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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누드
신현림 지음 / 열림원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나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정말 맘에 드는 책은 선뜻 책을 펼치지 못하고 표지만 만지작거릴 뿐이다. 책을 펼친다는 것은, 곧 작가와 만나게 된다는 것인데, 과연 작가와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건지, 작가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 내가 쉽게 수긍을 할 수 있는지 한참을 망설이기 때문이다. 아니, 마음을 다지는 준비라 함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나는 책을 고를 때 작가를 본다. 그리고 신현림이라는 작가는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문단에 등단한 작가들이 자신의 취미 혹은 관심분야를 살려 책을 발간하는 일이 종종 있다.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이 그렇고, 황지우의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가 그렇다. 그것은 글을 쓰게 만드는 상상력의 근원이자 원동력에 대한 뜨거운 고백이다.

이들 외에도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작가들은 많다. 신현림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녀는 화제작 <세기말 블루스>를 포함해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 시인이지만 시를 통해 미처 얘기하지 못하고 묵혔던 시선들, 생활의 편린들을 사진을 통해 드러낸다.

<희망의 누드>는 신현림이 두 번째로 묶어내는 사진 에세이이다. 그녀의 사진에 대한 애정은 이미 그의 시집 [세기말 블루스]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시와 사진의 결합은 신선하게 다가왔고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했다.

<희망의 누드>의 산문들은 일단 편하게 다가온다. 기교가 없으며 무엇인가를 느끼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들, 작가가 생활 속에서 겪는 희노애락, 정인들과의 관계, 소소한 만남과 헤어짐들을 편안하게 풀어놓았다. 그래서 부담 없이 속도를 내어 읽을 수 있는 글이다. 하지만 여타 자전적 에세이들과는 거리를 둔다. 소박한 문장 속에는 그냥 지나치기 힘든 무게감이 있다.

'하루는 공짜로 오지만 인생의 재미와 축복은 공짜로 생기지 않더라.' '인생의 비극은 먼 훗날 행복의 배경이다. 그러리라 믿고 살아야만 비극을 넘어선다.' '만사 보답을 바라고 기대를 하는 것도 중병이다.' '삶은 광활한 어둠 속에서 자기만의 토굴을 파들어가는 것일 게다.'

얼핏 마음을 울리는 한 편의 경구다. 글 속에 묻혀있는 삶의 진실을 따라가다가 보면 여러 가지 상념들이 꼬리를 문다. 그리고 그 끝에서 상념들과 부합되는 사진들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음악이 슬픔을 위로하고 영화가 삶의 위안을 주기도 하듯이 사진은 내가 가진 마음을, 그러나 표현하기 힘든 그 추상을 대신한다.

<희망의 누드>는 사진과 시가 어우러진 멋진 아우라를 제공한다는 점 이외에도 책을 읽으면서 신현림이라는 작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 것도 이 책의 큰 공로다. 이전의 시들이 도발적인 제목과 감각적인 시어들로 '작가'라는 틀 속에 그를 가두었다면 <희망의 누드>를 통해 그는 일상인들의 틈으로 들어왔다.

작은 것에서 기쁨을 느끼고 고마워할 줄 알고 세상살이에 힘들어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소박하면서도 여리고 따뜻한 속내를 읽어낼 수 있어 더 없이 좋았다.

작가에게 있어서 상상력만큼 큰 밑천은 없다. 나를 있게 하고 작품을 써 내려가게 만드는 힘이다. 사진은 신현림이라는 작가에게 상상력을 자극하는 더 없이 고마운 촉매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촉매제를 독자에게 선사한다. 그녀가 제시한 사진과 글을 따라 가보자. 그 안에서 만나는 빛나는 감성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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