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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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암울한 상황일지라도, 환경을 지배할 수 있다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 『모스크바의 신사』는 그 가능성을 한없이 품위 있게 증명해낸 소설이다. 볼셰비키 혁명이 한창이던 러시아의 한복판에서,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은 혁명정부에 의해 모스크바 메트로폴 호텔에 평생 감금된다. 처형 대신 호텔 투숙이라는 형식적 판결은 겉보기에 덜 잔인한 것 같지만, 한 인간의 삶을 단 하나의 공간에 가두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가혹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한정된 공간이 오히려 무한한 세계가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다.


호텔이라는 단일한 무대를 통해 펼쳐지는 로스토프의 삶은 단조롭기보다는, 놀라울 만큼 역동적이고 입체적이다. 애써 쾌활함을 가장하는 삶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진짜 의미를 길어 올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삶이다. 로스토프는 귀족으로서의 품위와 예절, 지적 취향과 유머를 잃지 않는다. 감금된 공간 속에서조차 자신의 삶을 주도하고, 환경을 자신만의 세계로 바꿔낸다. 그의 태도에는 어떤 강요도 없고 과장도 없다. 그저 자연스럽게, 아주 우아하게.


작가 에이모 토울즈는 로스토프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이 고통의 환경 속에서도 품격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호텔이라는 작은 무대를 세계로 확장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대가의 수준이었다. 한 인물이 공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나 역시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해 자연스레 성찰하게 되었다. 우리는 늘 더 많은 것, 더 넓은 세계를 욕망하지만, 실은 제한된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깊고 풍성한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이 소설은 조용히 일깨워준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소설의 ‘톤’이다. 웃기면서도 울리고, 가벼운 듯하면서도 진중하다. 말하자면, ‘우아하다’. 단 하나의 단어로 이 소설을 정의하자면 바로 그 단어, 우아함이 가장 어울린다. 격동의 역사적 격랑 속에서도 결코 기품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의 모습을 이토록 깊이 있게, 그러면서도 따뜻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놀라운 건 이토록 러시아적인 이야기를 미국 작가가 썼다는 사실이다. 생생하고 치밀한 묘사는 러시아 문학의 오랜 전통을 품은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나는 러시아 문학에 대해 다소 보수적이고 거리감 있는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소설을 통해 그 벽이 스르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덕분에 이 책을 다 읽자마자 자연스럽게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꺼내 읽고 싶어졌다.


『모스크바의 신사』는 단순히 한 시대를 견뎌낸 한 남자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품격 있게 삶을 꾸려나가는 법에 대한 이야기이며, 폐쇄적인 세계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이야기다. 이토록 암울하고 비극적인 시대조차도, 이렇게도 아름답게 써낼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삶이 어떻게 바닥을 치더라도, 그 안에서 우아함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 로스토프 백작은 그렇게, 내 삶의 어떤 방향을 정리해주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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