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동물학교 1~3 세트 - 전3권 - 완결
엘렌 심 지음 / 북폴리오 / 2018년 11월
평점 :
품절


약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카뮈에게 집착했지만 이제는 보내줄 때가 됐다물론 아직도 그 글을 읽으면 심장이 뛰지만 그 끝엔 결코 내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카뮈는 죽음 너머를 규정하지 않았다우리가 할 수 있는 화합과 사랑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부터 되자고 하며 세계를 진솔하게 대함으로써 연대를 중시하는 대신 죽음에 대한 공포(혹은 질문)로부터 회피했다그런데 세계를 진솔하게 대하는 자세부터가 쉽지 않다나의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죽음이라는 것에 가장 큰 문제점은 헤어짐에 있다내가 죽든너가 죽든 어느 한 명이 죽으면 절대로 만날 수가 없다나는 언젠가 나와 영원히 끊어질 사람들을 때때로 생각한다그러다가 정말 이대로 끝인가하는 불안이 엄습한다어떤 교수는 사람이 죽어 우리 곁에서 원자의 형태로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해야 편하다고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반려동물은 더욱 그렇다. 아무리 길게 살아도 사람의 수명에 비견될만큼 길게 살지는 못한다. 나는 많은 걸 미리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언젠가 그 귀엽고 따뜻한 아이들이 나보다 먼저 가는 걸 생각하면 처음부터 마음 주지 말자는 생각이 점점 거대해진다. 아픔을 겪고 나면 성숙해진다는데 나는 그럴 것 같지 않다. 마음 한구석에 한 아이를 담고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감당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는 그 부분을 담아낸다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학습하는 AH27반의 동물들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나간다애기들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그 사이에 보이는 주인들의 시선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나를 대입해보게 된다사람이 죽으면 반려동물이 그들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지만 이 책에선 그렇지 않다인간이 될 준비가 되면 환생을 하러 간다운이 좋으면 주인을 만날 수 있지만 대체로 그렇지 않다아이들은 꼬리가 사라지면 인간이 될 자격이 주어진다그 말은 즉슨 이전에 있던 미련들을 털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주인을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머루가 앞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머루의 주인이 머루가 남긴 그림을 보고 머루의 영원한 행복을 빌어주며 환생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는 것처럼.

 

차라리 환생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부처도 예수도 내 마음을 흔들지는 못했다재미없는 교리들뿐이다. 열반에 이르러라? 하나님 믿고 천국가세요? 열반에 이르기엔 내가 가진 사랑이 많고 하나님을 믿기에는 내 믿음이 나약하다. 

나의 두려움을 내려놓는 것부터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여전히 아득바득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 집착한다우리의 기억만이 관계를 지탱한다. 내가 사랑하는 책과 영화, 아침에 산책하러 나가면 나를 반기는 어떤 고양이내 친구의 소중하고 귀여운 강아지나의 락스타와 그의 6만원짜리 반팔.... 나열하고 보니까 정말 아무것도 아니네그럼에도 그것들과 아무 미련 없이 헤어질 수 없는 내가 정말 어이가 없다. 다같이 순장 한번 하면 좀 마음이 편할까? 다들 어떻게 성숙해졌나요? 어떻게 그 수많은 작별인사와 이별을 견뎌내는 거지? 

 

작가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모두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우리의 귀여운 AH27반이 이겨낸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위안이 되었다면 그건 그대들이 성숙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나는 아직도 미련한 중생이라 부처도예수도카뮈의 그 어떤 글도 내 마음 깊숙이 들어오지 못했다언젠가어쩌면 오늘 당장 나도 누군가와 작별을 하겠지만.. 하.....일단 빡큐 삼창하고 생각해야겠다.

이러한 두려움을 모두 물리치고 내가 작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날이 온다면 그땐 정말 성숙한 어른이 되어있겠지. 언젠가 나도 이 책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적지와 왕국 알베르 카뮈 전집 8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다섯 번째 단편 <요나 혹은 작업 중의 예술가>

최초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전적 성격이 강한 내용이다. 


