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팅한 달력을 보니 검게 물든 숫자가 다섯 개, 그나마 하나는 스마트폰에 대한 예행연습 차원이었으니 12월은 도무지 분발을 못한 셈이다. 무기력했던 탓인지 반대로 무력함조차 느끼지 못할만큼 분주했던 탓인지, 아마도 그 양자 사이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사이 어느덧 이렇게 멀리까지 와버리고 말았다.

 

이웃님의 말씀대로 한 해를 나름 정리해보아야 할텐데, 조급하다.

작년부터가 아니었을까. 크리스마스와 각종 연말회식들, 숱한 만남과 헤어짐들이 만들어내는 소란스러움 때문이라도 연말은 역시 '연말'의 분위기를 연출해내곤 했다. 하지만 그런 유난스러움조차 의미없는 통과제의처럼, 단지 어쩔 수 없음에 이끌려 지나쳐야만 하는 의무적 행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마치 그런 '고단함'을 통과하지 않고선 새로운 한 해가 영원히 도래하지 않기라도 하듯, 모두가 술과 기억조차 하지 못할 말들을 토해내며 지나 온 시간에 대한 천도재를 올린다. 그뿐이다. 단지. 성탄절과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되는 흥분과 설렘도, 시끌벅적한 여흥과 살풀이도 모두, 덤덤하게 다가온다. 서글픔이나 후회도 덩달아 줄어든다. 나이를 먹었다는 반증이겠지만 그 또한 나쁘지만 않다. 무뎌지는 세월들 너머로도 새해는 어김없이 도착하기 때문이다.

 

그래, 조급, 하다.

몇 번의 망년회를 겪고도 잊혀지지 않을만큼 2011년의 마지막 한 주, 한 해의 하중이 한 점으로 집중된다. 부득이(?) 집으로 올라온 건 다음날 입을 옷을 챙겨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일 집을 나서면 금요일 밤, 최악의 경우엔 토요일에나 이곳에 있게 된다. 야근을 하지 않고선, 새해 첫 날을 사무실에 홀로앉아, 손을 호호 불어가며 자판을 두들기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 몇 장의 사진을 몰아찍고 포스팅을 시작하려는 찰나 '나꼼수 특별공지' 다운로드가 완료된다.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린다. 또한 내일은 사무실 대청소로 다소 이른 출근을 해야만 하고...후~~~

 

 

하루종일 끊이지 않고 쏟아져 나오는 업무에 요상스런 퇴근길.

싱크대에 쌓여있는 그릇들과 베란다에 널려있는 세탁물들을 처치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쌀을 씻고, 샤워를 하고. 빛(아마 달빛이었나보다)의 속도로 하나들 눈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했음에도 밥을 먹고 모니터 앞에 앉으니 벌써, 열시가 가깝다. 트윗에도 올린 것처럼 적어도 이런 날만큼은 '각시'는 고사하고 '우렁이'라도 한 마리 있었으면 싶다. 아무래도 봄이 오고 날이 풀리면 어디 논두렁에라도 나가 보아야겠다. 우렁이 몇 녀석을 납치해 집으로 데려오려면. 아니, 아니다. 우렁이가 밥과 청소는 해주겠지만 그러고나면 분명, 자기와 놀아달라며 때를 쓸지도 모른다. 돈도 더 벌어오고 그럴러면 야근도 더 해야할지 모른다. 아! 도무지 헤갈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딜레마.

 

 

 

 

