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와 테러리스트 - 앙굴리말라 이야기
사티쉬 쿠마르 지음, 이한중 옮김 / 달팽이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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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과 설화 혹은 신화가 중요한 이유는 창작의 모티브가 될 뿐 아니라 우리 모습에 대한 원형(原形)을 잘 드러내는 것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더욱이 종교와 함께 전달되는 이야기들은 그 종교의 철학적 교리를 간단하면서도 충분한 논리성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에게 포교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또는 소설의 모티브로 종종 사용되어져 왔다.

<부처와 테러리스트>는 바로 부처의 포교에 관한 한 일화를 소개한 책이다. 앙굴리말라라는 희대의 살인마를 부처는 교화시키고 또 앙굴리말라에게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용서를 이끌어냄으로써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표현한 일화이다. 작가는 이 일화를 불교라는 종교를 포교하는 목적도 아니고 또한 그 일화를 재 각색하여 작품을 재탄생시키기 위해 사용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그 일화를 소개함으로써 다분히 은유적으로 미국의 부시정권에 대한 대 테러 정책의 올바르지 못함을 설명하고 정책을 바꿀 것을 종용할 뿐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부시정권의 정책 변화인 작가의 의도에 너무 연연하지 않아도 될 듯 싶다. 이미 그 책에서 나타난 자비와 사랑은 꼭 테러리스트에 대한 정책에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미 남들에게 피해를 받고 또한 나도 알게 모르게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상처를 주고 받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처들이 복수와 응징의 악순환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 상처의 연결고리를 끊는 것은 물론 사람마다 각 종교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자비와 사랑이 절대적이라고 쉽게 말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중요한 것은 바로 상처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복수는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을 설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조엔인가 조안인가 하는 미국인이 와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는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화상을 입어 온몸이 뭉그러지고 형태가 사라져 마치 외계인과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화상 환자에 희망을 주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한다. 이런 사람의 경우와 같이 장애를 가진 이가 또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며 강연을 하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과히 신기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과거 자료가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는 한 개인이 의도적으로 상대방을 상해를 입히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으며 그 피의자가 잡혀 재판장에 섰다고 한다. 그때 조엔이라는 자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을 재판장에서 용서하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증오는 또 다른 증오를 낳는다는 것을, 증오는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을 또 한 번 죽인다는 것을 알았다며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모습을 보았다.

난 안다. 모든 사람이 이 조엔이나 부처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은 지나친 이상주의자라는 것을.. 그러나 난 또 안다. 적어도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보통 사람들일지라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전부 조엔이나 부처와 같지는 못할지라도 일부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세상의 변화는 바로 그 몇몇 사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런 것조차 이상주의라 비웃는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럼 난 이상주의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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