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語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침묵과 

                                     눈眼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빛이 만나는 찰나의 이야기

 
 

여자의 침묵과 남자의 어둠 때문만은 아니다. 『희랍어 시간』, 그 자체에서 연원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숨가쁜 시간을 달려와 다시 만난 일상적 평온 앞에서 느끼게 되는 당혹감, 속에서 다시 돌아본 어제들. 어느덧 두 번의 계절이 별다른 흔적도 남기지 않은채 지나가 버렸고 그 사이 삶의 시계는 서서히 생의 후반으로 시침을 옮겨가고 있었다. 여전히 무언가를 '읽지'만,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가 낯설고 어색해진다.  비 내리는 늦은 새벽, 『희랍어 시간』을 끝냈다. 읽는 내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듯한 존재의 침묵과 어둠은, 그러나 단 한 줄의 문장도 현실 밖으로 불러내지 못한다.
 

 

『희랍어 시간』은 2008년 늦가을, 작가가 깊은 슬럼프에 빠졌을 당시 씌어진 소설이다. "언어에 대한,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 한 줄도 쓰지 못하는 위기 속에서 '희랍어 시간' 초고를 쓰며 이 고민을 뚫고 나갔다. 이듬해 봄 150여 장의 스케치를 완성했을 때 깊은 수렁을 빠져나온 듯했다. 그 느낌에 힘입어 한동안 손을 놓았던 '바람이 분다, 가라'를 완성했다"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니었어도 『희랍어 시간』은 이미, 처음부터 소설의 내용이나 인물들의 캐릭터는 중요치 않았다. 한강의 작품은 그 자체로 삶의 고통과 결핍의 순수한 덩어리이며(적어도 이제껏 내가 읽은 한강은 그랬다), 때문에 『희랍어 시간』은 다시 돌아온 일상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은 삶의 불안과 결핍, 상실이자 또한 오로지 그러한 것들 속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실존의 체험이기에. 일종의 메타적 독서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말語은 형상화되지 못한다. 『희랍어 시간』 바로 이전에 읽은 책이 『하이데거』다. 그의 말을 빌어와 『희랍어 시간』을, 오로지 경제적 불안만이 유일한 실존적 불안이 되어버린 세계. 그 세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던 어둠과 침묵들. 그리고 동시에 내동댕이쳐진 존재와 시간들을 나는, 우리는 소설과 읽기를 통해서나마 힘겹게, 끙끙대며 끌어와 마주대한다. 그래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란 어디로부터 도망을 가는 것인데, 도망가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이때 내가 거기에서 도망가려는 바로 그 '나'가 사실은 '본래의 나'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더 이상 안전함, 편암함, 포근함에 머물러 있지 않을 때 불안은 다가오며 우리는 화급하게 도망가게 되는데, 그 도망은 우리가 본래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불안을 그 자체로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 곧 '불안에 대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불안에 대한 용기를 갖는 사람은 자신을 대면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 동안 자기가 매달려 있던 것들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이 아무것도 아님이 곧 '무無'인데,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다는 것을 그가 그간 매달려 왔던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으로 무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비로소 나는 그들 속에 푹 빠져 있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고, 나 자신을 대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을 스스로 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결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단을 계속 유보한다. 하이데거는 안절부절함을 불안의 표식이라 하면서 이제 안절부절함을 제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안절부절함 속에서 자신을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기상, 존재와 시간)

 

침묵과 어둠이 불안이라면, '불안에 대한 용기'와 '결단'은 그 속에서 본래적으로 드러나는 빛일 터이다.
동의하든 하지 않든, 『희랍어 시간』은 그렇다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나 '어쩌면'이 아닌,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열흘', 이후에나 돌아올 줄 알았다. 열흘 간 입을 옷부터 자칫 냉장고 안에서조차 푸른 꽃을 피울지도 모를 밑반찬들, 한 시간이 채 안될지라도 또 하루를 살아냈구나 자위해줄 수 있는 몇 권의 책들,을 챙겨 목요일 아침 집을 나섰다. 생각보다 이르게 일이 끝나 버렸다. 여전히 다른 파트에 배치된 동료들은 바지런히 손을 놀리고들 있었지만 질끈 눈을 감는다. 어짜피 오늘보다 더 긴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라도 오늘은 여기까지, 충분하다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꼼수다' 23회를 한 주 더 기다린다는 건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고문이다. '나꼼수'는 이미 어딕션의 단계로 들어가 버렸다. (스마트폰도 아니고, 사무실 컴퓨터론 이어폰을 꽂아도 소리가 없다. 적막하다. 그렇다고 업무에만 집중하라는 작은 '가카'들의 넓은 아량 때문은, 물론 아니다. 그냥 오래된 컴일 뿐이다.)
 