백가흠의 『귀뚜라미가 온다』

시차가 느껴졌다. 오히려 『조대리의 트렁크』와 동시에 읽고 있던 『가나』에 눌리는 형국이다. 2005년 7월, 그 시절이라면 인도의 어디메쯤 있었을 때이지만 만약 당시 『귀뚜라미가 온다』를 만났더라면 지금과는 역시, 다르게 느껴졌을 게 틀림없다. '배꽃이 지고'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독자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게 만든다. 소설 속으로 뛰어들어 가서라도 '과수원집 주인'을 멍석말이를 하고 싶을정도였으니. 하지만 이례적으로(?) 이 책의 압권은 평론가 김형중의 해설이다. 욕망과 폭력이라는 그물로 얽혀있는 소설집이지만 해설을 읽고나서야 그 그물들이 얼마나 촘촘하고 단단히 얽혀 있는지를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여직원들에게 요사이, '한강'을 읽으라 자주 권한다. 난, '김연수와 하루키' 못잖게 '한강'을 좋아할 수 있는 여자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자신이 있다. 문제가 없진 않다.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한강'이라 말할 때, '漢江'을 먼저 떠올리고, '한강'을 권하는 이들이라곤 유부녀와 곧 유부녀가 될 분들 뿐이다. 치명적, 사랑은 그녀의 소설로 이미 충분하다.

 

 

 

 

 

 

좀더 나이를 먹는다면 달라질까. 스티븐스의 그 꼿꼿한 명예와 자존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음에도 나에겐 그 나날들 속에서 스티븐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과거의 시간을 길어올려 화려하게 각색하고 자위하는 일밖엔 없을거라 생각이 든다 . 하지만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소위 고전이라는 것들을 읽었을 때 느꼈던 분위기를 이 책에서도 받았다. 역시나 스토리는 소설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전부가 될 순 없다.

(하루키는 동시대 일본 작가의 책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잡문집'을 읽으면서 알았다. 하지만 동시대 일본인 작가인 '이시구로'는 예외란 사실을. 하루키의 만들어내는 자장은 자연스레 '이시구로'에게까지 인력을 작용시킨다.)

 

 

 

 

문학이 아닌 문학 너머의 사회에 대한 시선들조차 그는 다감하다. 동시에 날카롭다. 논술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교재가 있을까 싶을정도다. 신형철은 예리하면서 따듯하다. 정신분석과 철학적, 문학적 이론들로 무장했음에도 평로가이자 한 명의 '독자'로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들지 않는다. 김현선생이 그렇듯 '평론'이 '문학'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가 '신형철'이 아닐까. 다만, 그의 능력과 글쓰기의 場이, 그의 학벌과 맞물리면서 곱게만 보이지 않는다. '문동'이라는 '메이져'를 벗어나도 그라면, 자립할 수 있을 것이다. '문동'이 '악'은 아니지만 적어도 '선'은 아니기에.

 

 

정치의 바람이 거세진다. 정봉주 의원의 구속과 선관위 디도스 공격은 태풍의 눈이 되어 바람을 한층 요동치게 만들 것이다.. 『느낌의 공동체』에서 가장 먼저 읽은 글이고 가장 먼저 옅은 밑줄을 그어 본 문장이다. '태풍의 눈' 속에서 그는 좀더 선명한 모습으로 보일 것도 같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살아야 할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그렇게 살았고,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죽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단해 그렇게 죽었다. 나는 늘 문학은 천박한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에 맞서 숭고한 '몰락'의 의미를 사유하는 작업이라고 믿어왔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간 노무현의 몰락이 내게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문학적이다." (느낌의 공동체 p185~186)

 

 

자기말한 불쑥 뱉어내고 끝낸다.

이웃님들 관리도 들어가야하는데...

아직, 2011년, '남아 있는 나날'들이 있으니까요.

 

                                                (http://redneck96.blog.me/에서 옮겨온 페이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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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
정용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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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서야 서정적·낭만적 언어의 세계(소설) 또한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용한 방편이자, 인간적 존재로서 숙명처럼 떠안아야만 하는 고독과 결핍, 욕망 그로인한 관계의 부조리와 폭력 등을, 일상이라는 수면아래 감추어져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 속성들을 인식할 수 있는 길'way'로 받아들일 수 있다. 반면 20대엔 오로지 이성적·과학적 언어만이 세상을 바꾸고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적 세계라 '오해'했다. 둘은 선후의 관계도 아니요, 가치의 고저로 비교할 수 있는 이분법적 세계도 아닌 동일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병렬적, 상보적 요소일 뿐이다.

