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 범우희곡선 1
아더 밀러 지음, 오화섭 옮김 / 범우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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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더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었다. 작품은 작가로부터의 잉태되어 나오는 것이기에 작품과 작가를 분리시켜 이해할 수 없다. 때문에 이 현대적 비극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세계관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런 점에서 아더 밀러는 ‘비극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비극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 바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극은 행복을 찾고자 몸부림치는 인간을 가장 정확하고 조화 있게 묘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은 비극을 최고로 존중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까닭에 다른 문학 양식과 혼동해서 비극을 감소시켜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누구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또 우리가 마땅히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고, 또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을 제시해 주는 가장 완전한 수단이 되게 때문이다.” 이런 작가의 세계관, 혹은 작품관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세일즈맨의 죽음’을 읽는다는 건 그가 추구한 비극의 고상한 기능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감상적인 슬픔에 빠져버리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세일즈맨의 죽음’은 단순한 리얼리티 문학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것이 작가의 표현방식일 수는 있으나 그가 단지 사실성에만 집중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고뇌하면서 이 절망적인 슬픔의 정서 너머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도대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내가 그 답을 정확히 발견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가 추구한 비극의 순기능을 고려할 때 그 메시지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윌리 로먼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현대인의 표상은 그가 처한 사회적 환경의 사실성 자체가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찍부터 성공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져 그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세일즈맨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수단은 그가 생각한 대로 성공의 첩경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그 속에서 장구한 일생을 성공이라는 신기루를 좇을 뿐 실상 단 한번도 그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실패의 쓴물만을 들이켰을 뿐이다. 그는 오늘날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후기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인 현실에 대한 적응력을 갖추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의 허황된 꿈에만 매달린 인물로 자신을 고착시켜 나갔을 뿐이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로 가정에서도 소외되는 불운한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도덕적 결함으로 인해 두 아들들에게도 가장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사람의 일생이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일 뿐이다. 윌리 로먼은 그렇게 죽지 못해 사는 삶을 고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점차로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로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기울어진다. 가장 숭고해야 할 인간의 죽음마저도 수단적 가치로 적락되어 버리는 것을 그를 통해 보게 된다. 그러나 어쩌면 삶 속에 어떠한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에게 인생은 죽음보다 못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윌리 로먼, 세일즈맨의 죽음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는 살면서 죽음을 생각했고, 죽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처럼 살았던 것이다.

작가가 보여주고 있는 작중 인물의 삶과 죽음은 그 자체가 덤덤한 슬픔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작가는 이런 소시민의 한 사람, 내가 될 수 있고 내 주변 가까운 이웃일 수 있는 세일즈맨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중요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그런 과정 속에 베어 있는 여러 인물들과의 갈등을 매우 세심하게 그려감으로써 실로 비극다운 비극을 연출해 내었다. 그 비극적 요소가 바로 윌리 로먼이라는 사실적인 가공인물을 통해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된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인물은 그런 점에서 도로의 표시판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는 여행자가 목적지를 향해 갈 때 보게 되는 길가의 표시판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길에서 어디로 가면 되고, 어디로 가면 안 되는가를 자신이 만들어낸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비극의 우물에서 퍼 올린 희망의 메시지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존엄한 존재이기에 어떤 사회에서도 소외당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사회라는 구조 속에 결코 소외되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존엄성이 아무런 저항 없이 소외되고 있는 현 사회의 현실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을 일깨우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세일즈맨과 같은 소시민들은 갇혀 있는 상태에서도 자유를 갈구하지 못한다. 이것이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닌가! 

숭고한 인간 영혼이 필요로 하는 건 사회에서의 성공, 대단한 부와 명예 등이 아니란 사실이다. 작품의 종반부에 이르러 윌리 로먼의 닫힌 마음이 어느 순간 열리게 되는데 그의 문을 여는 열쇠는 다름 아닌 큰 아들 비프의 순결한 눈물이었다. 아들로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 눈물에 얼음처럼 차가왔던 윌리 로먼의 마음은 녹아져 내린다. 이것이 작가가 말하는 인간의 근원적 필요가 아닐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가 소유한 어떤 소유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의 존재 그 자체로서 임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비극은 하나의 역설이다. 세일즈맨의 죽음의 비극은 그를 통해 희망을 말하는 작가의 외침이 담겨 있다. 그 죽음의 반대쪽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희망에 대한 외침이 말이다. 비인간다운 죽음을 통해 우리는 인간다운 죽음을 알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역설을 발견했다. 그래서 슬픈 곡조에 담겨 있는 희망찬 인간의 삶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죽음, 인간의 죽음의 그가 누구이든지 숭고한 것이다. 때문에 그 누구의 죽음이든 그 죽음이 내포하고 있는 역설적 희망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것이 산 자의 책임일 것이다. 나는 그 책임을 다하고 싶다. 세일즈맨의 죽음 속에서 참된 삶을 찾고 싶다. 이것이 이 책을 덮으며 내 마음의 말하는 소리이며, 앞으로 내 삶을 통해 부르고 싶은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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