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삐딱한 시선으로 이 소설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천명관 작가의 <고래>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거나 혹은 아직 <고래>를 읽어보지 못했다면, 이 소설을 이쁘게 바라봐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이 소설의 표현방식이 우리의 정말 진짜 모습을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남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최고이고 싶어한다. 그래서 나의 단점과 나쁜점은 감추고 싶어한다. 그리고 점점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를 좀 더 그럴싸하게 포장해 간다. 그렇게 나의 모습을 좋게 포장하면서, 남들과 비교도 하게 되고 남들보다 부족한 점이 발견되면 '열심히 노력해야지'라는 마음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남들보다 부족한 것들 때문에 속상해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래서 정작 나에게 주어진 현재를 온전히 보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항상 다가올 미래를 갈구하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괜찮이 지겠지 생각을 했었다. 그런 나의 마음이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목표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다 과정이고 임시라고 여겼고 나의 진짜 삶은 언제나 미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 결과 나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희망의 흔적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헤밍웨이처럼 자살을 택하진 않을 것이다.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내게 남겨진 상처를 지우려고 애쓰거나 과거를 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곧 나의 삶이고 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가족 p.286 ~ p.287> '초라하면 초라한 대로 지질하면 지질한 대로 내게 허용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멈짓했다. 점점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의 미래에 대한 고민과 점점 나이들어가는 부모님 걱정이 스멀스멀 다가오는 이때... 내가 허용된 삶의 범위만큼만 고민하고 감사해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이 책속에서 저 문장을 건진것은 참 중요한 소득인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처럼 우리는 점점 나이가 들어갈 것이고 부모님들도 나이들어갈 것이고 점점 고령화 가족이 되어갈 것이다. 어차피 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가 없는데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허용된 삶의 범위만큼 감사해하고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무엇보다 필요한 삶의 지혜니까. 이 책에서 건진 또 다른 문장은 제일 마지막 부분인데... 여기서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헤밍웨이가 아기였을 때, 완벽한 문장으로 처음 한 말은 '나느 버팔로 빌을 몰라요'였다고 한다.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처음 한 말은 '개가 불쌍해'였다고 알려져 있다. 역시 비범한 작가들은 뭔가 달라도 처음부터 다른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완벽한 문장으로 처음 한 말은 뭐였을까? 그것을 말해줄 사람은 이제 이 세상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안다. 그것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은 말이었을 것이다. 맘마. ■ <고령화 가족 p.287> 제일 마지막 '맘마.'라는 글 다음에 하트가 아닌 왜 ■ 네모모양 특수 문자 였을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 마음이 네모모양 이었는데 여기저기 상처도 받고 위로도 받아서 점점 다듬어지다 종국 완벽해진 우리 마음이 하트 모양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하트 모양으로 완성이 되었을때는 안타깝게도 나에게 첫말을 하게한 그 분이 안 계시다는 거다. ㅠㅠ 이 사실을 우리는 물론 알고 있음에도 자꾸 간과하고, 편하다는 이유로 당연하다는 이유로 잊고 지내는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래>에 비해서는 이 책을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는데, 불량(?) 가족들의 삐딱함 속에서 오히려 올바름을 찾아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