 

 

서론이 거창했던 건, 그럼에도 내가 읽는 소설이란 대부분 일차적 검증이 끝난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평단과 대중이 갖고 있는 일정한 체를 투과한 책들을 손에 잡았고 나 또한 그 체의 크기만큼의 공감과 감동을 받아왔다. 변명이 없는 건 아니다. 주어진 시간과 자본은 무한하지 않았고 그에 반비례해 읽어야 할 책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실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테다. 문학잡지와 계간지를 읽으며 신예작가들의 작품을, 또는 '기하급수적',으로까지는 아니어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는 각종 '문학상' 수상작들을 동시간적으로 읽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한국인 모두가 김윤식 선생이 될 수는 없다.(그런 세상이 온다면 문학은 더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김훈과 박민규, 김연수와 김애란, 한강과 백가흠, 오스터와 매카시 등등. 모두가 중간 어느지점에서 만나게 된 연緣들이었고 그 지점으로부터 과거와 현재의 양방향으로 확장된 작가들이다. 그만큼 더디게 시작한, 그리고 소설에 대한 다소의 불신과 주저가 낳은 결과이다.

2010년 늦가을, '달'님을 통해 '최제훈'이란 작가의 '첫'소설집을(『퀴르발 남작의 성』) 읽었다. 우연치 않은 계기가 아니었었도 결국은 한번쯤 손에 잡았을 것만 같은 상상이 들지만 결국 확신 없는 사후적 추측일 뿐이다. 한 작가의 '첫' 작품을(고인이 된 작가의 작품을 제외하면) 읽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처음'이 주는 신선함과 호기심은 자칫 시간을 허비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며 이는 '처음'이 아니어도 '낯선' 작품과 작가를 멀리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제훈'작가는 '최동훈'감독과 친인척이 아닐까 싶을만큼 뛰어난 상상력과 치밀한 구성력으로 단번에 나의 전작주의 작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는 메리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우연'을 '운명'으로서 받아들이기엔 세월의 흔적이 너무 깊게 아로새겨져 있다. 소설작품에 대한 읽기는 역시 '선택과 집중'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했고 '새로운' 작가들이란 이미 검증을 거쳐 당대 한국문학의 한 축을 견인하고 있는 작품들 뿐이었다.

 

 

2011년 초겨울, 난 또 한 번의 '첫' 작품집을 낸 작가를 만난다.

정용준의『가나』

'웹진문지문학상' '젋은작가상'이란 명성(!)도, '알라딘' 메인페이지에 올랐을 때도 '정용준'이란 작가는 적어도 나에겐 여전히 등단하지 못한 이름모를 작가일 뿐이었다. "가장 기대되는 젊은 작가"란 진부한 띠지는 그 진부함만큼 편견을 만들었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의 문장들"이란 상찬도 81년생이란 작가의 나이를 본 순간, 과도한 상업적 카피정도로만 느껴졌다. 책의 첫 날개에 실린 작가의 이력인 "'텍스트 실험집단 루' 동인으로 활동 중"조차 '아니 벌써 그룹과 파벌을 형성하려 드네, 이건 겐지가 그토록 혐오했던 문단의 병폐아냐. 적어도 '죽음'을 노래한다면 절대 고독 속에 자신을 투기하여야 하는 거 아닐까'하는 오해로 작동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역시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한다고 했던가. 더우기 "글의 힘을 의심하지 않"는 작가라면.

 

 

 

 

 

 

 

「떠떠떠, 떠」,「가나」는 유치한 표현이지만 '슬픈 사랑의 노래'라 부를 수 있을만큼, 비록 각자의 상처로부터 모든 관계가 절단된 세상에서 또는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절대지의 세계로 들어가버렸음에도 '사랑'이라는 울림을 아름다운 노래로, 비록 더듬거리며 분절된 언어일지라도 "떠, 떠떠, 떠떠, 떠떠떠, 떠, 떠, 아아, 아아아하아아, 아아아, 아, 사, 사, 사아, 아, 아아, 아아아, 라라, 라라라라, 라, 라라라, 아, 아야앙, 해"라며 들려주고 있다.

