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Fithele > 이런 것이야말로 10년전의 '엽기'라는 단어의 정의였다

재간되는 동서 미스터리에서 가장 값진 요소들이 바로 란포, 세이초, 세이이치 같은 일본 작가들의 집중적인 소개일 것이다. 일어 중역이라는 더께를 벗어던진 국어 번역본들은 격조가 높다고는 할 수 없어도 보다 적나라하고 폐부를 파고드는 듯한 이웃나라 스타일을 거진 여과없이 보여주는 편인데, 그런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 바로 에도가와 란포의 저작들이다. 그의 작품을 만일 영어나 중국어로 옮겼다가 국어로 번역했다면 절대로 필이 오지 않을 것이니까.

한마디로, 대단하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단어의 뜻이 좋다/나쁘다로 심각하게 갈리겠지만.

[음울한 짐승] 감상에서 잠시 언급했던 스타일, 즉 수수께끼의 명탐정, 암호, 밀실 살인과 같은 제대로 된 본격물을 추구하면서도 엽기적인 상태나 심리적 아이디어를 도입하여 찝찝한 느낌을 주는 스타일이 이 장편에서는 거의 절정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엽기라는 표현을 아무 데나 쓰지만, 이런 것이 10년 전의 '엽기'라는 단어의 정의였다. 그런 점에서 교고쿠도와 같은 류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호러의 범주에 넣는 것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적어도 본인은 읽어가면서 무슨 한편의 지옥도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입부부터가 심상치 않다. 하루 사이에 머리칼이 모두 하얗게 센 남자가 자기의 기막힌 사연을 풀어놓는 형식이다. 애인이 밀실에서 칼에 찔리고, 조사를 부탁한 명탐정도 백주 대낮에 쥐도새도 모르게 찔려 죽는다. 이 모든 것들이 아리송하다기보다는 한여름에 듣는 기담처럼 그려진다. 특히 중간에 나오는 쌍동이의 수기(手記)에 이르면, 대체 이 막나가는 얘기가 어떻게 맺어질 것인지 정말로 궁금해지게 된다. 이 부분은 너무나 잔인하고 끔찍해서 리뷰를 쓰기 위해 떠올린 이미지만으로도 몸에 한기가 듣는다. 트릭을 제시하고 설명한다든가 하는 전통적인 스토리텔링 자체는 좀 고풍스럽고 빈약한 듯한, 그리고 마지막에 서로가 연관지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깨지 못한 지나친 우연성이 있지만,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엽기적 소재랑 이미지를 적절하게 깔아 전개를 흥미롭게 한 기술은 정말 훌륭하다.

또한 보기 드물게도 동성을 사랑하는 탐정이 등장한다. 탐정과 그의 동반자(sidekick) 사이에 기묘한 우정이 존재하도록 그리는 작가는 많지만, 성 관념이 좀더 엄격하던 시대의 소설임을 감안할 때 이렇게 대놓고 로맨티시즘을 부여한 것은 파격적. 전반부의 두 남녀의 처절한 애정에 대한 묘사도 대단했지만, 후반의 절망적 상황에서 인물들의 관계가 이런 식으로 다시 조명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안타까움을 더해 주었다. 이런 전통(?)이 있으니, 일본 야오이 만화 중에 왜 그렇게 추리물이 많은 건지 이해가 갈 것 같기도.

소위 '기묘한 맛'을 추구하는 추리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게 단숨에 읽을 수 있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한숨을 쉬며 도리질을 칠 정도의 끔찍한 얘기였다. 아마도 [음울한 짐승]을 읽었거나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권말의 자세하고도 애정 담긴 해설을 비교해 가면서 더욱 재미있는 인상을 머리에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한가지 옥의 티가 있다면 해설에서는 같은 단편 제목을 [음수(陰獸)]로 표기한 것. 같은 출판산데 이정도의 일관성은 지켜줘야 더 많이 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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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기묘한 컬트적 소설...

이 작품이 덜 추리 소설적인데도 에도가와 람보의 <음울한 짐승>보다 더 좋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작가가 이런 분위기를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가 가장 하고 싶은 소재를 사용해서 마음껏 만든 작품인데 안 좋을 리가 없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에도가와 람보는 추리적인 작품을 쓰는 것보다는 상상의 나래를 펼 색다른 작품을 쓰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걸리버 여행기>를 쓰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침과 동시에 어떤 상징과 사상, 메시지를 넣은 것과 같이 말이다.

