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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
박안식 지음 / 예담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다 읽고 나서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국사시간에 멋모르고 무작정 외우기만 했던 예송논쟁의 원인(遠因)에 그가 있었다. 그리고 살아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면, 조선후기 개혁군주라 칭송되는 정조보다 백여년 앞서, 조선을 확 뜯어고칠 수 있었던 인물이 바로 소현세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 소현세자의 이름은 생소했다. 핑계인지 모르겠지만, 국사시간에 비중있게 다루어졌던 인물이 아니었던 듯 하다. 내가 소현세자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된 것은 역사학자 이덕일의 글을 통해서였다. 이덕일의 책을 통해 소현세자에 대해 알고 나서, 그의 삶과 조선후기의 역사에 대해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마침 이 책 뒷표지에는 이덕일의 추천사가 실려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왕조실록]은 물론 [심양장계]등 1차 사료를 바탕으로 꼼꼼히 재현해낸 그 시대의 모습은 현재 고증 소홀 문제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역사드라마나 소설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라는 역사학자의 말 때문에라도, 제대로 된 역사소설 한 편을 읽을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감이 든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는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시작하여, 인질로서 청에서 생활했던 9년 동안의 일,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온지 불과 몇 개월만에 맞은 의문의 죽음과 세자빈 강씨의 죽음을 통해 본 소현세자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 역사학자 이덕일의 말마따나, 충실한 역사고증을 통해 씌여진 글이라 그런지 한편의 역사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중간중간 병자호란 전후의 사회상에 대한 사실적인 언급이 많아 역사공부에도 도움이 됐기 때문에 내가 잘 몰랐던 몇몇 부분들에는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그러면서도 소설적인 재미를 잃지않는 서술이 참 좋았다. 하긴, 소현세자의 삶 그 자체가 한 편의 소설로서 손색이 없는 극적인 삶이었던 데다가,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신문기자를 역임한 작가가 노년에 쓴 글이라 그런지 담백함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 모두를 잡을 수 있게 된 작품인 듯 하다. 그리고 그 문장에 대해 감히 평가해보자면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기에 참 좋은 글이었다.
남한산성에서의 농성전과 강화도의 함락, 삼전도에서의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은 치욕스러웠다. 역사에 대해 어설픈 지식밖에 없는 나는 인조반정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 폐모살제나 명에 대한 재조지은을 잊었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내쫓은 반정정권에 대해 수긍이 되지 않는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시시각각 변해가는 외교무대에서 실리를 추구하고자 했던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그렇게 비난받을 일이었을까..? 폐위된 군주라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인지, 나는 한동안 광해군의 "광"자를 미칠 "狂"자로 쓰는 줄 알았었다.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읽으면서, 광해군에 대해 이제라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해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시작부터 잘못된, 숭명대의崇明大義라는 쓸데없는 명분에 사로잡혀 있던 반정정권의 눈에 소현세자가 곱게 보였을 리 없다. 거기에 여자(인조의 후궁 조씨)의 무서운 시기심과 천한 신분에서 기인하는 열등감으로 비틀린 보복의식을 가진 사내(역관 정명수 같은 ; 중국과 우리가 껄끄러운 관계에 있을 때마다 종종 보이는 밉상스런 인물들이 있다. 우리 땅에서 태어난 천한 출신의 인물이 중국에 끌려가거나, 팔려 간 인물들의 중국에서 의외의 신분 상승을 한 인물들 말이다. 원 간섭기의 기황후를 등에 업은 기철 일당이나 환관 박불화가 그랬던 것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정명수라는 역관은 조선의 노비출신이었으나 중국에서 역관이 되었고,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세자를 감시하거나 핍박하고, 조선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의 힘이 결합되어 버리면, 일은 엉뚱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청에 인질로 잡혀갔지만, 외교통로의 역할을 하며 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세자를 바라보는 못마땅한 시선들은 부왕인 인조에게서 부정父情을 앗아가버렸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던가.. ?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정적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인조 또한 괴로웠을까..?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조선은 서양과 우호적인 관계에서 접촉할 기회를 놓쳐버렸고, 역사의 흐름에서 뒤쳐졌던 것은 아닐까..?
흔히들 역사에는 "만약"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건 잘못 흘러간 물줄기를 바라보는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만약"이라는 말을 자주 되뇌였다. "만약"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만약" 소현세자가 청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더라면.. "만약" 인조가 조금만 더 진실을 바라볼 수 있었더라면.. "만약" 소현세자가 그렇게 죽지 않았더라면.. "만약" 소현세자의 아들 석철이 임금의 자리에 올랐더라면...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괜찮았던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