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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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소설이라면 삼국지, 수호지, 홍루몽 등이 먼저 떠오른다. 근대 작가라고 해야 노신이나 한한정도 생각날 정도로 무지했는데 위화 라는 소설가를 알게 된 것은 중국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해 준 기회였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표현의 자유나 소재의 제한 탓에 어떤 식의 소설이 나올까 호기심으로 시작한 읽기는 첫장의 능청스러운 문체에 빠져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니 책을 손에서 뗄 사이도 없이 끝까지 읽어 내려가게 했다.




매혈기 라는 제목에서 언뜻 느껴지는 뉘앙스는 다소 섬뜩함이 없지는 않지만 등장인물의 설정과 그 고단한 삶, 중국 사회의 더 발전된 생활상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서술되어 감에 따라 매혈기는 허삼관이라는 중국의 평범한 인물을 대유하는 캐릭터의 여정에 따라 오히려 친근감을 주게 된다.

전통적으로 신체발부를 귀히 여기고, 특히 피 라는 것은 몸 속에서 생명을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그 피를 헌혈이든 매혈이든 뽑아 내는 건 탐탁치 않다. 동양 사회에 함께 속하는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그 관념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박애와 봉사를 내세우며 인류애에 헌신하고자 헌혈 운동이 펼쳐지고 있으나 늘 필요한 양에 비해 딸리는 혈액 수급 현황은 단지 소설 속의 현실만은 아니다. 작금 우리나라에서도 피가 모자란다.




잠시 이야기가 새어 나간 감이 있지만 다시 줄거리로 돌아와 보자. 허삼관이라는 중국 인민이 처음 매혈에 대해 접해서 본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돼지간과 빼갈이라는 독한 술을 곁들여 물을 많이 마시는 것, 영양보충과 아울러 혈액의 양을 늘리기 위한 목적이라는 다소 엉뚱하면서도 그럴 듯한 선험자들의 행동이 허삼관에게는 껄끄럽기만 하다

그러나 의외로 짭짤한 수입이 되는 매혈에 발을 들여 놓고 나서 허삼관에게 매혈은 필요할 때마다 꼭 필요한 돈을 나오게 해주는 화수분 노릇을 한다. 자식이 밖에서 사고를 치고 돌아와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할 때도, 군대에 간 아들의 상관이 뒷돈을 요구할 때도 돈이 나올 구멍이 없을 때 어김없이 매혈을 하게 된다.

코믹하면서도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자식을 위해 온 몸을 바쳐서 , 헌신하는 부정(父情)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친자가 아니라도 생각되어 냉랭하게 대했던 아들에게도 허삼관은 진정으로 대한다. 의심하는 인간의 속성을 여과없이 보여주면서 그러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다 하려는 태도는 한편 진지하기까지 하다. 피를 뽑고 뽑고 또 뽑고,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매혈 사실을 속여가며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 가며 뽑는 허삼관! 난 그 허삼관이 저러다가 결국 죽고마는 구나 하는 생각이 눈물이 나올 뻔 했다. 그리고 그게 책의 마지막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자비로운 작가 위화는 마지막 반전을 남겨 두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멋지게 한 마디 한다. “좆털이 눈썹보다 늦게 나지만 길게 자란다!”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 삶은 오래 오래 두고 봐야 한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각양 각색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형태는 다르지만 누구나 느끼는 것이 고단한 삶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모습도 모두 다르다. 어쩌면 고통을 느끼는 정도도 모두 다를 것이다. 물질적인 수준이 높고 낮음에 따라 행복이라는 마음의 상태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자신의 기대 수준, 그리고 주위 사람들과의 불평등도가 더 행복과 불행을 실감하는 관건이 된다. 어려웠던 시절 풍족함은 없고 부족한 가운데 아등바등 사는 것이 일상적인 보통 사람들에게는 로또 같은 일확천금이 있다면 한번쯤 기웃거려 본다. 그 낮은 확률에 헛웃음 짓고 무시하기도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이 막연한 상황에 부닥쳐 본다면 그것도 방법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허삼관에게 매혈의 의미는 신성한 피를 묽게 묽게 만들어서 최대한 많이 만들어 팔 수 있는 하나의 상품, 자신의 생산품이 되고 있다. 소가 우유를 내놓고 닭이 알을 낳듯이 허삼관이 돼지간과 빼갈과 많은 양의 물을 음취하고 그로부터 뽑아져 나간 피는 인민들에게 소중한 자원이 되고, 그 자신에게는 궁박함을 벗어나게 하는 황금열쇠이다. 처음 가졌던 매혈의 떨떠름함은 횟수가 반복될 수록 그 반대 급부의 달콤함에 빠져 들게 한다.




나의 황금열쇠는 무엇인가? 신체 조건, 학벌, 가문, 혹은 인간관계? 그 무엇이 바로 이것이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황금열쇠는 없다. 독서로 시간을 보내고 잠 오면 잠 드는 그런 편안함이 험한 세상에 무슨 열쇠가 될까 싶다. 한번에 문제를 해결해 줄 그 어떤 열쇠도 없지만 오히려 그런 기대조차 없으니 편안한 건지도 모르겠다. 학교를 다니고,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변변치 않지만 직업 활동을 하는 이상 삶을 도외시 할 수는 없는 입장이 최대한 느리게, 낮게, 그야말로 서민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중국의 유불선 깊은 철학을 담은 책들과 십팔사략에서 비롯되는 그 방대한 역사를 뒤적이며 고문의 향취에 젖어 보는 것도 좋겠지만 시경이나 이백과 두보의 시에 감탄을 남기는 것도 좋겠지만 때론 고담준론의 서책을 덮고 가벼이 웃어 볼 수 있는 위화의 책이 더 와 닿는 것은 진솔한 삶이 주는 그 감동이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루한 삶인지라도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으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한은 언제나 아름답다. 어리석은 노력과 아등바등 폼 잡지 않는 어설픔조차도 말이다.




이제 나는 위화의 다른 책들을 찾아 읽으며 더 인간적인 정감을 느껴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어쩌면 이 익살스러운 작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꿰뚫어 보며 풍자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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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터뷰] 북디자이너를 만나다
    from Prunsoop 2009-04-04 16:31 
    , 등 위화 시리즈 북디자이너를 만나다 푸른숲 디자인팀 윤정우 과장님을 촌철살인의 한마디로 표현해보라는 말에 다들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카멜레온처럼 다채로운 색깔을 가지고 있거나, 캐릭터가 약한 인물이던가... 아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돌아올 후환이 무서워서 은근히 표현하기를 조심하는 눈초리다. 30분 후에 돌아온 디자인팀의 자필 롤링 페이퍼에는 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