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방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평점 :
작년 여름부터 줄곧 생각해오던 문제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을뿐더러 가족들도, 친구들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더 막막했다. 무작정 뛰어들자니 내 성격상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시작조차 못 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제대로 못 할 바엔 다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어 매우 괴로운 시기였다. 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야 하는데 생각보다 그 흐름은 더뎠고 최근엔 개-빡치는 일이 생겨 한동안 표정이 썩은 나에게 엄마는 드디어 네가 인생을 배우고 있는 거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주를 보러 갔다. 나는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아야 했다. 사주 아저씨가 나에게 강조한 건 소속에 관한 이야기였다. ‘-씨는 소속이 제일 중요해요. 정원수 같은 사람이라고 아까 말했죠? 어떤 사람은 –씨를 화초라고도 표현할 거고, 꽃이라고도 표현할 거예요. 그런데 공통점은 어느 한 공간 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 공간 안에서 –씨는 스스로를 잘 가꿀 거예요. 그런데 잘 가꾸려면 그 공간 속에서 소속되어 잘 어울려야 한다는 거죠. 나이가 들수록 소속은 바뀌는데 바뀐 소속에서 안 놀고 예전 소속에서 계속 놀면 안 좋다고요. 학생이면 당장은 대학교라는 소속에 융화되어야지 동떨어진 채로 지내면 안 되는 거예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작년, 재작년이 어둠 같았을 거라고 표현하셨다. 이쯤되니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가 아저씨께 낱낱이 고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박트루먼 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따위의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건 아닌지.
세계에 소속되어 살아야 한다. 세계 규칙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 미친 세상이 화나게 하는데 어떻게 사느냐 말이다. 아무리 카뮈의 부조리를 이해하고 따르고 싶어도 시작도 전에 멈추게 된다. 『이방인』을 작년 늦여름에 읽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느 한 지점에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 카뮈의 부조리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을 넘어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뫼르소로 예를 들자면 나는 사형당하기 직전 작은 깨달음을 얻은 상태의 직전의 뫼르소였다. 그러니까 무신론까지는 도달했는데, 왜 세상을 열심히 반항하며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뫼르소의 경우, 발밑에 세상을 제대로 딛고 살지 않다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살아갈 의지를 되찾는다. 그제야 자신의 어머니가 죽기 전 약혼자를 만들고 새 삶을 꾸려나가려 했던 그 모습을 이해한다. 부조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 어머니가 죽었지만 세상은 돌아가고, 태양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고, 재판은 살인이 아닌 어머니의 죽음이 문제로, 죽기 직전 살고자 한 것 등, 세상은 뫼르소에게 부조리하게 돌아간다. 한 번쯤은 그 부조리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일 법 하지만 뫼르소는 꿋꿋이 모든 것에 진솔하게 대한다.
그런데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책의 마지막 부분, 뫼르소가 삶을 다시 한번 살아보고픈 희망을 갖는 장면이다. 모든 것이 충족되었고 그동안 행복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일에 구경꾼들이 자신을 보러 오더라도 괜찮은 건데, 왜 삶을 다시 꾸려보고 싶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삶”은 부조리한 세계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 부분에 대해 찾아보면 사람들마다 미묘하게 말이 다르다. 대개는 카뮈의 부조리를 언급하며 넘어가고, 혹은 얼렁뚱땅 책의 첫 문장이나 '이방인이기 때문이다...'을 적어놓거나, 아니면 책과 사회 문제를 결부시키면서 넘어간다. 내가 알고 싶은 건 이게 아닌데... 그러다가도 다시 생각해 보면 이건 카뮈가 자살에서 반항으로 넘어간 그 순간을 아직 내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깨닫고 홀가분해지기도 한다. 이 부분은 개강 후에 알아보기로 하고...
정리하자면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 삶을 진솔하게 살되 세계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 삶, 그리고 내 삶을 에워싸는 세계. 뫼르소를 에워싼 세계는 이성을 가장한 비합리한 세계였다.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죽어 마땅한 인간으로 매도하며 재판은 본질에 벗어난 지 오래, 그리고 피고에게 신을 믿기를 강요하는 인간들... 2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뫼르소 특유의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본다. 미친 세상, 미친 인간들, 그리고 미쳤다고 매도당하는 뫼르소. 미친 인간들의 세계는 추상적이다. 그러나 뫼르소의 세계는 추상적이지 않다. 뫼르소는 세계에 놓여진 것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 가만히 앉아 바다를 보고 태양을 쬐며 흩날리는 바람을 느낀다. 그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본래 뫼르소가 느낀 세상은 미친 인간들의 세계였지만 죽기 직전에 그는 자신을 품고 있었던 것은 무관심한 세계라는 것을 느끼고 처음으로 그 세계를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삶은 부조리하기 때문에.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부조리하다? 부조리하기 때문에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무렴 상관없다. 부조리해도 내 뜻대로 흘러가면 그것이 곧 내 세계이고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 부조리하다면 그 또한 내 세계이다. 뫼르소가 무관심한 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나는 내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 카뮈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말한다. 같은 세계지만 인간과 고양이의 세상은 다르다. 『반항하는 인간』에서 카뮈는 "모든 사고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인간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언어로 세계를 낙인찍는 것일 뿐 이해했다고 해서 온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차라리 한 마리의 고양이었다면 이 세계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삶의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사주 아저씨는 나에게 어린친구가 벌써부터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한다고,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작은 위로를 주셨다. 인생의 황혼을 상상하고 삶을 규정하려는 것을 멈춰야 한다. 또다시 이 미친 세상과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나는 곧 무관심한 세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카뮈가 사주에 대해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멍청한 짓이라고 일갈했을까? 아마도 이번만큼은 non이 아니라 oui일 듯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