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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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순환, 다시 살피는 우리의 삶


황석영의 장편 <할매> 리뷰

 

 

겨울 철새들이 시베리아의 아무르강 얼음막을 뚫고 남하할 때, 그 먼 길을 따라 한 알의 열매가 작은 새의 몸속에서 여행을 이어온다. 소설 <할매>는 바로 그 작디작은 기원의 흔적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개똥지빠귀가 남긴 씨앗 하나가 모래의 숨을 들이마시며 싹을 틔우고, 그 싹이 세월의 바람을 견디며 팽나무가 된다. 이 나무는 마을보다 먼저 도착하여 사람들의 막막한 삶을 품고 또 떠나보내며, 긴 시간을 몸에 새긴다. 소설은 그 나무의 주름지고 견고한 몸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포개어 살아온 흐름사를 웅숭깊게 더듬는다.

 

자연의 순환 속에서 태어난 할매 나무

팽나무는 처음부터 거창한 영물이 아니었다. 어린 풀과 다르지 않은 가냘픈 존재였으나, 매 겨울의 시련과 다시 들어찬 봄빛이 층층이 쌓이며 오래된 시간을 지녔다. 그 겨울의 결마다 작은 새 무리의 기척이 배어 있고, 나무의 생을 흔들림 없는 연대기로 바꾸었다. 나무의 역사는 곧 자연의 순환이 만들어낸 암묵의 연대였다.

소설은 나무를 증인으로 세운다. 세월이 어느 방향으로 구르든, 그 위를 지나가는 생명들이 결국 서로의 흔적이 되고 토양이 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의 죽음이 나무를 낳고, 인간의 마지막도 다시 새와 갯벌의 입이 된다. 전혀 다른 생들이 서로의 삶을 갈아올려 이어가는 장면들이 거대한 숨의 교환처럼 그려진다.

 

인간의 삶이 얹히는 자리: 몽각에서 배동수까지

나무 주변에는 언제나 인간의 사연이 겹겹이 깃든다. 굶주린 어미에게서 건네받아 스님에게 길러진 아이 몽각, 자신을 키워준 공양주 보살의 기억을 나무 심기라는 작은 의식 속에 새긴다. 그의 마지막이 갯벌의 생명(칠게)들과 뒤섞여 다시 새들의 먹이가 되는 장면은, 생의 끝이 곧 다른 생의 출발임을 일깨운다.

세월이 내려앉은 뒤, 팽나무 곁에는 마을이 형성되고, 당골네 고창댁과 사공들, 천주교 박해를 겪던 유분도와 그 가족, 동학농민군에게 합류한 배경순의 계보가 한데 모여 살아간다. 이들의 삶은 평범한 역사의 뒷면임과 동시에 세상의 주인공처럼 빛낸다. 억압과 가난, 박해와 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은 늘 자신을 지탱해 줄 믿음, 흙냄새, 음악(풍물패), 마을을 찾아 헤맸다.

현대에 이르러 배동수와 방지거 신부(유산하, 길 위의 신부)가 등장한다. 산업화의 폭풍 아래 갈라지고 밀려난 농민들, 새만금 간척 사업으로 고향을 잃는 어촌 사람들, 갯벌을 떠난 새들. 이 시대의 고통은 더 거칠고 두텁다. 그러나 그 거친 풍경 속에서도 두 인물은 갯벌의 합창을 기억하며, 사라져 가는 생명의 숨을 붙들기 위해 걷고 또 엎드린다(삼보일배). 그들의 몸짓은 오래된 나무가 지켜온 세계를 잇는 마지막 외침처럼 읽힌다.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지탱하는 방식

전체를 꿰뚫는 핵심은 연결이다. 자연과 인간은 독립된 두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죽음으로 살아가고 서로의 생명으로 기억되는 관계라는 사실을 소설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갯벌의 미물, 새들의 이동 경로, 절망을 건너온 인간들, 종교와 신명의 힘, 그리고 나무 한 그루의 내력. 이 모든 것은 분리된 조각이 아니라 하나의 긴 숨결을 이룬다. 작가는 그것을 과장 없이, 오래된 흙냄새가 풍기듯 담담하게 풀어낸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문학적 기념비에 가깝다. 서학과 동학, 박해와 농민 봉기, 산업화와 환경운동 등 복잡한 사건들을 거대 서사가 아니라 한 그루 나무와 그 주변의 삶이라는 축 위에서 재해석해 낸 점이 돋보인다.

 

다른 작품과의 대응: 황석영 문학의 연속성과 변주

황석영의 문학은 언제나 민중의 삶과 역사의 상처, 땅의 숨결을 중심에 두었다. <장길산>·<손님>·<바리데기> 등에서 드러나는 민중 서사와 신화적 상상력의 전통이 이번 작품에도 이어지되, <할매>는 서사의 결이 다르다. 혁명적 함성이나 즉각적 항쟁의 박동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한 그루 나무가 오랜 계절을 쌓아가는 방식으로 시간을 응고시키며 이야기를 펼친다. 사라져 가는 갯벌의 숨결과 나무의 쉰 목소리가 중심을 차지하고, 문장은 흙의 질감과 뿌리의 무게에 더 가까워졌다. 그리하여 작가의 오래된 물음살아남은 이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기념할 것인가은 이번에는 나무의 체온과 마을의 기억을 통해 더욱 단단하게 되묻는다.

 

맺음: 한 그루의 나무가 품은 세계

소설 <할매>는 한 마을의 역사나 한 종교 공동체의 비극을 다루지 않는다. 이 작품은 세계의 질서가 어떤 방식으로 무너지며, 또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가를 한 그루의 팽나무로 설명한다. 간척과 개발의 이름으로 깎이고 메워진 갯벌, 그 위에서 갈 곳을 잃은 새들, 사라져가는 마을과 불안한 미래, 그리고 그 와중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킨 나무의 육백 년.

나무는 마지막에 이르러 신부에게 속삭인다. 어디 있었느냐고, 늦었지만 돌아온 이에게 말을 건네듯. 그 목소리는 나무의 것이자, 이 땅의 것이며, 우리가 잊고 지낸 자연과 사람들의 시간이다. 이 소설은 그 시간을 다시 듣게 한다. 그리고 독자는 그 목소리를 따라, 저마다의 오래된 뿌리를 더듬게 된다.

 

 

** 소설에서는 다양한 동식물이 등장하며 특히 새와 갯벌의 공생관계를 증명하듯 무수한 생명을 거론한다. 소설의 프롤로그를 장식했던, 팽나무의 시원이었던 개똥지빠귀의 여정은 그 뒤로 자취를 감춘다.

연안-갯벌 생태계 변화는 개똥지빠귀 같은 철새에게 치명적이다. 새만금 방조제를 비롯한 간척 사업은 단지 물의 흐름을 막는 것만이 아니라, 갯벌 생태계 전체그곳에 사는 무척추동물, 조개, , 각종 먹이 체계를 파괴했다. 그렇게 되면, 철새들이 월동지나 중간 기착지로 삼던 연안이 더 이상 먹이를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간척 이후 조개와 게가 사라졌고, 그들을 먹던 도요물떼새들의 개체 수가 크게 줄었다는 보고가 있다.

과연 개똥지빠귀는 이 겨울, 지금 어디에서 지저귀고 있을까.

새 한마라기 날아왔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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