 

 

총수는 책의 마지막에 "나는 잘생겼다! 크하하하"라고 했지만 역시, 사족일 뿐이다. 『닥치고 정치』를 읽고 나면 표지에서 무언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듯 한껏 X폼을 잡고 있는 총수가 '톰 크루즈'나 '조지 클루니'보다 멋져 보지이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교육이 있어 일찍 파했던 수요일, 책의 반을 읽었고 나머지는 퇴근 후 한 시간 남짓 정도만 읽었을 뿐이지만 녹취록을 문자로 옮긴 책이니만큼 가독성이 엄청나다. 여담이지만, 항상 머리맡에 두고 출근한 후 이슥한 밤이 되어서야 총수를 만날 수 있었는데 어머님이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따름이다. 어머니가 가장 싫어하시는, 아니 혐오하시는 남자가 긴머리의 또는 콧수염을 기른 남자다. 책표지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총수, 긴 머리에 콧수염까지 기른 총수. 언제라도 어머니 눈에 발각되지 않을 수 없었을텐데 한마디가 없으셨다. 제 딴엔 또, 그게 서운하다.

 
뭐랄까, 외모나 스타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닥치고 정치』의 김어준은 집에 있는 정치철학분야의 저자들, 가령 비슷한 덩치에 콧수염을 가진 지젝, 천상 선비 이미지의 고진이나 바디우, 바우만 그리고 국내저자로는 논리와 사상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김규항과 진중권, 모두와 맞짱을 뜬다해도 결코 밀리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노빠' 였거나 일개 범부적 정치의식의 한계 내에 있기 때문이라 해도 좋다. 언제나 합리성과 이성에 밀려 뒤쳐져야 했던 값싼 '감정'을 내세워 정치를 논한다는 점, 아니면 눈앞의 집권을 위해 원대한 대의나 절대적 이상을 무시한 듯한 언설은 좌나 우, 모두로부터 손가락질 받거나 혀를 내두르게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들은 김어준이란 사람 자체를 고려의 대상에서 일찌감치 배제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총수에게 무쟈게 공감한다. 공감을 넘어, 그의 예언이 이번 서울시장 선거부터 내년 총선과 대선까지 하나하나 실현되어가는 과정을 눈 크게 뜨고 지켜보고 싶다.

 

市場의 언어로 썰을 풀어놓지만 그래서 그의 언어엔 생동감이 넘쳐난다. 누구나? 누구나! 노력만하면 지적 담론을 풀어놓을 수는 있다. 그리고 누구나? 누구나! 관념적 이상을 주장할 수 있다. 적어도 스스로는 고귀해질 수 있을테니. 하지만 나는, 우리는 생활인이고 우리는 매일처럼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사람을 만나고, 생활을 지속한다.

2002년 대선 때의 흥분, 근 십년 만에 총수는 그 당시의 흥분에 불을 댕겼다. 말미에 했던 '나꼼수'는 이미 그가 한 예언이 실현되는 하나의 과정이기도 하다. '선동'이라 타박해도 좋다. 그런 선동이라면 쌍수들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다. 주변에 있는 한 두명쯤은 헤드락을 걸어서라도 그 선동에 동참하게 만들고 싶을 정도다.

그리고 난, 확실히, 이번엔 바뀔 수 있다!, 라고 자신'했다.' 그건 바람의 문제가 아닌 당위의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근데 이것이, 어쩌면, 주관적 보편성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게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뀔 수도 있다!'의 '느낌표'는 언제라도 '물음표'로 대체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오늘 아침. (어째서 그런 대화가 연출되었나는 모르겠다.)
 

