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졸업 전에 교양으로 법대 수업 하나를 들었다. 법학은 레고 같았다. 촘촘한 논리가 빈틈없이 맞물려 사람을 안심시킨다. 교수는 뭔가의 제6조쯤을 읽으면서 ‘도’ 위에 점을 찍으라고 했다. 조사로 쓰이는 도였다. 너도, 나도, 우리도, 할 때 그 도. 그 조항의 ‘도’를 해석하기 위해 서너 개의 학설이 동원되었다. 현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인도적인 학설을 골라 공히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단 한 글자도 허투루 쓰이지 않은 철학적 사유의 덩어리가 법전이다. 현실의 세계를 우리가 믿는 도덕성의 기준 아래 기능하게 하는 합의된 규칙, 사회라 불리는 경계 없는 집단이 무의식중에라도 동의할 수 있을 만한 견고한 것. 내 인생의 상당부분을 조율하는 그것이 아무렇게나 정해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면서 나는 약간은 인간을 믿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자가 승계되려면 아무튼 이러한 조건에 덧붙여 수인가능성이 있는지 따져봐야 됩니다.”


교수가 칠판에 콩 마커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하자의 승계를 부정함으로써 원고가 입는 피해가 수인 가능한지가 중요한 기준이란 거예요.”


접힌 부분 펼치기 ▼

나랏일도 하다보면 하자가 있을 수 있다. 두 개의 나랏일이 있을 때, 각각은 독립적이기 때문에 하자가 있으면 각각을 따로 다퉈야 한다. 그런데 그 두 개의 나랏일이 연이어 일어나고, 먼젓번 행위에는 하자가 있지만 뒤의 행위는 멀쩡한 경우가 있다. 먼젓번 행위를 다툴 수 있는 기간이 지나버려서 뒤의 행위만 다툴 수 있을 때, 과연 뒤의 행위를 가지고 소송을 제기하면서 먼젓번 행위의 하자를 이유로 뒤의 행위를 취소할 수 있는지가 ‘하자의 승계’ 이론의 핵심이다. 연이어 일어나는 행위라고 해도 서로 목적이 다르거나 해서 관련 없다고 판단되면 먼저 일어난 행위의 하자가 뒤의 행위에 대물림되지 않음이 보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조건에 덧붙여) 이러한 하자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가 어떤 개인에게 참아 넘기기 어려울 만큼 분한 것이면 하자의 승계를 인정하여 전혀 하자 없는 뒤의 행위를 다투면서도 앞의 행위의 하자를 주장하여 구제를 받을 수 있다. 

펼친 부분 접기 ▲


나는 수인가능성이라는 한자말에 매료되었다. ‘참을 만한가?’를 멋지게 말하면 수인가능성이로구나. 어쩐지 일제의 냄새가 짙은 이 단어는 마치 최근 ‘아가씨’나 ‘밀정’을 볼 때 느꼈던 것 같은 과거의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럼 선생님, 수인가능한지 여부는 어떻게 판단하나요?”


마침 맨 앞줄에 앉아있기도 했고, 수인가능성이라는 단어를 꼭 한 번 내 입으로 말해보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질문을 꺼내놓았을 때, 교수는 귀신 보듯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나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 아닐까?”


교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 수인가능성에 대해서는 개별 사안마다 서로 다른 기준을 통해 판단하는데, 성문법이 아니라 판례를 가지고 참을 만한지 아닌지 구별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마치 법을 만들다 만 것 같은 찜찜함이 느껴질는지 몰라도, 내가 지금 눈앞의 이 피해를 견딜 수 있을지의 여부를 나를 알지도 못하는 입법자가 일률적으로 정해놓는 것이 오히려 비인간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처럼 해진 데 기운 것 같은 논리야말로 정답에 가깝다.



교수는 잠시 나를 쳐다보고서 수인 가능하지 않다고 평가되었던 몇 가지 판례를 알려주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나는 실제로 조금 울었는데, 법학이 그처럼 촉촉하다는 것이 무척 안심되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과학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너무나 오랫동안 과학에 매몰되어 있었다. 나의 세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수와 체계로 정리할 수 있다. 디지털 같은 사고다. 오랫동안 그렇게 있다 보면 인간성을 대하는 마음이 빠싹 마른다. 그리고 가끔씩 나의 학문과 다른 성질의 것들을 만날 때나 되어야 약간의 수분이 옮아오는 것이다.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무척 어렵고, 얕은 공부로 으스대며 답을 내놓기에는 너무나 커다란 물음이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문제들을 다룰 때 가장 인간적인 방향으로 답을 내려줄 공식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아직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아마도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누구나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사회가 올지도 모르겠다. 


