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갑작스레 머리 위로 몰려오는(아파트 꼭대기 층에 살다보니 이렇게 하늘이 잔뜩 내려오는 날이면 말그대로 하늘은, 란다 문을 열고 손을 내밀면 언제라도 잡힐듯 시각적 왜곡을 낳곤하다) 구름과 함께 서둘러 어둠이 찾아온다. 줄줄이 늘어서 있는 직육면체의 건물들은 시각이 퇴화된 물고기들이 스스로의 빛과 촉각으로 어두운 심해 속을 부유하듯 하나둘. 모두가 같은 모양 같은 크기의 불빛을 밝히며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해 간다. 똑같은 크기, 똑같은 밝기, 똑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돌아온 이들의 세계는 그러나, 결코 같지만은 않을 게다. 그리고 풍경만으로도 겨울이 임박했을음 말해주듯 차가운 어둠 속에 빛나는 인공조명들은 더이상 가족의 따뜻한 체온으로 상징되지도 못할 것이다. 적어도『조대리의 트렁크』를 읽고난 후에 보이는 여기Here의 세계에서는.

  

저 불빛들 중 어느 곳에선 '눈과 귀가 없이' 태어난 아이가 바깥세상으론 들리지도 않을 가련한 울음을 멈추지 않거나, 도시의 밤이 유혹하는 좀더 화려한 불빛을 좇아 나가버린 부모를 애타게 기다리며 허기진 배를 움켜진 채 침대 한켠에 웅크리고 잠을 재촉해야만 하는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하루종일 남자의 전화만을 부여잡은 채, 어둠과 함께 찾아올 주먹질과 폭력을, 더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일상의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여인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곳은 소설과 영화가 보여주는 상상의 세계, 즉 저기There만의 장소가 더이상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조대리의 트렁크』는 2007년과 그 이전의 세상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아니, 오히려 그 때보다 좀더 임팩트 강한 지금, 여기의 세계이기도 하다. 

 

백가흠을 때늦게 읽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인 '굿바이 투 로맨스'를 읽기 바로 직전에 '알라딘'에 들어가『귀뚜라미가 온다』도 바로 구매를 해버렸다.(내일쯤 배송이 되겠지) 이미 김이설과 편혜영은 세상사는 일의 '고단함'과 '지독함'을 '치열하게'보여주었고 덕분에 그만큼의 내성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백가흠이 보여주는 세계는 뭐랄까, 그래 '리얼'하다. 바로 이웃집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살고 있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큼. 나와 충분한 거리감이 유지되기에 뉴스나 상상 속 세계에서나 존재할 듯 싶은, 그래서 적어도 일반적인, 상식적인 사람들의 세계에는 발들이지 못할 것 같은 인물들. 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엔 그 거리의 간격이 붕괴돼 버렸다. 그게 내가 네가 살고 있는 오늘의 모습이다. 전부라고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저들은 세계의 주변부이면서 동시이 시대를 상징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벌거벗은 생명에게는 그 배제에 인간들의 공동체가 기반한다는 독특한 존재상의 특권이 주어진다"는 '아감벤'의 말처럼. 
 

 

 

 

아무튼 당분간은 커다란 아파트 건물에서 빛나는 저 자그마한 불빛들을 바라볼 때면 나도 모를 의심과 불쾌한 상상을 떨궈버리지 못할 것만 같다.
 

 

 

 

1950년대의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홀든 콜필드'가 온몸으로 뿜어대는 반항과 분노는 단지 십대라는 젊음이 만들어내는 순간적 일탈이 아닌, 본능적으로 반응한, 세계에 대한 저항은 아니었을까. 2차대전의 승전국으로서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대량생산/소비적 시스템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 미국적 환상에 대한 '샐린저'식 분노. 권위적 교육체제와 관습적 인간관계가만들어내는, 인간적 본성으로부터 점점더 멀어지게 되는 세상에 대한 '무력한' 외침이 '홀든'이라는 인물로 형상화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결국 홀든이 꿈꾸었던 '호밀밭'은 어디서도 존재할 수 없는 꿈같은 장소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변할수록 인간은 누구나 '여기'가 아닌 '저기'를 갈망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나는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은 나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없다. 그러한 기묘한 장소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어느 맑은날 아침에~ 96p

더이상 나와 세계가 불화하여 나와 자신이 분열되는 여기가 아닌, 나를 나로서 인식하고 자각할 수 있는 '기묘한 장소' 말이다. 여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언제나 저기를 꿈꾸는 이들을 누군가는 이상주의자라 할지 모른다. 또는 홀든과 같은 미성숙한 청소년이거나. 하지만 '거기'가 결코 물리적, 실제적 공간이 아님을 모두가 알지 않는가. 순간이나마 저기를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는 매개물의 하나가 '책'인 것도 같다. 언어와 문장은 짧은 순간, 익숙한 주변의 공기를 낯설게 만들어 평소 인식하지 못한 자신을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데려와 대면하게 만든다. 또한 일상에 가려 볼수 없던 세계를 찢어발겨 쉽게 드러나지 않던 사람들과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여기'의 변화를 꿈꿔볼 수 있게 자극한다. 단지 책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일상으로서의 '생활'은 언제나 여기에 붙들려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여기를 벗어나 저기로의 이동은 사회적 폐배이자 탈선이라 세뇌하고 겁준다. 저기는 '벌거벗은 사람'들의 비참하고 냉혹한 실제 현실이기도,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순수한 초월적 관념의 세계일 수도 있다. 인간적 삶이란 비록 여기에 발딛고 있다 할지라도 저기를 꿈꾸며 그리고 그 둘의 거리를 줄이며 하나의 공동체적 공간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Here and There is Everyw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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