"엄마, 안철수하고 박근혜하고 대선에 나오면 누구 찍을꺼야?"
"나야, 당연히 박근혜한테 표 주지. 여기 동네 아줌마들은 다 박근혜야" "아~~~~왜!"
"안철수 나오면, 민주당으로 나올테고...난 손학규가 싫더라, 웬지. 만약 안철수가 되면 손학규도 한 자리 떡 차지할텐데...난 그꼴 못봐"
"에이, 그럼, 그럼 이명박은 좋아?" "싫지" "근데 왜 박근혜야"
"그냥" (말그대로 여기엔 논리도 이성도 없다. 그냥이면 된다. 누나는 좋겠다. '시바')
 

저녁에 동기들이 잠깐 다녀갔다.
"나는 꼼수다 알아"
남자동기 "그게 뭔데? 그런게 있어?"
여자동기 "어 알지, 근데 그런걸 뭐하러 들어"
나..."웁스"
나 "너 이번에 나경원 찍을거야 박원순 찍을거야"
여자동기(서울집) "나!, 투표 안 할 건데"
나(속으로) '시바'

총수는 좀더 분발해 줘야겠다. 제발 저 '물음표'를 앞으로 남은 일 년 동안 부지런히 지워나가려면 지금보다 쬐끔 더 해줘야겠다. 그러니 총수는 주일 방송을 1회 늘려 주 2회 방송으로 '나꼼수'를 증편한는 것도, 심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갑갑증이 남는다. 침울하다.

우리,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거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키를 통해 카버를 알았다 해도 과언은 아닐게다. 아니 하루키를 통해 '피츠제럴드'나 '카버'를 무심히 지나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더우기 '빵가게'라는(그것이 온갖 종류의 롤빵들이 오븐에서 갓 구워져 향긋한 빵냄새를 풍기는 전통적 빵가게가 아닌 새벽 두 시반, 도쿄 도심의 한 복판에서 "잉카의 우물을 바라보는 관광객 같은 시선"으로 습격자들을 바라보는 점원들이 운영하는 '맥도날드' 일지라도) 소제적 동일성은 「빵가게 재습격」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대한, 또는 '카버'에 대한 '하루키' 식의 '오마쥬'로 그려지는 것은 억측스럽기보단 자연스런 연상작용은 아닐까.

 

이런 상상은 어떨까.

'별것~'에서 부부는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게 되면서 하나의 '상실'을 경험한다. 그 '상실'은 더이상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슬픔과 상처를 동반하지만 두 세계에 대한 객관적 가치평가는 불가하다. 비록 그것이 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운명, 저주스러운 운명으로써 그들로서는 거부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삶의 단속성들에 의해 지속되는 연속성의 이면일 뿐이다. 하지만 자식의 '소멸(부재)'은 아들이 갖고 있던 공간만큼의 거리를 부부에게 만들어 놓고 그 공백은 빵가게 주인(으로 상징되는 외부적 세상)과의 소통마져 이그러지게 만든다. 분노에 휩싸인 채 부부는 빵집으로 달려가 주인장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어 대지만 결국 그들은 허기진 배를 갓구운 롤빵과 중년을 넘은 빵집 주인의 삶의 회한과 무력감에 대한 이야기(말)을 통해 자신들 사이에 놓였있던 공백을 봉합하며 또다른 새벽(세계)을 맞이하게 된다.

 