요나의 예술적 재능에 이끌린 이들이 입맛대로 그의 실력을 재단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에게 둘러싸여 요나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추앙에 이끌려 남들이 좋아하는 예술적 결과를 보여주게 된다. 명성이 높아지며 자연스럽게 정치에도 이름을 올려야 할 때가 오고 타의적으로 도덕적 신념을 내세우게 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요나의 근간이었던 가족과 친구들, 즉 사랑은 어느 순간 뒤로하게 된다. 자신의 사회적 명성이 진 어느 날 요나는 다시 자기의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한다. 홀로 다락방에 앉아 공허 속에서 자신의 예술을 되찾아가려 한다. 남들과 떨어져 다락방에 있던 그는 그의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듣는다. 잊고 있던 젊은 날의 아내의 웃음, 그의 자식들의 생명력 가득한 목소리들.. 그리고 바깥 세계의 일상적인 소음까지 완전히 듣게 된다. 요나는 이를 "싱싱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바깥의 세계에도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알고 있던 카뮈의 세계관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허 속에서 벗어나 참다운 나를 알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아직 내가 카뮈의 이름으로 나온 작품들을 읽지 않아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반항 다음은 사랑에 대한 내용을 계획하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곤 있었다. 바로 그 사랑에 대한 부분이 요나의 끝부분에 간접적으로 나온 것 같다. 


요나의 마지막 부분은 요나가 과로로 인해 잠시 요양을 하게 된 장면이 나온다. 그러면서 요나가 캔버스에 그린 것이 나오는데, 그가 그린 것은 그림이라기보다는 어떠한 단어를 적은 것에 불과했다. Solitaire, 혹은 Solidaire이라 쓰여있는 단어였다. 카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Solidaire이었을까.


카뮈는 반항 이야기를 끝내고 사랑으로 넘어가려던 찰나에 죽음을 맞이했다. 어쩌면 요나가 카뮈가 쓰려던 사랑 이야기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일 수도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최초의 인간이 미완성 작품으로 남았다는 사실이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 여름부터 줄곧 생각해오던 문제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물어볼 사람도 없을뿐더러 가족들도친구들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더 막막했다무작정 뛰어들자니 내 성격상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시작조차 못 하는 사람이기도 했고 제대로 못 할 바엔 다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어 매우 괴로운 시기였다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야 하는데 생각보다 그 흐름은 더뎠고 최근엔 개-빡치는 일이 생겨 한동안 표정이 썩은 나에게 엄마는 드디어 네가 인생을 배우고 있는 거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주를 보러 갔다나는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아야 했다사주 아저씨가 나에게 강조한 건 소속에 관한 이야기였다. ‘-씨는 소속이 제일 중요해요정원수 같은 사람이라고 아까 말했죠어떤 사람은 씨를 화초라고도 표현할 거고꽃이라고도 표현할 거예요그런데 공통점은 어느 한 공간 안에 있다는 거예요그 공간 안에서 씨는 스스로를 잘 가꿀 거예요그런데 잘 가꾸려면 그 공간 속에서 소속되어 잘 어울려야 한다는 거죠나이가 들수록 소속은 바뀌는데 바뀐 소속에서 안 놀고 예전 소속에서 계속 놀면 안 좋다고요학생이면 당장은 대학교라는 소속에 융화되어야지 동떨어진 채로 지내면 안 되는 거예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작년재작년이 어둠 같았을 거라고 표현하셨다이쯤되니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가 아저씨께 낱낱이 고한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박트루먼 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따위의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건 아닌지.

 

 세계에 소속되어 살아야 한다세계 규칙에 따라야 한다그런데 이 미친 세상이 화나게 하는데 어떻게 사느냐 말이다아무리 카뮈의 부조리를 이해하고 따르고 싶어도 시작도 전에 멈추게 된다이방인을 작년 늦여름에 읽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어느 한 지점에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다카뮈의 부조리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을 넘어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사실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뫼르소로 예를 들자면 나는 사형당하기 직전 작은 깨달음을 얻은 상태의 직전의 뫼르소였다그러니까 무신론까지는 도달했는데왜 세상을 열심히 반항하며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다뫼르소의 경우발밑에 세상을 제대로 딛고 살지 않다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살아갈 의지를 되찾는다그제야 자신의 어머니가 죽기 전 약혼자를 만들고 새 삶을 꾸려나가려 했던 그 모습을 이해한다부조리는 끊임없이 반복된다어머니가 죽었지만 세상은 돌아가고태양 때문에 방아쇠를 당겼고재판은 살인이 아닌 어머니의 죽음이 문제로죽기 직전 살고자 한 것 등세상은 뫼르소에게 부조리하게 돌아간다한 번쯤은 그 부조리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일 법 하지만 뫼르소는 꿋꿋이 모든 것에 진솔하게 대한다.

