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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자살 클럽
전봉관 지음 / 살림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경성자살클럽]이라. 이 책을 처음으로 접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얼마전에 읽었던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이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도 "연애"란 걸 했던가 하는 궁금증에 펼쳐든 책에는, 내가 알고 있던 것, 혹은 짐작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자유롭게 연애를 했으며, 그 연애사건만으로도 족히 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이 비극으로 끝을 맺어 책을 읽으면서 가슴 한켠이 먹먹했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 주세요~" 광고 카피가 생각났다. "그냥 사랑"할 수 없는 현실에 죽음을 선택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어찌 보면 뻔한 신파조이건만, 연극이나 영화가 아닌 실제 이야기란 게 가슴이 짠했다. 이 책 [경성자살클럽]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실려 있지 않을까 하고 책을 펼쳤더니, 과연 몇몇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같은 주제라도 [~연애사건]과는 저자가 그 사건들 혹은 인물들을 바라보는 느낌도 다르고, 내가 전혀 몰랐던 이야기들도 여럿 수록되어 있어 책읽기의 재미는 쏠쏠했다.
자. 이 책의 내용을 마음가는대로 재구성해보자. 글쓴이는 <근대조선의 사랑과 전쟁> <근대 조선 잔혹사>라는 두 개의 큰 틀로 나뉜 열 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자살충동의 순간"이라는 이야기를 해보련다. 물론 이 책을 바탕으로.. 시대적 배경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잡아먹지 못해(이미 잡아먹었으면서도) 두 눈을 시뻘겋게 뜨고 째려보고 있는 상황이다. 서양의 제국주의는 조선에도 근대 사상과 문물을 전파하고 있는 중이다. 현대적이라기엔 아직 구식의 냄새가 나고, 구식이라기엔 너무 급진적이다 싶은 요소들이 곳곳에 혼재되어 있는 그 시대 그 공간.
가난하지만 그 가난을 자식에게만은 물려주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부모 아래에서 "나"는 태어났다. 갓 예닐곱살. "사람구실을 하려면 모름지기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인식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은 까닭"(p211)에 부모는 "밥을 굶을지언정 어떻게든 자식 교육은 시키려"(p211)한다. 식민지 지배를 위한 총독부 건물은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지으면서도 초등학교는 더 이상 짓기가 힘에 부친다는 사이토 경성부윤이란 넘의 망발이 치가 떨린다. 부족한 수용시설 덕분에(?) 초등학교 입시를 치러야 한다. 겨우 예닐곱살이 된 아이들이 입시에 시달려야 한다고...? 에라이 나쁜 넘들. 당신들에겐 조선인들을 위한 교육시설을 세우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겠지..? 초등학교에 떨어진 "나". 콱 죽고 싶다.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애간장이 탄다. 초등입시 뿐인가? 이 후에도 치러야 할 시험은 많고 학교수는 부족하다. (제8화 유전입학 무전낙제, 입시지옥의 탄생)
어렵사리 입학한 학교, 가난하기에 학교 일을 도와 학비에 도움을 보태려는 "나". 돈 문제로 오해가 생겼다. "나"는 돈을 훔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다 "나"를 의심한다. 심지어 선생이란 사람들까지 공개적으로 "나"를 의심한다. 그리고 "나"는 따돌림을 당한다. 정말 콱 죽어버리고 싶다. (제6화 고학생 문창숙 집단 따돌림 자살 사건)
신학문을 배우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인 "나". 하지만 사회는 신여성을 향해 눈을 흘긴다. 집안에선 결혼을 하라고 성화다. 연애라도 실컷 해보자. 주변에 괜찮다 싶은 남자들은 이미 아내가 있다. 조혼의 폐습이 아직도 이어져 온다. 눈을 돌려보니 가까이엔 학창시절을 함께 한 "동성"의 친구들이 눈에 들어온다. 동성의 친구에게 연애감정을 느낀 "나". 숨길 것도 없다. 오히려 학생들 사이에서 동성애는 유행처럼 번져나간다.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 이른 결혼으로 힘들어 하는 친구,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다보니 세상이 싫다. 정말 콱 죽어버리고 싶은 거다.(제7화 홍옥임*김용주 동성애 정사 사건)
동성연애도 실컷 해 보았다. 이성에 관심이 간다. 빠져들듯 사랑한 그 역시 열렬히 "나"를 사랑한다. 사랑을 다짐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남자 이미 유부남이다. "나"를 속였던 거다. 그의 본처가 그에게서 떠나라고 협박한다. 이런저런 핑계로 그 역시 나를 피하는 눈치다. 억울하다. 그에게 속은 것이 억울하고, "나"를 보는 주변의 차가운 눈빛들도 억울하다. 이럴 때 정말 "콱" 죽어버리고 싶은 거다. (제4화 박금례 순정애사)
결혼이란 걸 했다. 하라는 강요에 한 결혼이지만 이 남자, 의외로 마음이 맞다. 행복하다. 하지만 시댁에서는 신여성인 "나"를 곱잖은 눈으로 바라본다. 사사건건 트집이다. "한 남자를 사랑한 두 여인"(p62) 구시대적인 사고를 가지고 며느리를 구속하고 구박하는 시어머니와 시댁식구들에게 신여성인 "내"가 예뻐보일리 없다. 하지만 남편 때문에 "참는다." 하지만 그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서 힘들어 하던 남편은 병을 얻어 요절하고 만다. 남편이 죽고도 이어지는 시댁식구들의 횡포에 힘들다. 이럴 때 정말 콱 죽어버리고 싶다.(제2화 청상과부 신여성 윤영애 자살사건)
너무 도식적으로 이야기한 걸까..?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데 말이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들의 사연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데 말이다. 이유없는 죽음이 어디 있겠냐만은 이 책에 실린 그들의 "자살"은 사실 자살이 아니다. 시대상황, 주변환경이 그들을 "자살"하게끔 만들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하지만 글쓴이의 말처럼 "아름다운 자살은 없다."(p294) 그리고 "그래도 자살은 아니다."(p300) 자살하지 말지어다. 뭐 급히 갈 것 있나?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들 마음껏 누리고 그 시간이 다하면 가면 되는 거지.. 식민지 하의 역사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낸 저자에게 고마움의 말을 전하며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