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

평가와 자존심 사이에서

 

다구치 요시오(40대)는 중견 식품회사의 영업팀에서 일한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지금 직장에 입사해 19년간 일했다. 입사 후에는 조금씩이지만 월급도 올랐는데 리먼 사태 이후 회사의 실적 악화로 인건비가 삭감되고 신입사원 채용이 보류되면서 계약직이 증가했다. 다구치는 자사의 제품을 좋아했지만 위기감을 느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했고 중견 간부로 승진할 시기라서 지금이 승부처라는 생각도 있어요.” 그는 결혼해 세 살짜리 아이가 있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자부심 때문에 무리하며 빡빡한 스케줄의 출장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의 업무평가는 입사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ABC 세 단계 중 대부분 B로 평가받았다. 이전까지는 평가가 마음에 영향을 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인건비 삭감 방침이 적용되면서 상사와의 면담과 보고서 제출, 자기평가 빈도가 늘기 시작했다. 1년 6개월 전부터는 6개월에 한 번 꼴로 새로운 시스템으로 업무평가도 했다. 민주당에서 자민당으로 일본의 정권이 바뀌면서 경기 호전이 예측되는 가운데 그의 회사는 엔화(円貨) 가치 하락으로 수입 원자재 가격이 크게 상승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뛰었던 다구치는 평가에서 C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새로운 평가 제도는 S, A, B, C, D의 다섯 단계로 되어 있는데 S는 뛰어나다, 모범이 된다, A는 아쉽다, 기대 이상이다, B는 기대 수준이다, C는 조금 부족하다, 기대치에 못 미친다, D는 기대를 크게 밑돈다는 평가였다. 다구치는 자신은 A이거나 못 받아도 B일 거라 예상했던 만큼 기대 이하라는 평가에 어이가 없었다. C를 받은 이유를 상사에게 물었더니 “출장도 다니고 열심히 일한 줄 알지만 움직인 것에 비해 실적이 모자라다. 보고 상황도 그렇고, 영업처의 피드백 분석도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실망하긴 했지만 그는 스스로 회복이 빠르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6개월간 영업처의 의견을 모아 정리하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영업 실적을 생각해 열심히 뛰었고 결과도 좋았다. 이번에는 A일 거라 믿었는데 결과는 똑같이 C였다.

 

“정말 머릿속이 하얘지고 목 저 밑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오르더니 온몸의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았어요.”

다구치는 냉철함을 가장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상사에게 이유를 물었다. 상사는 “영업 실적도 좋고, 분석도 잘했지만 동료와의 관계나 계약직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조금……”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 순간, 안 되겠다 싶었죠. 아무리 노력해도 뭔가 이유를 붙여 끌어내리니까. 그전까지는 동료와의 관계 같은 말은 한마디도 안 했거든요.”

C 평가를 근거로 연말 보너스도 전년과 동일하게 지급됐다. 그는 일할 의욕을 잃었다. 아내에게 회사가 어려워 전 직원 보너스 동결이라 말했지만 속으로는 상실감이 컸다.

 

“열심히 일한 내가 바보 같고 모든 상황이 어이없어 서글펐어요.”

 

다구치는 그 무렵부터 아침에 일어나는 게 부쩍 힘들었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새벽 4시면 거짓말처럼 잠에서 깼다. 주말이면 더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자도 개운치 않고 아침부터 피곤했다. 이전에는 주말이면 가족과 나들이도 가고 아내와 일주일치 장도 봤는데 이제는 몸이 무거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도 월요일이 되면 마음을 다잡고 무리를 하면서 출근했다. 그렇게 6개월을 버텼다. 동료 중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있어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억지로 웃어 보이고 밝은 척 행동했다. 그 때문에 주위에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실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업무에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일의 진행이 늦어졌고 적당히 하다보니 평가 점수가 떨어졌다. 다구치는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다.

 

그때 상사가 혼잣말처럼 흘린 “무능하다”는 한마디가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강한 말투도 아니고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한 말도 아니었다. 상사가 허공을 향해 내뱉은 혼잣말이었다. 그날 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확인하는데 직장의 연간 보너스 순위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제약회사인 오츠카제약이 370만 엔으로 1위였다. 충격이 컸다. 대학 동기가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다구치는 억울함과 비참함과 한심함으로 마음속이 요동쳤다. 그런 기분을 가족들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약한 자신이 남자로서 패배자로 느껴졌다. 울고 싶었지만 목이 메었다. 모두 끝났다고 생각한 그는 다음 날 병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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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6-10-26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일한 내가 바보 같고 모든 상황이 어이없어 서글펐어요.”에서 공감하며 울컥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