결혼을 한지 이제 갓 한 달이 조금 넘은 부부가 있다.
'사랑'의 결실인 '결혼'은 그대로 행복으로 직행는 관문이 될 수 있을까. 사랑 이후에 찾아오는 결혼은 어찌보면 '저주스런 행복'은 아닐까. 아니 행복 앞에 붙어있는 저 어둡고 습한 수식어를 떼어버리지 않으면 여전히 두 사람은 자신들이 이제껏 걸어온 각자의 세계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채 '그냥' 함께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식의 상실 같은 실제적 사건이 아닐지라도 상징적 '통과제의'를 통해 혼자였던 '저 세계'에서 함께하는 '이 세계'로-물론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상실'과 '소멸'을 경험하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이기도 하다.-로 옮겨와야만 한다. 빵가게를 습격하는 것이 다소 이질적이라면 「태엽감는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이나 「코끼리의 소멸」을 끌어들이면 충분히 그럴듯 해진다. 어느날 집을 나가버린 고양이. 아내는 "당신이 죽인 거야"하며 어둠에 쌓인 거실에 앉아 소리 죽여 운다. '코끼리'의 소멸은 이성적 관계맺기를 통한 한 세계의 떠남을 보여주진 않지만, 여기서도 '코끼리'의 소멸은 동시에 자신의 내부에서 무언언가의 상실로, 주인공은 그 사건 이후부턴 그 이전과는 도저히 닿을 수 없을 듯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버린다.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이런 상실과 부재라는 단속적 사건들을 통해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 사람들은 다른 말로 그것을 '성숙'이라 부르곤 한다.

역시 억측이 많이 끼어있긴 하지만 『빵가게 재습격』은 카버의 '오마쥬'이자 하루키 자신의 장편에 대한(『태엽감는새』, 『1973년의 핀볼』등에 대한 '몽타쥬'이기도 하다. 얇은 분량의 책이고, 여전한 하루키 문장들의 흡인력은 한 두 시간 내에도 책을 끝낼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난, 며칠씩 뜸을 들이며 한 꼭지 한 꼭지씩 읽어나갔다. 너무 무겁지만도 않다. 표제작인 「빵가게 재습격」도 그러하거니와 「패밀리 어페어」「로마제국의 붕괴·1881년의 인디언봉기·히틀러의 폴란드 침입·그리고 강풍세계」와 같은 단편들은 하루키만의 독특함과 유머러스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단편들이다.

 

뭐랄까, 『빵가게 재습격』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분명)도움이 되는' 책이자 동시에 이미 책 자체가 카버를 떠올리 수 밖에 없는 그런 단편모음집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 - 한 젊은 역사가의 사색 노트
이영남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감시와 처벌』을 언제, 어떤 계기를 통해 읽게 되었는지 지금으로서는 기억할 수 없지만 그 책을 읽고난 뒤의 '충격'이랄까, '전율' 같은 것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독서가 주었던 몇 안되는 '사건'들 중의 하나임엔 분명하게 각인돼 있다. 『다시쓰는한국현대사』, 『전태일평전』, 『숙명의 트라이앵글』 등이 이 순간 생각나는 그런 '독서적 사건'의 지층들이었다. 그럼에도 그와의 인연이 기묘했던 건 위의 세 권의 책들이 순수한 의지와 결정에 의해 선택되었다면, 공대생이었던, 더우기 지금과 같은 독서편력을 갖고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 '푸코'라는 저자를, 『감시와 처벌』이라는 책을 어떻게 접할 수 있었는지 스스로조차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파놉티콘'이란 '원형감옥'에 대해서 수업 중에-전공이 건축이었기에-스쳐지나가듯 언급이 있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었던 건 아닐까...란 생각은, 그럴듯하지만 확신할 순 없다.아무튼 '푸코'는 나에게 '마르크스'보다 먼저 도착한 철학자였고 지금에와선 '지젝'과 나란히 서가에서 자신의 존재를 가장 크게 외치는 '철학자'가 되어버렸다.
 

『푸코에게 역사의문법을 배우다』는 '역사'라는 하나의 창을 통해 바라 본 '푸코'라는 '미시사'다. 그렇기에 푸코의 전체상을 조망할 순 없다.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두 권에 시선이 집중된 탓에 보다 철학적 색채를 띠고 있는 『지식의 고고학』이나 『말과 사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안내서'가 되기에도 부족하다. 그것은 물론 '푸코'가 성취한 학문적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었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푸코와의 인연의 시간을 생각하면 다소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에리봉'의 『미셸 푸코』를 읽어보지 못했던 관계로 '푸코'라는 인물의 실존적 삶을, 그리고 푸코가 천착했던 '이성과 비이성', '정상인과 비정상인'이는 근대의 이면들이 '푸코'의 개인적 삶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주제였음을 이 책을 통해서, '이제서야' 알게되었던 것은 재미난 '수확'이었다. 

