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 양장본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0월
구판절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잠들었다가, 기쁜 마음으로 일어났다. 언젠가 그가 오리라는 것을 믿고 그날을 조용히, 평화롭게 기다리고 있었다. 거친 곡물 가루로 쑨 죽에도 또 다른 맛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수돗물조차 순수하고 옅은 향기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몸에 바르는 갖가지 크림들도 비로소 존재 이유를 찾았다.-89쪽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물론 백치처럼 자기 도취에 젖고, 마음이 흥분되며, 가슴 한쪽이 갑자기 아릿해지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관능이 새로이 꿈틀거리는 것을 즐길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일이 다른 뭔가를 가져다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랑의 고전적인 오류는 거기에서 싹트는 것이다. 사랑이 지속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사랑은 한줄기 바람일 뿐이다.-97~98쪽

산다는 것이 내겐 아주 두려워요. 나는 이렇게 사는 삶의 끝이 어디인지, 이 모든 습관과 몸짓이 나를 어디로 이끌고 가는지 잘 모르고 있고, 아직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버리지 못하는 단계에 있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는 존재해요. 이 종이 위에 묻은 잉크가 꿈은 아닐 테니까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혼잣몸으로 자족하며 살지는 못할 것 같아요. 말하자면 불완전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나를 채우고 완전하게 하기 위해, 진정으로 살기 위해, 나는 다른 사람을 원해요. 내가 전혀 할 줄 모르는 것을 할 줄 아는 어떤 사람, 그리고 흔히 하는 말로 나를 사랑해 줄 어떤 사람이 내겐 필요해요.-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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