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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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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이천이란 인물은?
북인 명가의 후예로서 열두 살때부터 정조의 인정을 받았다.
열일곱 살에 진사 시험에 합격한 뒤로도 왕의 특별 배려를 받은 촉망받는 선비.
2. 강이천 사건이란?
바다에서 건너온 해적 조문모 신부가 정감록에 나오는 해도진인이라는 유언비어를 날조 및 유포하고 이 유언비어로 타인의 재산을 갈취하려고 한 사건으로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으나 순조때 신유박해때 강이천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고문을 받던 중 죽는다.
3. 강이천 사건을 일으킨 사상의 배경은?
강이천은 민간에 유행하는 <정감록>,새로 유입된 <천주교>,지식층에 유행하기 시작한 <패관수품>이라는 새로운 문체 속에 담긴 <양명학>에 심취했다.
4. 정조의 강이천 사건에 대한 관점은?
<정감록>,<천주교>,<양명학>은 정조의 성리학 지상주의에 대한 이단으로 간주하여 강이천 사건을 거대한 문화투쟁의 서막으로 규명하고 문체나 글씨체의 보수반동적 개혁을 통해 강이천 사건의 충격을 흡수하려고 했다.
5. 정조가 성리학 지상주의를 외친 이유는?
첫째,조선 국왕의 권위는 지배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으로 나왔다.
둘째,성리학적 가치를 충실히 따르지 않으면 연산군이나 광해군같은 실패한 선왕들의 선례를 밟거나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고만 사도세자의 선례를 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6. 성리학의 가치를 절대화하는 프로젝트,문화투쟁의 조치는?
문체반정으로 사상검열과 세뇌 작업에 착수했다.
7. 문화투쟁의 결과는?
주자 성리학의 틀을 유지했고 강이천처럼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사람은 거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