떤 책에서 항우와 유방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으며 평소 사고의 범위가 좁았던 탓인지, 항우와 유방이 군대를 거느리고 싸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그저 그 둘의 성격이 나빠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꽤나 힘 좀 쓸 줄 아는 "싸움꾼" 정도의 상상에 그치고 말았다. 아.. 이 무식함이란.... 이 사고의 비좁음이란.. 이 상상력의 한계란...!
[초한지]를 만화로 접했다. 이 만화의 원작이 되는 이문열 [초한지]를 비록 1권으로 그치긴 했지만, 지난해에 읽었던 기억이 있다. 이문열 [초한지]를 읽으며, 같은 영화라도 더빙판이냐, 자막판이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느낌이 차이가 나듯이, [삼국지]나 [초한지] 역시 평역자에 따라 글 맛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예전에 읽었던 [초한지]와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만화로 보는 [초한지]라... 이건 또다른 맛이네. 앞서 읽었던 [초한지]들이 흰 우유였다면, 만화[초한지]는 초콜릿우유 같달까...
이 책을 처음 손에 잡고선, "첫인상이란 게 이렇게 강한 거구나." 싶었다. 내 머리 속에 들어있던 항우와 유방은 故고우영 화백의 십팔사략에 등장하는 혈기왕성 우락부락의 젊은 항우와 우유부단에다 사람 좋은 중년의 아저씨 유방이었고, 이후 역사서를 읽을 때나, 초한지를 읽을 때면 그런 항우와 유방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는데... 이 책에 그려진 항우와 유방은 내 머리 속의 그들 모습과는 달라서 약간 낯설기도 했다. 항우는 머리 속에 그려왔던 모습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데, 너무 젊고 그리고 항우에 비한다면 너무 풋내기 같이 그려진 유방은 낯설다. 음... 유방을 제외하곤 대부분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어린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다시 써 내야겠다고 벼르고 있었"(작가의 말 中)는 이문열과 만화가 형민우의 [초한지]. 1권은 이야기의 도입부로, 진시황의 잔인한 통치로 고통받는 민중들의 이야기와 항우, 유방, 한신과 장량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만화라 그런지 이야기의 전개가 빠르고 간략하다. 한편의 무협영화를 보듯 속도감 있게 책장이 넘어갔다. 인물의 성격이나 감정을 그림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만화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들이 읽기 좋도록, 어려운 단어에 대해서는 각주를 달아놓은 점 역시 이 책의 장점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한신과 관련한 이야기에서 한신의 배고픔을 덜어준 노인에 대한 묘사부분이다. 빨래하는 늙은 아낙(표모漂母)에게 밥을 얻어먹은 한신의 은혜를 갚겠다는 말에, 늙은 아낙이 화를 냈다는 유명한 일화를 가난한 늙은 농부로 바꿔버린 것은 '기식표모'던거 '걸식표모'던가 하는 그 고사성어와 다소 멀어지는 듯해서... 하지만 책 말미의 "아는만큼 재미있는 초한지"라는 코너를 통해, 초한지에 대한 설명과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고 있는 점은 어린이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만화라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초한지]. 나 같이 상상력이 빈약한 사람이 어린 시절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역사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