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인랜드 창비세계문학 49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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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핀천의 소설 바인랜드는 현대 문학의 거장이 선사하는 거대하고 복잡한 미로와 같다. 1960년대의 뜨거웠던 혁명 정신이 1980년대라는 풍족한 소비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변질되고 파편화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역사적 탐사극이다.

 

1. 텔레비전의 시대, 박제된 혁명가들

소설은 1984년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한때 히피였던 조이드 휠러가 국가 보조금을 받기 위해 유리창을 깨고 뛰어내리는 기괴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핀천은 1980년대를 튜브(텔레비전)가 지배하는 시대로 규정한다. 사람들은 TV 앞에서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과거의 열정을 잊고, 권력이 주입하는 정상성에 길들어 간다. 이 과정에서 과거에 묶여 영혼이 정체된 사람들은 타나토이드(반쯤 죽은 자)로 묘사된다.

 

2. 과거의 비밀을 찾는 여정

조이드의 딸 프레리는 사라진 엄마 프레네시의 발자취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이 과정에서 1960년대 급진적 영화 집단이었던 24fps의 활동과 그들이 권력의 상징인 브록 본드에 의해 어떻게 무너졌는지가 드러난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끊임없이 오가며, 세상을 바꾸려던 청춘들이 왜 배신과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국가 권력이 반공주의와 공포를 이용해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옥죄었는지 날카롭게 파헤친다.

 

3. 기억을 간직하는 혁명

작품 속 바인랜드는 감시망을 피해 숨어든 이들의 마지막 피난처이자 기억의 저장소를 상징한다. 핀천은 비록 60년대의 혁명은 실패했을지 몰라도, 사람 사이의 연결과 기억을 지키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흩어졌던 가족과 동료들이 다시 만나는 결말은 삭막한 시스템 속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인간적인 애정과 연대의 희망을 보여준다.

 

4.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이 소설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은 정말 자유로운가, 아니면 권력과 미디어가 심어준 것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문장은 복잡하고 정보량은 방대하지만, 그 속에는 길을 잃고 헤매는 인간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거대한 미로 같은 서사를 통과하고 나면 독자는 자신이 발 딛고 선 세상과 그 너머의 진실을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된다.

 

 

도서 리뷰, 원문 보러 가기

https://blog.naver.com/artjak/224204271102

"아저씨들 세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혁명을 믿고, 그것을 위해 바로 목숨을 건다는 거예요. 하지만 아저씨들은 확실히 텔레비전에 대해서는 잘 몰랐어요. 텔레비전이 아저씨들을 붙잡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었어요. 대안적인 미국 전체를 인디언들이 그랬듯 진짜 적들에게 모두 팔아버렸어요. 그것도 1970년 달러로. 너무 싼값에 말예요……" p.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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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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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혁명가라는 거창한 이름 뒤에 가려진 한 남자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1. 비장함과 유머 사이의 삶

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았던 아버지의 죽음은 비극적이면서도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신념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정작 농사일에는 서툴고 일상에서는 빈틈투성이였던 아버지의 모습은 혁명가라는 딱딱한 이미지에 인간적인 온기를 불어넣는다.

 

2. 빨치산의 굴레를 벗고 만난 인간

딸인 주인공에게 아버지는 평생 피하고 싶은 굴레였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주홍 글자 때문에 세상과 거리를 두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례식장을 찾아온 조문객들의 회상을 통해 딸은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얼굴들을 마주한다. 이데올로기보다 사람을 먼저 챙겼고, 꽃을 보며 마음 설레던 한 남자의 평범하고도 입체적인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3. 고통을 견디는 방식과 진정한 화해

아버지는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조차 찬란한 젊음으로 추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통을 단순히 견디기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맞서 싸웠고, 타인의 사정을 무심하게 넘기는 듯하면서도 누구보다 따뜻하게 주변을 보듬었다. 딸은 장례식 동안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며, 비로소 누구의 딸이 아닌 한 인간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4. 죽음을 통한 삶의 해방

죽음은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남으로써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고, 딸은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며 상처를 치유한다. 아버지는 이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진정한 부활을 맞이한다.