 

 

'정용준'에 대한 확신은「벽」을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일명 '폭력의 역사'

폭력적 법과 사회가 먼저였을까, 아님 인간의 폭력적 본성이 그런 사회를 잉태했을까,란 형이상학적 물음 이전에 적어도 폭력은 인간을 아무런 의지도 희망도 없는 '벽'으로 만들어버리는 동시에 인간을 왜곡된 형태일지언정 하나의 주체로 존립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반장21'은 무차별적 폭력과 수탈을 감내하며 '벽'이 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희망이란 결국, 또다른 누군가를 '벽'으로 만들지 않고선, 폭력의 중지나 정지가 아닌 폭력의 연쇄와 유전을 통하지 않고선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9'의 죽음이 인간적 존엄을 상징하지만 결국 그의 존엄이 섬과 사회의 폭력을 중지시키지는 못한다.

소재의 신선함과 폭력적 묘사는 해설자의 말대로 그를 백민석, 백가흠, 편혜영의 계보에 넣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소외와 사회적 냉대로 인한 가학적 망상이 낳았던「먹이」또한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구름동 수족관」「사랑해서 그랬습니다」등에서 보여주는, 이 가열찬 세상에 '사랑'이라는 것이 아직도 어떻게 작동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글이라는 매개를 통해 인류적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정용준'은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벌써 장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또, "소설을 칠백 편 정도 쓰고 싶다'고도 한다.

그리고 난, 정용준을 기억하려 한다.

설마, '칠백 편'은 쓰지 못하겠지만, 읽고 쓰기에 주저함과 회의가 들지 않는 그는 쓰고, 나는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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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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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보단 영상적 이미지에 더 매혹되었고 때문에 소설을 포함한 문학보다는 영화에 더 관심이 많았던, 반항적이고 외골수의 소년이 있었다. 어느날 아버지의 서가에 꽂혀있던『백경』읽고 일찌감치 항해사의 꿈을 키운다. 청소년 시절의 막연한 이상이나 바람이 아니었다. 소년은 항해사란 꿈을 위해 '국립 전파 고등학교'에 입학해 통신시가 되어 머나먼 대양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입학과 동시에 학교는 취미가 되어버리고 성적은 늘 바닥을 전전한다. 세월은 바다로부터 점차 그를 멀어지게 했고 어찌어찌 졸업과 동시에 '텔렉스 오퍼레이터'라는 셀러리맨으로서의 자리로 그를 데려다 놓았다. 이십 대 전후의 그에게, 누구와도 쉽게 협조할 줄 몰랐던 일본의 또다른 '홀든'에게, 조직에서의 봉급쟁이 생활이란 그야말로 악전고투일 뿐이었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입사한 지 삼 년이 못돼 회사는 기울기 시작했고 샐러리맨으로서의 회의도 동시에 찾아온다. 그러다 '문득' 소설이란 걸 쓰려한다. 단지 연필과 노트, 사전이면 족할 뿐 더이상의 자본은 들지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틈틈히 소설을 썼고 문예지에 출품을 했다. 그리고 그는 1967년『여름의 흐름』으로 아쿠타가와 상 최연소 수상자라는 영예를 얻는다.  '마루야마 겐지'다.
 

 

 

아버지의 영향과 외동아들이라는 가정적 환경 때문인지 소년은 일찌감치 문학에 매료되었다. 다만 당시의 일본문학이 아닌 스탕달과 도스토옙스키 등 미국과 유럽의 고전을 주로 읽었고 음악의 세계에도 좀더 깊숙이 빠져든다. 학교에 대한 불만은 있었겠지만 내성적인 성격에 표출적인 저항이나 반항보다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그 속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던 아이였다.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채 결혼과 동시에 '피터 캣'이란 재즈바를 운영하며 하루종일 재즈를 듣고 칵테일과 음식을 만든다. 그러던 맑게 갠 화창한 오후, 야구장 외야석에서 맥주를 마시며 플레이를 보다 갑자기 '소설을 쓰자'고 결심한다. 가게를 운영하고 틈틈히 소설을 써나갔고 그것으로 그의 인생은 서른이 되기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다. 