 

상류계급에 속했던, '일류'라는 엘리트 코스를 무난히(!) 밟아나가는 '푸코'는 그럼에도 자신의 계급에 동화되지 못하는 '광인'이었으며 '동성애자'라는 '비정상인'이었다. 푸코의 위대함은 그러한 자신의 '소외'와 '비동일성'을 주관적 문제로만 보지 않고 그것이 '소외' '비동일성'이 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연구함으로써 '근대적 이성'이 어떻게 '타자화'와 '배제'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는가를 날카롭게 비판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의 비판은 단지 학제적 담론 속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정보모임(GIP)과 같은 실천적 활동을 통해 '사르트를'를 잇는 '실천하는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이기도 했다.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자신이 받아낸 시간의 양은 제각기 다르다. 충분히 무거워질만큼 무거워진 나의 바구니는 점점더 '권력' '담론' '실증적 연구' '저항' 이라는 기표들, 그리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인문' '철학'이라는 주제들이 공허한 것은 아닌가라는 회의가 짙어지게 한다. '권력은 획일화되거나 가시적인 것이 아닌 사방에 배치되어있고 따라서 저항은 한 곳에 집중될 것이 아니라 여러 층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은, 이성이 광기를 어떻게 배제해왔고 정상은 비정상을 어떻게 타자화 시켰는가' 등등은, 월요일 아침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순간 더이상 '소통' '유통'되지 못하고 방부제로 살균처리 되고 만다. 아니 오히려 일상에서 '푸코'는 '짐바브웨'의 대통령에 대하 말하는 것이(솔직히 나도 모른다) 좀더 현실적일만큼 낯선 존재다.

점심을 먹다가, "광기와 비정상은 이성과 '지식-담론-권력'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야"
"뭐라는 거야, 그럼, 연쇄살인자들은, 걔네들 미친거 아니었어? 그런 범죄자들은 싹다 죽이거나 병원에 가두는 게 그럼 잘못이야!"   
뭐, 이런 정도의 대화는 유통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책은 끝까지 읽었고 우연치 않게 마지막에 '얼 쇼리스'가 말한 대목을 읽고서야 '그럼에도'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다짐할 수 있었다.

 

"(...) 인문학은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서, 제대로 생각할 수 있기 위해서, 외부의 어떤 '무력적인 힘'이 여러분에게 영향을 끼칠 때 무조건 반응하기보다는 심사숙고해서 잘 대처해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할 공부입니다. 인문학은 우리가 '정치적'이 되기 위한 한 방법입니다.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정치를 '가족에서부터 이웃, 더 나아가 지역과 국가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활동'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부자들은 이런 넓은 의미로 정치를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력을 즉각 사용하지 않고 협상하는 법을 배웁니다." (p32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동하는 공포 산책자 에쎄 시리즈 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개인적 의식의 지근거리에 있는 것들만 펼쳐보아도,