 

이 소설은 무거운 근현대사를 다루면서도, 결국은 사람과 사랑, 그리고 이해와 화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원문 보러 가기

https://blog.naver.com/artjak/224146993507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에는 ‘빨치산’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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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미셸 회고록 - 우리가 기억해야 할 단 한 명의 프랑스 여성
루이즈 미셸 지음, 김영신 옮김 / 불란서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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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했던 한 시대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를 되새겨보게 된다.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그녀의 발자취는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신념을 잃지 않고 인간 존엄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모습이 인상적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연대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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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김유나 지음 / 창비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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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리뷰] 김유나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낱낱의 조각들: 일곱 빛깔의 불투명성

 

 

저마다의 사연에서 위로하기

 

1. <이름 없는 마음>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해소되지 않는 부채감거리감을 다룬다. 주인공은 떨어져 사는 남동생 현권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는 미안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낀다. 현권이 어린 시절 비를 맞으며 자신을 기다려 준 기억을 떠올리며, 나는 당시 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의 인색함을 대면한다. 작가는 현권의 굽은 어깨와 처마 아래에서의 기다림을 통해, ‘지겨워미안해사이를 오갔을 그 복잡하고 이름붙일 수 없는 마음의 영토를 세밀하게 복원해 낸다.

 

2. <랫풀다운>

상실과 단절을 겪은 이가 자신을 단련하는 과정을 운동 기구인 랫풀다운에 비유했다. 직장과 연인을 잃은 석용은 바를 쇄골 쪽으로 당기는 광배근 운동에 매달린다. 타인에게 바위 같은 새끼라 불릴 만큼 무뚝뚝하게 버텨온 그는, 제주 바닷속으로 내려가며 비로소 숨 쉬는 법을 다시 배운다. 깊은 물 속에서 느끼는 생경한 해방감은 고립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상처를 무른 몸으로나마 받아들이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학적 은유다.

 

3. <너 하는 그 일>

노동의 현장에서 벌어지는 계급적 시선과 자기혐오, 그리고 연민을 다룬다. 물류센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회계사)수험생 태은은 주변인들을 나태한 막장 인생이라 멸시하며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려 애쓴다. 그러나 폭력적인 환경을 견뎌온 엄마가 함께 물류센터에서 일하게 되면서, 태은의 날 선 시선은 무너진다. 무거운 쌀가마를 옮기며 도망가자라고 말하는 엄마의 팔짱에서 태은은 비로소 타인을 비웃음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던 비겁함을 용서받고, 삶의 내리막을 함께 달려 내려갈 용기를 얻는다.

 

4. <으름 씨 뱉기>

관계의 효율성과 미래의 가치를 따지는 현대인의 건조한 내면을 포착한다. 성묘를 가서 애먼 무덤에 절을 하는 해프닝은 소통이 부재한 관계의 단면을 드러낸다. 특히 영재 지능을 가진 딸 지수와의 대화는 인상적이다. 언어가 단순한 정보 전달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논리체계이자 문화적 배경임을 말하는 지수의 성숙함 앞에서, 부모의 세속적인 계산은 길을 잃는다. 으름의 달콤한 살 속에 숨겨진 딱딱한 씨앗처럼, 관계에는 반드시 뱉어내야 할 불편함이 있음을 작가는 서늘하게 일깨운다.

 

5. <부부생활>

은행 강도라는 파격적인 설정을 통해 사랑의 결속력을 시험한다. 이들에게 은행을 터는 행위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사랑의 연장선이자 영원한 결속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하던 영수가 진희의 광기 어린 목적에 동참하며 느끼는 묘한 해방감은 사랑의 비논리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고의 부부는 남편이 도둑질해 온 물건을 여편네가 갖다 파는 부부라는 어머니의 말처럼, 이들은 세상의 윤리 대신 둘만의 밀담을 선택함으로써 그들만의 견고한 왕국을 건설한다.

 

6. <물이 가는 곳>

보험 영업이라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느끼는 모멸감과 그 극복을 다룬다. 실적과 유지라는 파이프라인에 갇힌 주인공은 타인의 불행이나 필요를 이용해 보험을 팔아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잔바리 회사원이라 자조한다. 타인의 경멸 어린 눈빛을 견디며 손바닥에 땀을 고이게 하는 삶. 그러나 작가는 물이 가는 곳이라는 제목처럼, 삶의 고통 또한 어떤 흐름 속 일부이며, 그 모멸감에서도 결국 진실은 하다 만 말 속에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7. <내가 그 밤에 대해 말하자면>

어린 시절 겪은 기묘한 밤의 기억을 통해, 기억이 어떻게 편집되고 왜곡되는지를 추적한다. 헛간에 누운 소, 엄마와 함께 꾸몄던 비밀스러운 공간, 그리고 그 비밀을 빼앗아 버린 어른들. 주인공은 어른이 되어 믿기 좋은 만큼의 진실만 말해야 피곤해지지 않는다라는 처세의 기술을 터득한다. 이는 진실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진실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슬픈 통찰이다.