 

 

 

하루키의『잡문집』을 읽는 틈틈히 겐지의『소설가의 각오』를 읽었다. 스무 권이 넘는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왔고, 단 한 권의 겐지 작품도 읽지 않았다. 하지만 기묘할만큼 일본을 대표하는(?) 두 작가의 등단은 너무도 급작스럽고 일반인의 시각에선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어릴적부터 쌓였던 문학적 토양을 고려한다 해도 본격적인 문학적 수업이나 사사도 받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날 문득 '소설을 써볼까'하는 결심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의 반열에 올라있다는 것이. 아마도 60~70년대에나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하지만 겐지와 하루키의 문학적 그리고 일상적 세계는 극단적이라 할만큼 대척점을 향해 갈라진건 아닐까란 생각이다. 어찌보면 문학적 場으로 들어가지 않고 '변방'에서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는 작가들이지만 아마도 겐지에겐 하루키의 포지션조차 지극히 세속적이고 혐오감을 불러오진 않을까. 그만큼 '마루야마 겐지'라는 작가는 예외적이고 외골수이며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소설가의 각오』를 읽는 건 심히 불편하다. 어쩌면 불쾌하기까지 하다. 서른이 넘어『호밀밭의 파수꾼』을 다시 읽으며 느꼈던 '홀든 콜필드'에 대한 불편함과는 농도가 다른 불편함이다. 여성에 대한 비하는 물론 자신을 찾아오는 독자들과 편집자들에 대한 편집광적인 비난들, 자신의 문학 외부에 놓여 있는 대부분의 동시대적 문학에 대한 비판들은 일정부분 동의할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지나친 나르시시즘에 빠진 작가의 외퉁수적 시선이 공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으로서만 말한다'라곤 하지만 에세이 또한 작가가 잉태한 자신의 작품임을 감안하면 『소설가의 각오』는 겐지의 순수 문학적 작품을 오히려 멀리하게끔 만들 정도였다.

 

어제 배달된 책중엔『달에 울다』가 포함되어 있다. 역시 그럼에도였다. 겐지의 일반인에 대한 성토는 그렇다쳐도 일본 문학계 전반에서 펼쳐지고 있는(비단 당시의 일본만의 풍경은 아닐터이다), 점점 세속화·상품화 되어가는 작가와 문단에 대한 일침은 분명 타당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북알프스의 산속에 들어가 작품을 쓸수 있는 최소한의 생계비만으로, 마치 수도승이나 '니어링부부'를 연상시키는 탈세속적 삶과 그 속에서 겐지가 추구하는("내게 유일한 관심사는 소설 언어라는 가장 인간적인 도구를 마음껏 구사한 소설을 통하여,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란 생물의 핵심에 얼마만큼 욕바할 수 있는") 문학이란 도대체 어떤 모습의 문학일까(책을 읽는 내내 그와 가장 근접한 작가가 떠올랐으니, '김훈'이다) 궁금했고, 세상과 인간적 관계를 져버린 채 오로지 홀로됨을 자처하며 끊임없이 문학의 광맥을 찾고자 하는 겐지, "모든 예술이 그렇지만 문학 또한 얼마만큼 개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에 따라 성패가 결정난다. 불안이나 고독에서 슬픔과 분노가 태어난다. 그 벽을 돌파한 곳에 나 자신의 혼이 있다. 거기에 표현할 가치가 있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까 불안과 고독이야 말로 창조하는 자들의 보물이다."라고 말하는 작가가 쓴 작품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막의 바람 같이 습기 없는, 쨍쨍한 태양빛 아래서 이글이글 작열하는 소설이란 생각이든다.『달에 울다』의 표지에 실린 '겐지'의 얼굴은 '30 days of night'에 나오는 뱀파이어를 연상시킬만큼 섬뜩하다. 지구의 적도와 극지방을, 자연 앞에 무릎꿇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외소함, 을 뚫고 뿜어져 나오는 작가의 글쓰기와의 치열한 사투를 본격적으로 바라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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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갑작스레 머리 위로 몰려오는(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다보니 이렇게 하늘이 잔뜩 내려오는 날이면 말그대로 하늘은, 란다 문을 열고 손을 내밀면 언제라도 잡힐듯 시각적 왜곡을 낳곤하다) 구름과 함께 서둘러 어둠이 찾아온다. 줄줄이 늘어서 있는 직육면체의 건물들은 시각이 퇴화된 물고기들이 스스로의 빛과 촉각으로 어두운 심해 속을 부유하듯 하나둘. 모두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불빛을 밝히며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해 간다. 똑같은 크기, 똑같은 밝기, 똑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돌아온 이들의 세계는 그러나, 결코 같지만은 않을 게다. 그리고 풍경만으로도 겨울이 임박했을음 말해주듯 차가운 어둠 속에 빛나는 인공조명들은 더이상 가족의 따뜻한 체온으로 상징되지도 못할 것이다. 적어도『조대리의 트렁크』를 읽고난 후에 보이는 여기Here의 세계에서는.

