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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지음 / 야간비행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면서 허생전이 계속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말미에 허생이 이완을 앞에 두고 사자후를 토하던 그 장면 말이다. 원래부터 저자를 알아왔던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선뜻 주문한 것은 아마 야간비행이라는 출판사에 대한 대책없는 믿음때문일 것이다. 포장을 뜯은 후 바로 앞표지 뒷면의 이력을 살펴보았다. 회사원, 철학박사. 이 무슨 부조화란 말인가? 곱슬머리에 굳게 다문 입술을 가진 인물이 밑의 자기 이력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여간내기는 아니겠다. 다만 돈키호테일 뿐일까? 못된 내 심술이 발동한다. 머리말을 보니 책을 '사서' 읽고 서평 쓰기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허, 책값을 못하면 가차없이 까버리겠다라는 협박으로 들린다. 점점 재미있어진다.

목차를 훑어본다. 약 80여권의 책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자기 과시용이든, 알량한 지적 호기심의 발현이든 꽤나 책을 읽는 축에 속한다고 자임하던 나도 읽어보거나, 대충 들어본 내용의 책은 20여권정도이다. 분야도 하나에 집중되어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공인 철학에 대한 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듯하나, 리오 휴버먼의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를 제외하고는 미시사 또는 개별사를 다룬 책들이어서 별로 상관관계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소설책도 여러 권 눈에 띄이고 에세이, 비평서, 실용서들도 보인다. 관심분야의 다양함은 저자가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평하고 있는 부분처럼 자칫 '나름대로의 시각이나 이론적 줄거리 없이 촌평만 적어 놓은 것'(p.59)에 불과하다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러한 혐의를 두고 읽어갔다.

각 꼭지에서 곧바로 서평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가끔은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짐짓 정색을 하며 서평을 시작하기도 한다.(이 경우 그 다른 이야기는 대부분 빛나는 성찰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구애받지 않는 형식을 마련한 다음 저자는 서평을 빙자(?)한 사회적 발언들을 자유롭게 쏟아낸다. 예를 들어 복거일의 저작들에 대해서는 소목차를 달아 자세히 씹으며 정작 그에게 필요한 것은 논술선생이다,라고 조용히 일갈하며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 대해서는 아예 소설자체는 언급되지도 않는다. (이 부분 정말 통쾌했다.) 다만, 그런 류의 밥맛없는 민족주의에 대해 발언할 뿐이다.

이렇듯 그의 책읽기와 서평쓰기는 세상에 대한 발언의 형식일 뿐이다. (이 책을 읽고 구해보아야 겠다는 책이 10권 이내인 것을 보면 저자도 서평집의 길라잡이용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은데 모르겠다.) 이 원칙주의자는 무엇이 걸리는지 책을 통하지 않고는 발언하지 않으려 하며 그것도 꼭 직접 산 책이 아니고서는 하지 않을 뿐이다.

문장은 간결하며 비문은 보이지 않는다. (비문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책값은 충분하다.) 사고에 주저함이 없다. 따라서 책읽기에 속도감은 굉장하다. 그럼에도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장은 별로 없다. 문체의 힘일까?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다.

광속에 가까운 변화속도를 자랑하는 이 시대에 원리, 원칙에 삶 자체를 일치시켜 가는 지식인을 우리는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에 대한 평에서 그 고민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뒤늦게 저자가 씨네21에 종종 기고하고 있으며 개인 홈페이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소간의 갈증은 풀었지만, 여전히 다음 저서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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