약혼녀의 기이한 밀실에서의 살해로 인해 주인공은 모험을 하게 된다. 그 모험한 청년을 한 사나이, 백발의 사나이로 만들 정도로 음침한 것이었다. 그래서 난 자꾸만 이 작품의 제목과 <음울한 짐승>을 혼동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살인자도 <음울한 짐승>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처음 두 살인 사건에서의 밀실 트릭과 광장 트릭을 빼면 중반 이후 이 작품은 추리 소설에서 보물을 찾기 위한 모험 소설로 모험 소설에서 기묘한 컬트적 소설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병든 사람의 문제는 신체적 병이 아니다. 요즘 연쇄 살인범이 잡혀 사회가 시끄럽다. 그는 자신의 병과 가난을 비관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는 마음이 병든 사람이다. 몸이 병든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자는 치유되기 어렵다.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것이 병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으며, 연쇄 살인범을 보며 사회가 신체적 부자유스러운 자들에게 마녀 사냥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감이 들었다.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생각도 그렇고. 그런 사람도 마음이 병이 든 것임을 깨닫기 바란다. 마음의 병은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것이다. 신체적 병과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자만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삼았으면 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 나라에 에도가와 람보 전집이 출판되지 않나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내 바람은 언제나 바람으로 끝날 뿐이지만 그래도 바람이라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로도 만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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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주의자의 꿈 - 어느 헌책수집가의 세상 건너는 법
조희봉 지음 / 함께읽는책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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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말한다. 솔직히 말해서 싼 값에 헌책을 선호하기도 한다고. 전 주인들의 손때와 추억들을 나도 한번 느껴보자는 다소 로맨틱한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싼맛에 헌책을 선호하는건 당연한거 아닐까? 하지만 살때의 의도가 어땠든 자기만의 커리큘럼에 따라 책세상을 만들어 결국은 모든 책을 내 속에 흡수시킨다면 천한 의도쯤이야 혀나 한번 차 주고 넘어가도 좋지 않을까한다.

나도 나름대로 헌책수집가다. 그러나 일관성있는 커리큘럼따위는 없다. 그냥 맘내키는 대로, 발이 이끄는 대로 오랜 책 향기에 쉽게 유혹당해서 충동구매를 일삼는다. 눈을 부릅뜨고 한 곳의 헌책방을 대여섯번 빙글빙글 돌고나서야 정말 필요한 책을 찾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극히 드물다. 저자의 헌책 고르는 방법을 보고 있으려니 솔직히 부끄럽다. 속물마냥 책장에 책을 쌓아 남한테 보여주고 싶은 욕구에 골몰한 것 같다.

이 책의 반은 작가의 전작주의의 의미론과 방법론 따위를 전해주고, 나머지 반은 헌책의 이야기만 주구장창 늘어놓는다. 난 후자가 맘에 든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많다는 걸 다시 한번 통감한다. 열독가에게 존경을 바치는 대단한 수집가인 저자에게 초보 수집가가 그야말로 가슴에서 우러나온 온전한 존경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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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서 다행이야
박사, 이명석 지음, 경연미 그림 / 시지락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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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 이 책의 제목을 '고양이라서 미안해'라고 생각했었다. 이유는 왠지 모르겠지만, 고양이보다는 강아지를 나름대로 편애하고 있는 내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발생한 현상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고양이라서 미안해...라니.. 책을 끝내기 전까지도 이러한 생각이 고쳐지질 않더니 마지막 고양이 소개까지 보고 책을 덮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책의 제목을 제대로 의식할 수 있게 되었다. 별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드디어 나도 고양이를 어느 정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도무지 친근감이라고는 가지 않는 날카로운 외모에서부터(아니라고 분명히 투덜대시는 분 계실테지만...) 안고 있기만 하면 군데군데 생겨나는 작은 발톱의 흔적들, 어슬렁거리기, 주종관계 탈피? 아니, 주종관계 확실, 당연히 주인은 고양이. 아무리 눈동자를 굴려서 이리저리 훑어봐도 눈물나게 고맙고 따뜻하게 보이는 건 하나도 없는 고양이들. 그래도 박사님과 이명석님의 글 속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들은 그 눈꼴시려움 속에서도 사랑을 자아내게 만드는 존재들이다. 다를 거 하나 없지만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건 당연히 좋아보이니까. 이 참에 고양이랑 친해져 보는 것도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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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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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의 어린 남자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치곤 참 유쾌하다는게 내가 이 책을 읽고 처음으로 느낀 점이었다. 가슴 아련한 사랑 이야기도, 눈물 핑돌게 만드는 감동의 이야기도, 배꼽 잡게 하는 코믹한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여민이가 전해주는 담백한 이야기들에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을 느꼈다. 늘 생각해오던 일인데, 가끔씩 땀 뻘뻘 흘리며 한계단 한계단 올라 겨우 다다른 곳에 초라하게 서 있는 산동네의 집에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을 해본다. 정말 나도 산꼭대기에 살며 숲속대장도 한번 해보고 싶다. 하지만 아홉살 어린 아이의 그 동심으로, 그 눈으로 세상을 마주할 수 없다는게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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