법전에는 의외로 한글이 많다. 옛날에는 전부 한자였지만, 많이 쓰이는 법을 중심으로 점차 한글로 표시하는 개정 작업이 진행 중이다. 더 많은 사람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이다. 법의 적용을 받아야 할 당사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동의를 받고자 손을 내미는 것 같은 모양새다. 법이 가는 방향은 때로 좀 삐뚤 수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현실에 마땅한 추세를 따른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法 이란 물이 가는 길일 것이라고, 물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따라 가리라고, 그냥 혼자 그렇게 생각해보고서, 납득하기 어려운 현실과 마주칠 적마다 멀리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끔 영어나 한국어, 또 아주 가끔은 일본어에 대해서 고민한다. 다른 언어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싶어질 때가 있기는 하지만 고민할 만큼 아는 언어가 저 뿐이다. 아무튼, 언어를 고민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것이 예술적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단어가 도대체 생각하기도 어려운 정교한 규칙을 통해 고리를 맺는다. 가끔씩 느린 속도로 그것을 관찰하는 것이 내 소소한 취미이다.


오늘은 the young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형용사 앞에 the가 붙는 용법에 대해 생각한 것이다. 형용사 앞에 the가 붙으면 그것은 사람이 된다. 우리는 the young을 젊은이로 번역한다.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the는 명사 앞에만 붙고 그리고 또 보통 ‘그’ 하는 뜻을 지니는 정관사가 아닌가 말이다. 왜 형용사와 손을 붙들면 그 덩어리는 형용사적 기질을 갖는 인간이 되고 마는가? 


나는 영어를 꽤 오래 배웠는데, 아직도 the가 어렵다. the를 써야할 때와 그러지 않아도 되는 때를 숨 쉬듯 구분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the를 옳게 사용하는 일이 단지 문법적인 문제에 그친다면 몰라도, 실제로 the가 존재하는지 아닌지가 어감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때도 많으니까 고민이 된다. 단어에 the가 더해지면서 명사는 특별한 힘을 얻는다. 어떤 공고한 법칙에 따라 the를 집어넣어 보려고 시도한 적도 없지는 않은데, 남의 모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꽤 곤란한 일이라 신경 쓸 일이 한 두 개가 아니어서 나는 곧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은 그냥 내 마음대로 하고 있다. 한국어도 마음대로 쓰는데 영어라고 꼭 정확할 필요가 있나 싶다. 그리고 마음대로 써야 마음이 잘 드러날 것 같다. 이건 좀 핑계다.


그렇다면 나는 the를 넣을지 말지 여부를 결정할 때 어떤 느낌에 주목하는가? 지금 잘 생각해보니 그것은 지정하는 느낌이 좀이라도 있나 없나인 것 같다. 명사가 the와 함께 쓰이는 용법이 몇 가지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해당 명사가 특별함을 지니고 있는가’ 만을 취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기로 한 것이다. the를 앞세우고자 하는 명사가 지금 나의 글이나 말에서 어느 정도라도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어서, 다른 무엇과 구분되는 경향성을 갖고 있는지 말이다. 게다가 순전히 내 입장만 반영하기 때문에 청자에게 그게 특별한지 아닌지는 별로 고려하지 않고 the를 남발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의 언어 세계에서는 the young이 어색하고 또 오묘하게 뒤틀려 보인다. 지금 말하려는 젊은이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특별하다고 할 특징을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더라도 young 앞에 the가 붙는 순간 나는 버릇처럼 그것이 어떤 의미로라도 특별한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young이 그러한 특별함을 갖는 순간 갑자기 형용사는 사라지고 젊은 속성을 지닌 사람이 나타난다. 형용사가 내게 특별해지면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세상과 인간으로서 나 자신의 거리에 대해 생각한다. young의 속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주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he를 붙이면 이것은 인간이 된다. 그러니까 화자인 내게, young한 것 중에서도 특히 지정할 필요가 있는 의미 있는 young함은 사람 속에만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the를 주로 사용하는 버릇 때문에 부자연스럽게 내게 주입된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공을 들여 지정할 만한 young이 사람에게만 있다는 생각이 무척이나 그럴싸하게 생각되어서 나는 놀랐다. 애초에 형용사 앞에 the를 입히는 용법을 아주 쉽게 외웠었는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the와 형용사가 함께 쓰이는 문법은 지금 그것을 사용하는 내가 사람이라는, 그래서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사람을 특별히 여길 수밖에 없다는 외침이다. 그런 외침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내가 객관적인 사고를 한다는 생각을 과감히 포기한다. 그리고 어쩌면 적어도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으려나 하는 의심도 하게 된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나는 the young이 젊은이로 간단히 번역되는 현실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 내게 the young이란, 젊다는 속성을 가진 바로 그것, 젊다는 속성을 가진 많은 것들 중에서도 바로 바로 그것, 우리가 말 안 해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젊은 것 중에서도 진정한 의미로서 젊은 바로 그것, 을 축약한 말이기 때문이다. 


Begin again의 삽입곡인 Lost stars 중에 이런 가사가 있다.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 ’ 


젊음은 우리가 젊다고 생각하는 특별한 바로 그것에 낭비된다. 