  

저 불빛들 중 어느 곳에선 '눈과 귀가 없이' 태어난 아이가 바깥세상으론 들리지도 않을 가련한 울음을 멈추지 않거나, 도시의 밤이 유혹하는 좀더 화려한 불빛을 좇아 나가버린 부모를 애타게 기다리며 허기진 배를 움켜진 채 침대 한켠에 웅크리고 잠을 재촉해야만 하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하루종일 남자의 전화만을 부여잡은 채, 어둠과 함께 찾아올 주먹질과 폭력을,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일상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여인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곳은 소설과 영화가 보여주는 상상의 세계, 즉 저기There만의 장소가 더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조대리의 트렁크』는 2007년과 그 이전의 세상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아니, 오히려 그 때보다 좀더 임팩트 강한 지금, 여기의 세계이기도 하다. 

 

백가흠을 때늦게 읽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인 '굿바이 투 로맨스'를 읽기 바로 직전에 '알라딘'에 들어가『귀뚜라미가 온다』도 바로 구매를 해버렸다.(내일쯤 배송이 되겠지) 이미 김이설과 편혜영은 세상사는 일의 '고단함'과 '지독함'을 '치열하게'보여주었고 덕분에 그만큼의 내성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백가흠이 보여주는 세계는 뭐랄까, 그래 '리얼'하다. 바로 이웃집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살고 있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큼. 나와 충분한 거리감이 유지되기에 뉴스나 상상 속 세계에서나 존재할 듯 싶은, 그래서 적어도 일반적인, 상식적인 사람들의 세계에는 발들이지 못할 것 같은 인물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엔 그 거리의 간격이 붕괴돼 버렸다. 그게 내가 네가 살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다. 전부라고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저들은 세계의 주변부이면서 동시이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벌거벗은 생명에게는 그 배제에 인간들의 공동체가 기반한다는 독특한 존재상의 특권이 주어진다"는 '아감벤'의 말처럼. 
 

 

 

 

아무튼 당분간은 커다란 아파트 건물에서 빛나는 저 자그마한 불빛들을 바라볼 때면 나도 모를 의심과 불쾌한 상상을 떨궈버리지 못할 것만 같다.
 

 

 

 

1950년대의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홀든 콜필드'가 온몸으로 뿜어대는 반항과 분노는 단지 십대라는 젊음이 만들어내는 순간적 일탈이 아닌, 본능적으로 반응한, 세계에 대한 저항은 아니었을까.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소비적 시스템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 미국적 환상에 대한 '샐린저'식 분노. 권위적 교육체제와 관습적 인간관계가만들어내는, 인간적 본성으로부터 점점더 멀어지게 되는 세상에 대한 '무력한' 외침이 '홀든'이라는 인물로 형상화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결국 홀든이 꿈꾸었던 '호밀밭'은 어디서도 존재할 수 없는 꿈같은 장소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변할수록 인간은 누구나 '여기'가 아닌 '저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나는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은 나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없다. 그러한 기묘한 장소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느 맑은날 아침에~ 96p