일본 도심의 한복판에서 일어나 옴진리교의 사린가스 테러,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러시아와 서유럽, 중동에서의 셀 수도 없이 자행되는 테러, 또다시 일본의 쓰나미와 후쿠시마 원전사고, 가장 가까이는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인간이 살기에 안전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북유럽, 노르웨이에서의 총기 테러사건까지. 가히 자연적·인위적 파국의 조종이 울리가라도 한듯 전세계가 불안과 공포에 잠겨있다. 어제 본 저녁 뉴스에서는 미국 남서부 지역의 정전사고로 600만명이 넘는 주민들이 순간적인 암흑의 세상을, 이성과 과학으로 덧씌운 문명이란 외피가 얼마나 얇고 허약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까지 있었다. 환경적 재앙을 배제한, 적어도 문명 자체가 배태한 이런 공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더 복잡하고 먼 거리에 있는 시스템들에 의존하며 따라서 심지어 아주 작은 고장, 사소한 문제점만 생겨도 거대하도 걷잡을 수 없는 악영향이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삶에 가해지는" 장소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성이라는 무기를 들고, 신과 자연으로부터 절연한 채 외부적 공포를 조율하고 억제하기 위해 달려왔던 근대의 진보적 역사를, 바우만은 결코 직선적인 발전으로 보지 않고 단지 동일한 지점을 향해 '우회'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그렇게도 멀리 돌아와 마주친 현재와 근미래는, 과거의 자연적 재난이나 신(화)적 파국이 줄 수 있는 공포의 범위를 뛰어넘어 현실적인 '종의 종말'을 목전에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기실 바우만은 '유동하는' '액체' '근대' '공포' 등을 표지삼아 자본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우울한 전망을 그려나가고 있지만, 어쩐지 공포 보다는(공포는 두려워 할 특정한 대상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안'이라는 어휘가 현대인의 실상에 보다 근접해 보일뿐 아니라, '공포'라는 투시경을 통해 바라 본 '세계화'의 병폐는 이제 그닥 새로울 것도, 그로인한 각성이나 자각도 불러오지 않을 정도다. 내가 느끼는 '공포'는 바우만이 펼쳐 놓았던 공포들, 테러와 환경재앙, 그로인한 전쟁과 과다한 안보의 일상화, 라기 보다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되는 거대한 지진과 쓰나미, 총기테러와 같은 숱한 재난들은 결국, 짧은 애도와 흥분의 시간이 지난 뒤엔 '나와는 무관한' 종류의 '사건'이 되고마는 현대의 시스템이다. 이미지가 실제를 압도한다고, 가상이 실제를 구축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이미지는 현실보단 환상과 가까워 보이고 그런 환상들은 어느정도 나와는 거리를 둔채 발생하기 때문이다. 파국이 나에게 닥치지 않는 한, 우리는 그런 재앙을 잊을 수 있는 다양한 문화와 상품을 소비하고, 그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한다.

그러는 사이 자본주의는 끄떡도 하지 않고 순간적인 불안정을 '평형회복'한다. 오히려 "널리 퍼진 환경재앙은(뿐 아니라, 각종 테러와 전쟁, 살인 사건 등도 포함 된다.) 자본주의를 위험에 빠트리기는커녕 이제것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자본주의적 투자공간을 펼쳐놓아 자본주의에 새 힘을 불어넣으리라 보아도 무방하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p42)

이런 암울한 시대를 무기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한다면, 역시 『유동하는 공포』는 존재의미가 없었을테고, 출간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시적이고 더이상 방어할 수조차 없을 것처럼 견고해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바우만은 '병 속의 편지'를 만들어 세상에, 미래에 띄워보내려 한다. 예언자(지식인들)의 역할은 다가올 파국을 경고하고, 그들이 예언한 미래가 결코 도래하지 않도록, 언젠가 어디선가 자신들의 띄워보낸 '병 속의 편지'를 읽고, 자각하고 행동하는 이들(민중 또는 인류전체)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물론 너무나 미약하고 자가 안위적 처방일 순 있겠지만 한편으론, 그조차 하지 않는다면...이란 생각을 떨쳐낼 수없다. 그리고 바우만이 주장한 예언자(지식인)의 역할 상대자인 나와 우리는, 역시 그들이 송신한 메시지를 수신하고 해석하고, 실천하는 -그것이 아무리 하찮고 미비한 것일지라도- 것밖엔 도리가 없지 않을까. 약간 맥락이 다르지만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지젝의 말을 좀더 인용해 보자면,

"파국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갖출 때까지 행동을 미룬다면 그러한 지식을 획득했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을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가 의존하는 확실성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다. 참된 행위는 그에 관해 완벽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떤 투명한 상황 속의 전략적 개입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참된 행위가 지식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

인식과 실천의 선후를 지적하는 내용이지만, '읽기'를 통한 자발적 노력 없이, 휘황한 소비문화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읽기'를 배제한 '인식'일 불가능하듯, '읽기' 없는 '실천' 또한 요원한 희망일 수밖에 없다.

'병 속의 메시지'를 수신하는 것, 그건 어쩌면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갖는 윤리적 권리이자 의무는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