 

 

안개 속의 진실, 그 위태로운 아름다움

 

김유나의 소설 세계는 한마디로 불완전한 기억의 연대라 할 수 있다. 그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사실은 각자의 필요와 상처에 의해 보정된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조각들임을 폭로한다. 하지만 그 폭로는 냉소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인간이 서로를 완전히 장악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빈틈이라고 말한다.

 

첫째, ‘침묵과 행위의 서사다.

소설 속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랫풀다운 바를 당기고, 시금치 밑동을 열십자로 가르고, 땀 억제제를 이마에 롤링하고, 으름 씨를 뱉어낸다. 작가는 인물의 내면을 직접 서술하는 대신 일상의 구체적인 동작을 통해 감정의 파동을 전달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문장 사이의 여백에 자기 경험을 투사하게 만드는 리터러시의 힘을 발휘한다.

 

둘째, ‘거리두기를 통한 이해다.

김유나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오만을 경계한다. <부부생활>에서처럼 한 공간에 있어도 마음의 목적지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이름 없는 마음>에서처럼 가족 간에도 넘지 못할 선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거리두기는 단절이 아니라, 상대방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성숙한 배려일 것이다. 작가는 우리가 서로를 다 알지 못하기에 비로소 서로를 궁금해할 수 있다는 역설을 제시한다.

 

셋째, ‘기억의 재구성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내가 그 밤에 대해 말하자면>에서 보여주듯, 인간은 생존을 위해 진실을 편집한다. 작가는 이를 거짓말이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진 둘만의 밀담처럼, 우리가 공유하는 비밀과 믿음이 삶을 지탱하는 동력이 됨을 강조한다. 진실보다 소중한 것은 그 진실을 함께 견디기로 약속한 진심이기 때문이다.

 

김유나의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은 선명한 정답을 제시하는 지도가 아니라, 안개 낀 길을 함께 걷는 동행의 손길과 같다. “빨랫줄이 너무 높다라고 생각하면서, 조금만 내려주면 될 일이라고 직감한다. 비루한 일상의 무게를 견디는 평범한 이들을 향한 깊은 긍정이다. 독자는 이 소설들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이름 없는 마음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며, 그 이름 없음조차 삶의 소중한 일부임을 또한 깨닫게 되리라.



"(창비)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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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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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순환, 다시 살피는 우리의 삶


황석영의 장편 <할매> 리뷰

 

 

겨울 철새들이 시베리아의 아무르강 얼음막을 뚫고 남하할 때, 그 먼 길을 따라 한 알의 열매가 작은 새의 몸속에서 여행을 이어온다. 소설 <할매>는 바로 그 작디작은 기원의 흔적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개똥지빠귀가 남긴 씨앗 하나가 모래의 숨을 들이마시며 싹을 틔우고, 그 싹이 세월의 바람을 견디며 팽나무가 된다. 이 나무는 마을보다 먼저 도착하여 사람들의 막막한 삶을 품고 또 떠나보내며, 긴 시간을 몸에 새긴다. 소설은 그 나무의 주름지고 견고한 몸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포개어 살아온 흐름사를 웅숭깊게 더듬는다.

 

자연의 순환 속에서 태어난 할매 나무

팽나무는 처음부터 거창한 영물이 아니었다. 어린 풀과 다르지 않은 가냘픈 존재였으나, 매 겨울의 시련과 다시 들어찬 봄빛이 층층이 쌓이며 오래된 시간을 지녔다. 그 겨울의 결마다 작은 새 무리의 기척이 배어 있고, 나무의 생을 흔들림 없는 연대기로 바꾸었다. 나무의 역사는 곧 자연의 순환이 만들어낸 암묵의 연대였다.

소설은 나무를 증인으로 세운다. 세월이 어느 방향으로 구르든, 그 위를 지나가는 생명들이 결국 서로의 흔적이 되고 토양이 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의 죽음이 나무를 낳고, 인간의 마지막도 다시 새와 갯벌의 입이 된다. 전혀 다른 생들이 서로의 삶을 갈아올려 이어가는 장면들이 거대한 숨의 교환처럼 그려진다.

 

인간의 삶이 얹히는 자리: 몽각에서 배동수까지

나무 주변에는 언제나 인간의 사연이 겹겹이 깃든다. 굶주린 어미에게서 건네받아 스님에게 길러진 아이 몽각, 자신을 키워준 공양주 보살의 기억을 나무 심기라는 작은 의식 속에 새긴다. 그의 마지막이 갯벌의 생명(칠게)들과 뒤섞여 다시 새들의 먹이가 되는 장면은, 생의 끝이 곧 다른 생의 출발임을 일깨운다.

