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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 - 20세기 한국을 읽는 25가지 풍속 키워드
손성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10월
평점 :
품절
정말 유쾌하게 읽히지만, 한편으론 설명할 수 없는 감회에 가슴이 짠해지기도 하는 책. 책을 다 읽고 난 이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느낀 바를 글로 옮기기엔 너무나 빈약한 글솜씨가 원망스럽다. 어제 오후 큰 기대 없이 펼쳐든 책이 "의외로(?)" 아주 흥미로워서 잠을 설쳐가면서까지 다 읽어버렸다. 책을 읽으면서 많이 웃었고, 그리고 더러는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책을 읽다가 눈물을 찔끔거리다니...! 슬픈 사랑을 담은 소설책도 아니건만, 내 눈물의 원인은 "가을" 탓일까.. 가을은 소설이나 수필만 읽기 좋은 계절은 아니로구나!
추억 때문에, 혹은 추억으로 살아갈 만큼 많은 나이도 아니건만, 요즘들어 자꾸 "옛날"이 그립다. 이 알 수 없는 그리움의 정체도 "가을" 탓이려나..? "그 때가 좋았지."라는, 나이가 제법 든 사람들만이 내뱉을 수 있을 것만 같던 말들을 요즘 자주 내뱉고 있던 참이었다. 예전에 서류철에 묶어서 연습장으로 사용했던 것과 같은 느낌이 나는 누런색 표지가 괜히 정겹다. "아날로그 감성에 목마른 당신을 위한 책! 지난 것은 언제나 눈물겹도록 아름답다"는 띠지의 문구에 100% 동감이다. 그렇다. 생각해보면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절"이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시절이기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기에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지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이기도 하다.
글쓴이는 61년생이다. 흔히들 말하는 386세대 되겠다. 나보다 훨씬 "추억할꺼리"가 많은 시절을 살아왔을테다. 이 책에 실린 "옛날 이야기"는 20세기 전시기를 종횡무진하고 있다. 멀게는 아버지의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를 거쳐 내 세대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다한" 것들의 역사를 담고 있는 책이다. "역사"가 거창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소소한 삶의 이야기들이 어쩌면 진정한 역사일지도 모르겠다.
글쓴이가 유쾌한 글담으로 술술 풀어내고 있는 추억꺼리는 내 기억의 한계를 뛰어넘는 아주 낡고 빛바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더러는 "맞아! 그랬었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날 저무는 줄 모르고 골목을 뛰어다녔던 골목길에서의 다양한 놀이에 대한 추억은 특히나 내 기억과 많은 부분 일치했다. 골목길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이들의 놀이가 사라져가고 있는 점은 정말 많이 안타깝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떠오른 기억인데, 소풍가방이란 게 따로 있었던(!) 그 시절의 소풍이야기와 가을운동회에 대한 기억도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해졌다. 쥐꼬리 가져가기는 기억에 없지만 채변검사에 대한 기억은 있다.
가난했고, 뭔가 어설펐고, 이상하고 수상하기도 했던 20세기의 이야기. 하지만 글쓴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가난"이나 "우울" 따위의 슬픈 기억이 아니라, 그 어려웠던 시절을 함께 했던 가슴 따뜻한 "정"이라는 게 느껴지는 책, 그 정감이 책장을 넘기는 손에 묻어나는 책이었다. 추억의 단서가 필요할 때 펼쳐보면 괜찮을 것 같은 책. 오랫만에 부모님에게 읽기를 권해드리고 싶은 책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