더이상 나와 세계가 불화하여 나와 자신이 분열되는 여기가 아닌, 나를 나로서 인식하고 자각할 수 있는 '기묘한 장소' 말이다. 여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언제나 저기를 꿈꾸는 이들을 누군가는 이상주의자라 할지 모른다. 또는 홀든과 같은 미성숙한 청소년이거나. 하지만 '거기'가 결코 물리적, 실제적 공간이 아님을 모두가 알지 않는가. 순간이나마 저기를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는 매개물의 하나가 '책'인 것도 같다. 언어와 문장은 짧은 순간, 익숙한 주변의 공기를 낯설게 만들어 평소 인식하지 못한 자신을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데려와 대면하게 만든다. 또한 일상에 가려 볼수 없던 세계를 찢어발겨 쉽게 드러나지 않던 사람들과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여기'의 변화를 꿈꿔볼 수 있게 자극한다. 단지 책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일상으로서의 '생활'은 언제나 여기에 붙들려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여기를 벗어나 저기로의 이동은 사회적 폐배이자 탈선이라 세뇌하고 겁준다. 저기는 '벌거벗은 사람'들의 비참하고 냉혹한 실제 현실이기도,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순수한 초월적 관념의 세계일 수도 있다. 인간적 삶이란 비록 여기에 발딛고 있다 할지라도 저기를 꿈꾸며 그리고 그 둘의 거리를 줄이며 하나의 공동체적 공간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Here and There is 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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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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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TA'가 강행처리 되었다. 결국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서도, 막상 통과되었다는 뉴스를 접하니 뭔가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다. 의회에서의 처리과정이나 정치권의 반응에 대해선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귀가하면서 사들고 온 차가운 캔맥주를 빈 속에 쏟아붙고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초겨울의 이른 어둠은 이미 방 안에 꽉꽉 들어차 있다. 어둠과 함께 창틈으로 몰려온 먼 대륙의 밤 공기 속에 눈을 뜬다. 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세면을 한 후, 매트릭스의 세계로 접속한다. 최루탄에 몸싸움, 재계의 환영메시지와 '분노' '재앙' '테러' 등 날선-그 날은 분명 여야를 불문하고 현 정치권 전부를 베어리게 될 게다- 어휘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FTA'라는 실체있는 대상이기에 '공포'로 다가와야 하나, 솔직히 아직은 '불안'쪽에 가깝다. 과연 'FTA'라는 '괴물'이 어떤 식으로, 얼마나 강력하게 현실에 뿌리내려 우리네 소소한 일상을 뒤흔들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공포라면 실체를 제거하면 될터이나, '불안'은 싸워야 할 대상 자체가 안개에 휩싸여 쉽사리 가시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문학'은, '이야기'는 계속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은 계속 되어야'만' 할까?
 

 

 

 

"문학은 대부분의 경우 현실적인 도움은 되지 않는다. 일례로 전쟁이나 학살이나 사기나 편견을 논에 보이는 형태로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무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역사적이 즉효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문학은 전쟁이나 학살이나 사기나 편견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런 것들에 대항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물론 거기에는 시행착오가 있고, 자기모순이 있고, 내분이 있고, 이단이나 탈선도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문학은 인간 존재의 존엄의 핵을 희구해 왔다. 문학이라는 것 안에는 그렇게 계속성 안에서(그 안에서만) 언급되어야 할 강력한 특질이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잡문집 29~30

 

