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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못 된 세자들 ㅣ 표정있는 역사 9
함규진 지음 / 김영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못 다 핀 꽃들이 왜 이렇게 많았을까."(p16)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이 몇이나 될까 싶었는데 의외로 많다. 조선의 왕이 27명인데, 이 책을 통해 본 [왕이 못 된 세자들]은 모두 12명이나 된다. 그들이 만약 세자에 그치지 않고 왕이 되었더라면, 어쩌면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과는 많이 다른 모습의 조선 역사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이 책을 읽으며 했다.
뭔가 "될 수 있었"지만 결국 "되지 못한" 인물들의 이야기라서 그럴까. 이 책에 등장하는 12명의 인물들을 하나로 꿰는 바늘은 아마도 "울鬱"이란 한 글자가 아닌가 싶다. "우울憂鬱, 울분鬱憤, 울화鬱火........ 略.......... 그것은 조선이 북방민족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중화를 따르는 성리학의 나라가 되기로 했을 때부터, 만주 벌판을 내달리던 말에서 내려 성학聖學에 힘쓰는 선비형 군주가 되기로, 그를 위해 코흘리개 때부터 글공부에만 전념하는 세자 교육제도를 마련하기로 했을 때부터 조선의 옥좌에 똬리를 틀고 기생해온 악령이었다."(p137)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들은 최초의 세자 이방석으로부터 조선 역사의 마지막 세자 영친왕 이은까지다. 그 중에서 의경세자 이장, 순회세자 이부, 효장세자 이행, 문효세자 이향, 효명세자 이영 등은 병으로 요절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인물들이고 나머지 일곱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인물들이다. 어느 누구의 인생사가 물 흐르듯 그렇게 순탄하기만 했겠냐만은.. 왕조 국가의 지존인 왕이 "될 뻔"했던 인물들의 인생이야기 치고는 너무 우울했다. 되지 못하고 "될 뻔"했기에 어쩌면 그 우울함은 예견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간 역사 전면에 부각되지 않았던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의 이야기이기에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이 많다. 특히 영친왕 이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 책을 통해 만난 그의 삶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가슴 한 켠이 짠했다. "그는 적극적 친일파가 될 만큼 지조가 없지도 않았고, 일본인들 틈에서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뒤어들 만한 배포가 있지도 않았다. ...... 略........ 하지만 끝내 떨쳐버리지 못한 모호한 정체성 .........略....."(p247) 친일파로 평가받기도 한다지만 글쎄다. 모든 친일파들에게도 해당되는 변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기존의 역사학계의 정설과는 시각을 달리하는 글쓴이의 새로운 역사보기였다. 글쓴이는 소현세자와 강빈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아니, 지나치게 미화된 두 인물에 대해 진실 그대로를 보려고(?) 노력한 글쓴이이의 시도는, 낯설 정도로 새로웠다. 그간 내 머리 속에 그려져 있던 선구자적인 이미지의 소현세자와 강빈의 모습은 과연 얼마만큼 사실에 가까운 것인가를 의심케 했다.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서 죽었고,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은 사실 그의 친정을 위한 정치적인 변명이었다고 보는 기존의 정설에 대해서도 글쓴이는 반대하고 있다.
사도세자와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했던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역사지식이란 게 얼마나 보잘 것 없느냐 하는 것. 소현세자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혜경궁 홍씨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으로 여겼었는데, 사실 그 시각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내가 그간 보아온 역사서 저자들의 시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 전면에 등장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인물들. 영원한 2인자로 생을 마감하고 만 안타까운 사나이들의 이야기가 가씀을 짠하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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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쪽의 화완옹주에 대한 설명 : "정처(鄭妻 : 화완옹주가 정후겸과 혼인했었으므로....)" 라는 부분과 165쪽의 "한확은 딸을 명나라의 후궁으로 보냈고,"라는 구절은 잘못된 표현인 것 같다. 정후겸은 화완옹주의 양자로,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이 된 사람은 한확의 딸이 아니라 두 명의 누이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