 그런데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책의 마지막 부분뫼르소가 삶을 다시 한번 살아보고픈 희망을 갖는 장면이다모든 것이 충족되었고 그동안 행복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일에 구경꾼들이 자신을 보러 오더라도 괜찮은 건데왜 삶을 다시 꾸려보고 싶다는 것이지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은 부조리한 세계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마지막 부분에 대해 찾아보면 사람들마다 미묘하게 말이 다르다대개는 카뮈의 부조리를 언급하며 넘어가고혹은 얼렁뚱땅 책의 첫 문장이나 '이방인이기 때문이다...'을 적어놓거나아니면 책과 사회 문제를 결부시키면서 넘어간다내가 알고 싶은 건 이게 아닌데... 그러다가도 다시 생각해 보면 이건 카뮈가 자살에서 반항으로 넘어간 그 순간을 아직 내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깨닫고 홀가분해지기도 한다이 부분은 개강 후에 알아보기로 하고...

 정리하자면 카뮈는 뫼르소를 통해 삶을 진솔하게 살되 세계에 순응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내 삶그리고 내 삶을 에워싸는 세계뫼르소를 에워싼 세계는 이성을 가장한 비합리한 세계였다어머니의 죽음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를 죽어 마땅한 인간으로 매도하며 재판은 본질에 벗어난 지 오래그리고 피고에게 신을 믿기를 강요하는 인간들... 2부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뫼르소 특유의 무감각한 눈으로 바라본다미친 세상미친 인간들그리고 미쳤다고 매도당하는 뫼르소미친 인간들의 세계는 추상적이다그러나 뫼르소의 세계는 추상적이지 않다뫼르소는 세계에 놓여진 것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다가만히 앉아 바다를 보고 태양을 쬐며 흩날리는 바람을 느낀다그뿐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본래 뫼르소가 느낀 세상은 미친 인간들의 세계였지만 죽기 직전에 그는 자신을 품고 있었던 것은 무관심한 세계라는 것을 느끼고 처음으로 그 세계를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삶은 부조리하기 때문에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에 부조리하다부조리하기 때문에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아무렴 상관없다부조리해도 내 뜻대로 흘러가면 그것이 곧 내 세계이고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아 부조리하다면 그 또한 내 세계이다뫼르소가 무관심한 세계를 발견한 것처럼 나는 내 세계를 발견해야 한다카뮈는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 말라고 말한다같은 세계지만 인간과 고양이의 세상은 다르다. 반항하는 인간에서 카뮈는 "모든 사고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인간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언어로 세계를 낙인찍는 것일 뿐 이해했다고 해서 온전히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차라리 한 마리의 고양이었다면 이 세계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삶의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사주 아저씨는 나에게 어린친구가 벌써부터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한다고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작은 위로를 주셨다. 인생의 황혼을 상상하고 삶을 규정하려는 것을 멈춰야 한다. 또다시 이 미친 세상과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지만 나는 곧 무관심한 세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카뮈가 사주에 대해 알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멍청한 짓이라고 일갈했을까? 아마도 이번만큼은 non이 아니라 oui일 듯 ^_^



댓글(1)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인장 2023-04-20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해했다.

삶을 다시 꾸려보고 싶은 것은 결국 죽음을 인정하고 등진 자의 삶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임. 자신의 어머니가 죽기 직전임에도 불구하고 약혼자를 만든 것처럼. 죽음을 등졌기 때문에 다시 살아볼 수 있는 거임. 나는 지금 살고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내가 이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까닭은 위에 내가 쓴 것처럼 내가 아직 그 순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함.
 
반항하는 인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반항하는 인간

 