'FTA'라는 강력한 충격만 아니었다면, 좀더 가볍게, 한없이 기분 좋은 상태로 포스팅을 하려 했었다. 많은 대중성을 지녔음에도 분명 하루키에 대한 호불호가 있고, 그의 팬들에게서조차 이번 '잡문집'은 일방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하는 듯 보인다. 처음 메일을 통해 신간소식을 접하고서도 '예약구매'를 망설였다. 이웃 블로거님처럼, 하루키의 책은 이미 여러 출판사에서 중복 출간된 이력이 있고 어디선가 한 번쯤은 접해보지 않았을까란 의구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달력과 추가 적립금 등 부차적인(!) 경품에 눈이 멀어 구매를 결정하게 되었고,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나로서는, 하루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언젠가 술에 취해 아는 형님에게, "난 김연수를 좋아하는 여친을 꼭 만날거야"란 말을 했었다. 하지만 이번『잡문집』을 읽고나선, 김연수와 등가의 자격으로 '하루키'라는 이름을 넣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20 대가 아닌 30 대 이후의 여성을...

20대 초반『상실의 시대』를 시작으로, 누군가는 "아직도야, 이젠 좀 하루키를 넘어서야 되는 거 아냐"라고 타박해도 일정부분 동의할만도 한데 여전히 난, 하루키를, 그가 보여주는 세계로부터 고개를 돌리기가 '싫다'.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 사이에서 하루키에 대한 기호는, 분명 자의적 판단이지만, 이십 대와 삼십 대의 경계선 그 어디쯤 가로놓여 있는듯 하다. 난 그 경계선을 넘어서버렸고 지금에 와선, 결국 돌아갈 수 없는 지점까지 와버린 것이다. 천운이라면 그럼에도 여전히 하루키는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고' 달리고 있으며, 그가 달리며 보여주는 풍경과 세계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공감할 수 있다라는 점이다.

 
 

스트레이트로 달려오지 못하고 자꾸 곁눈질을 했다.
『RUBBER SOUL』을 오래만에 꺼내 다시 들어봐야 했고,『호밀밭의 파수꾼』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유트브에 들어가 '빌리 홀리데이'의 곡도 들어보고 조만간『위대한 개츠비』도 다시 집어들게 될 것 같다.

문학과 요리, 음악과 마라톤맨이라는 다양한 직업(?)과 인사말에서부터 미발표 단문, 번역과 음악이야기 등 어느하나 계통 없이 흐트러져 있는 말그대로의『雜文集』, 하지만 모든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퍼즐조각들이 모여 완성된 것은 '하루키'라는 정합된 세계다.

 

여느 하루키의 책과 달리, 읽는 내내 밑줄을 여러번 긋게 만드는 책이다. 포스팅을 할 때 이건 꼭 '인용해야 겠는 걸'했던 문단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문맥 속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건, 다 FTA 때문이다.

 

"나에게 음악이 가진 최대의 훌륭함은 무엇일까? 그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차이를 확실히 구분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큰 차이도 알고 중간 정도 차이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미묘한 작은 차이도 식별할 수 있죠. 물론 그것은 나한테 좋은 것, 나한테 나쁜 것이라는 뜻이니 그저 개인적인 기준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 차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인생의 질이라고 할 만한 것까지 크게 달라지게 만드니까요. 끊임없는 가치 판단의 축적이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갑니다. 그것은 사람에 따라 그림을 수도 있고 와인일 수도 있고 요리일 수도 있지만 내 경우는 음악입니다. 그런 만큼 정말로 좋은 음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잡문집 114~115p

 

'나쁜 것과 좋은 것의' 차이를 가름할 수 있는, 어떤 가치들을 축적해나갈 때 바라볼 수 있는 기호들은, 하루키에겐 음악이었듯, 나에겐 어쩜 하루키를 통과한 '문학'과 '음악'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이어도 좋다. 아니, 그것이 다양할수록 세상은 좀더 살만한 곳이 될 게다. 그런 것을 가질 수'만'있다면. 하지만 지금 이 사회는 '나쁜 것과 좋은 것의' 차이를 판단할 수 있는 가치요소를 점점 말살시켜 버리는 건 아닐까. 끝없는 경쟁과 취업, 노동 속에 결국 '돈'으로 수렴되는 유일한 가치. 이런 세상에서 누가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란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문학의 계속성'은 이 시대에서 끊기지 않고 이어질 수 있을까.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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