세월이 내려앉은 뒤, 팽나무 곁에는 마을이 형성되고, 당골네 고창댁과 사공들, 천주교 박해를 겪던 유분도와 그 가족, 동학농민군에게 합류한 배경순의 계보가 한데 모여 살아간다. 이들의 삶은 평범한 역사의 뒷면임과 동시에 세상의 주인공처럼 빛낸다. 억압과 가난, 박해와 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늘 자신을 지탱해 줄 믿음, 흙냄새, 음악(풍물패), 마을을 찾아 헤맸다.

현대에 이르러 배동수와 방지거 신부(유산하, 길 위의 신부)가 등장한다. 산업화의 폭풍 아래 갈라지고 밀려난 농민들,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고향을 잃는 어촌 사람들, 갯벌을 떠난 새들. 이 시대의 고통은 더 거칠고 두텁다. 그러나 그 거친 풍경 속에서도 두 인물은 갯벌의 합창을 기억하며, 사라져 가는 생명의 숨을 붙들기 위해 걷고 또 엎드린다(삼보일배). 그들의 몸짓은 오래된 나무가 지켜온 세계를 잇는 마지막 외침처럼 읽힌다.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지탱하는 방식

전체를 꿰뚫는 핵심은 연결이다. 자연과 인간은 독립된 두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죽음으로 살아가고 서로의 생명으로 기억되는 관계라는 사실을 소설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갯벌의 미물, 새들의 이동 경로, 절망을 건너온 인간들, 종교와 신명의 힘, 그리고 나무 한 그루의 내력. 이 모든 것은 분리된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긴 숨결을 이룬다. 작가는 그것을 과장 없이, 오래된 흙냄새가 풍기듯 담담하게 풀어낸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문학적 기념비에 가깝다. 서학과 동학, 박해와 농민 봉기, 산업화와 환경운동 등 복잡한 사건들을 거대 서사가 아니라 한 그루 나무와 그 주변의 삶이라는 축 위에서 재해석해 낸 점이 돋보인다.

 

다른 작품과의 대응: 황석영 문학의 연속성과 변주

황석영의 문학은 언제나 민중의 삶과 역사의 상처, 땅의 숨결을 중심에 두었다. <장길산>·<손님>·<바리데기> 등에서 드러나는 민중 서사와 신화적 상상력의 전통이 이번 작품에도 이어지되, <할매>는 서사의 결이 다르다. 혁명적 함성이나 즉각적 항쟁의 박동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한 그루 나무가 오랜 계절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시간을 응고시키며 이야기를 펼친다. 사라져 가는 갯벌의 숨결과 나무의 쉰 목소리가 중심을 차지하고, 문장은 흙의 질감과 뿌리의 무게에 더 가까워졌다. 그리하여 작가의 오래된 물음살아남은 이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은 이번에는 나무의 체온과 마을의 기억을 통해 더욱 단단하게 되묻는다.

 

맺음: 한 그루의 나무가 품은 세계

소설 <할매>는 한 마을의 역사나 한 종교 공동체의 비극을 다루지 않는다. 이 작품은 세계의 질서가 어떤 방식으로 무너지며, 또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가를 한 그루의 팽나무로 설명한다. 간척과 개발의 이름으로 깎이고 메워진 갯벌, 그 위에서 갈 곳을 잃은 새들, 사라져가는 마을과 불안한 미래, 그리고 그 와중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킨 나무의 육백 년.

나무는 마지막에 이르러 신부에게 속삭인다. 어디 있었느냐고, 늦었지만 돌아온 이에게 말을 건네듯. 그 목소리는 나무의 것이자, 이 땅의 것이며, 우리가 잊고 지낸 자연과 사람들의 시간이다. 이 소설은 그 시간을 다시 듣게 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 목소리를 따라, 저마다의 오래된 뿌리를 더듬게 된다.

 

 

** 소설에서는 다양한 동식물이 등장하며 특히 새와 갯벌의 공생관계를 증명하듯 무수한 생명을 거론한다. 소설의 프롤로그를 장식했던, 팽나무의 시원이었던 개똥지빠귀의 여정은 그 뒤로 자취를 감춘다.

연안-갯벌 생태계 변화는 개똥지빠귀 같은 철새에게 치명적이다. 새만금 방조제를 비롯한 간척 사업은 단지 물의 흐름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갯벌 생태계 전체그곳에 사는 무척추동물, 조개, , 각종 먹이 체계를 파괴했다. 그렇게 되면, 철새들이 월동지나 중간 기착지로 삼던 연안이 더 이상 먹이를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간척 이후 조개와 게가 사라졌고, 그들을 먹던 도요물떼새들의 개체 수가 크게 줄었다는 보고가 있다.

과연 개똥지빠귀는 이 겨울, 지금 어디에서 지저귀고 있을까.

새 한마라기 날아왔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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