 카뮈는 이 책을 출간한 뒤 오랜 친우였던 사르트르와 결별했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특히 소련에 대한 입장이 달랐는데 이 당시 소련의 집단 포로수용소 소문의 실체가 드러남에 따라 마침내 두 인물의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다. 카뮈는 그 어떤 폭력이라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사르트르는 폭력을 인정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때 폭력이란 진보적 폭력을 말하며, 카뮈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혁명-마르크스주의를 비난한다. (‘진보적 폭력개념을 처음 등장시킨 이는 메를로 퐁티로 그는 진보적 폭력을 옹호했지만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진보적 폭력을 외면하였다.) 당시 프랑스 지식인들에겐 마르크스주의가 유행이었다. 마르크스가 짱이고 신이고 이러쿵 저러쿵. 마르크스주의만이 나치즘에 대항할 수 있으며 그날의 도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뮈는 이러한 희망 섞인 믿음을 비판한다. “그들은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망각하고, 연기처럼 허망한 권력을 위하여 희생자가 된 존재들을 망각하고, 그 무슨 찬란한 도시를 위하여 변두리의 비참을 망각하고, 헛된 약속의 땅을 위하여 일상의 정의를 망각한다. 그들은 개인들의 자유에 절망하고 인류의 기이한 자유를 꿈꾼다. 그들은 고독한 죽음을 거부하고 놀라운 집단적 임종의 고통을 영생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더 이상 있는 그대로의 것을, 세계를, 살아 있는 인간을 믿지 않는다. 유럽의 비밀은 더 이상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혁명은 언제나 실패로 귀결된다. 설령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혁명의 주역들은 다시금 탄압자들로 변신하며 그들은 또 다른 이들에 의해 몰락하게 된다. 이들이 매번 실패하는 이유에 대해 카뮈는 그들이 항상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카뮈가 말하는 불가능한 것은 바로 절대적 정의를 말한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바라는 정의는 실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완벽하지도 않고 모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는 절대적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곳은 유토피아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토피아는 그들이 죽인 신과 다를 바 없다. 결국 본래 있던 신을 죽이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낸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카뮈는 약간의 관용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결코 완전무결할 수 없으며 이런 인간들로 이루어진 사회 또한 그들이 바라는 절대적 정의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점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반항하는 인간은 일반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인정되기를 바란다. 이 한계야말로 바로 그 존재가 가진 반항의 힘이기 때문이다. (...) 반항하는 인간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자유를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는 한 그는 존재를 파괴하고 타인의 자유를 파괴할 권리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카뮈의 반항은 한계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다른 이들의 자유를 침범하지도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자유를 침범당하지 않도록 한다. 이를 주인과 노예 간의 관계를 예로 들며 설명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주인과 노예가 있는데 어느 순간 노예의 마음 속에서 반역의 충동이 생기는데 이때 자신의 가치, 권력을 의식하게 된다. 노예는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게 되는데 이때 거부하는 행위는 개인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집단을 위해서이며, 또 노예가 그것을 자각하는 순간 피해자들 간의 연대성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여하튼 노예의 반항, 즉 개인의 반항은 곧 집단의 반항으로 확대할 수 있는데 문제는 여기서 왜곡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연대성이 곧 전체화된다는 것이다. 본래 반항 정신은 대지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세계 안에 속해있기 때문에 한계를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인데, 문제는 혁명가들이 등장하면서부터 신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에 대한 자유를 갈망하면서부터 달라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사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카뮈는 그가 극단적인 귀결로의 비약을 하여 자유를 위해 세계 질서에 대한 반항과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을 하였는데 문제는 신을 부정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신이 살인하고도 그것을 부정한다면 인간이 인간을 살해하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는 모순을 지적한다. (솔직히 모르겠음) 그러나 사드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사형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며 스스로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를 죽이는 것에 대한 증오를 보인다. (여기서 다시 카뮈가 지적하는 모순이 드러나는데 하나의 살인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 모든 살인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또 다른 형이상학적 반항은 허무주의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니체로부터 시작된다. 참고로 카뮈는 니체의 해석을 따라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한가지 니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이 있다. 니체가 주장한 것들이 이후의 폭력을 정당화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 니체의 허무주의적 반항이 모든 것을 허용하게 만들어 진정한 반항의 의미가 왜곡됐다고 말한다. 이 왜곡된 반항은 이후 전체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나타나 전쟁(세계대전)에 이용된다.


 하여간에 카뮈가 반항하는 인간에서 중점적으로 물어보는 건 이거다. 폭력(살인)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정당화될 수 있는가. 대답은 아니오다. 카뮈는 양심적인 살인자들에 대해 서술하며 그들의 행동-자신들의 행동, 즉 폭력(살인)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이 가장 양심적이라고 말한다. 어떠한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 카뮈에게는 차라리 살인을 한 대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행동이 나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완전히 옹호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필요한 폭력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폭력을 인정하는 순간 그 정당성은 또 다른 폭력을 무차별적으로 허용하게 된다. “반항하는 인간이 살인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살인 행위와 스스로를 화해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밖에 없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의 죽음과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가들의 반항은 왜곡된 반항이다. 그들이 말하는 진보적 폭력이란 자신들의 모순을 애써 정당화시키려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왜곡된 반항을 이용하여 전체주의를 부르짖은 나치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카뮈는 개인을 억압하고 희생하게 만드는 전체성을 부정하며 항상 개개인의 권리-자유를 인정하자고 말한다. 실체 없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목표로 삼는 것 대신 현재에 충실하자고 주장한다.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항상 삶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반항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