언어란 무척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나는 시골을 별로 안 좋아했다. 할머니네 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외가가 나를 늘 불편하게 만들었다. 외가는 친가로부터 차를 타고 15분이면 도착하는데, 명절날 점심상을 치우고 나면 나는 엄마의 옆에 드러누워 물었다. 엄마, 외할먼네 가? 엄마는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은 고개를 저었다. 외가에 가고 안 가고는 순전히 엄마의 마음에 달린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 고갯짓이 진짜 대단히 중요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명절을 쇠느라 지치고 피곤하면 그냥 집에 가자고 했고, 지치고 피곤한 와중에도 이모나 외삼촌이나 외할머니를 보고 싶으면 외가에 들리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명절마다 엄마가 많이 피곤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외가는 별로 나쁘지 않았다. 평범한 집이다. 전기세를 아끼느라 거실 불이 검었다. 과일 장사 하는 외할머니가 과일을 상자 째로 들고 와서 끝도 없이 깎았다. 방금 밥 먹고 왔다고 해도, 과일 주고, 밥 주고, 떡 주고, 또 과일 주고, 그 순서가 끝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구석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가끔 한 마디씩 말을 던졌는데 꽤 재치 있는 양반이었다. 옛날 노인네라 요즘 아빠들처럼 딸에게 살갑게 굴지는 않았어도, 엄마를 예뻐하는 티는 났었다. 내가 외가를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은, 거기만 가면 나는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외가의 현관을 여는 순간 나는 강대한 무관심을 느꼈다. 작고 어린 내가, 혹은 나이를 더 먹은 나라도 도대체 어떻게 손 쓸 수가 없는 지독한 것이었다. 종갓집에도 없는 남아선호사상이 그 집엔 지금도 꽤 두껍게 남아있다. 나는 외가에 가서는 객체가 되고, 내 개성이나 인격은 여자애라는 하나의 지표 아래서 깨끗이 표백되고 말았다. 또래 사촌 여동생은 외갓집에 거의 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외조부모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깔끔한 정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외가에서 관심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진학이나 취업을 했을 때다. 내가 외고에 진학했을 때 친가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고 명절 내내 평생 들을 칭찬을 다 들었는데, 불과 15분 차 타고 자리를 옮기고 나자 곧바로 욕을 먹었다. 여자애가 학비 많이 드는 학교에 갔다는 이유였다. 우리집은 가난하지 않았다. 나는 배우는 일에 돈 걱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외할머니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고서야 알았다. 게다가 아빠 회사에서 전액 장학금이 나왔었다. 인문계를 가도 실업계를 가도 특목고를 가더라도 집에서 실질적으로 쓰는 학비는 0원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말하자 외할머니는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의 입가에 쪼글쪼글 주름이 잔뜩 잡혔다. 나는 그 주름이 무서워서 고개를 숙였고, 엄마는 속상해했다. 대학에 갔을 때는 더 심했다. 좋은 학교였다. 내 합격이 결정되고서 아빠는 눈에 띄게 가슴을 펴고 다녔고 엄마는 십년이 젊어졌다. 그런데도 외할머니는 짜증을 부렸다. 계집애가 대학을 간다는 사실 자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침묵했다. 나는 차라리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는 게 나은가 고민했다. 여자애라서 겪는 차별과 멸시는 내 세상에 많이 없었는데, 그 희소한 양이 모두 외갓집에 밀집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어서 명절 때마다 엄마의 어깨를 살살 흔들고, 엄마, 외할먼네 가?, 애기 같은 물음을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외갓집 구석방에는 큰 책꽂이가 있다. 엄마와 이모들이 어릴 때 보던 책이 아직도 꽂혀 있는 낡은 것이다. 제일 위 두 칸에는 갈색 양장의 세계 명작 전집이 꽂혀 있다. 책 번호가 종종 빠져 있으므로 몇 권은 이미 잃어버린 것 같다. 70년대 번역투의 걸리버 여행기나 삼총사 같은 책들인데, 내가 글자를 알게 되고 얼마 안 되어 나는 그 책꽂이에서 소공녀를 뽑아 읽었다. 작은 방에 숨어 소공녀를 다 읽는 데 몇 년이 걸렸다. 외가에 올 때마다 조금씩 읽었기 때문이다. 그 몇 년 간은 그래도 외가에 가는 것이 못 견디게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공녀를 다 읽고 나자 어느덧 훌쩍 자라, 외가의 무관심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과도히 깊은 상처는 받지 않고 외가 방문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소공녀 한 권이 나의 방패가 되어, 이렇게 자라기까지 여아 차별의 가시 아래 왜곡된 가치관을 갖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생각한다. 


소공녀는 완역판도 동화책이고, 깊이 탐구할만한 주제가 있다기보다는 소녀의 꿈과 환상이 더욱 반짝이도록 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짧게 편집된 동화책으로 읽었다면 따로 완역판으로 읽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소공녀의 초록색 눈동자와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 수줍게 볼을 붉히면서도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왕성한 상상력은 완역판이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세라로부터 공상가의 기질을 물려받았고 외갓집의 어두운 방에서 깊은 바다나 높은 하늘을 꿈꾸는 법을 배웠다. 


소공녀를 다 읽었을 때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는데, 마지막 장을 넘기며 가슴이 두근거려서 어쩔 줄을 모르고 결국 그 책을 서울 집으로 가져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몇 년 지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금박으로 멋들어지게 제목이 새겨져있던 그것이, 사라지고 나니 새삼 그리워 나는 몇 년에 한 번은 꼭 소공녀 생각을 하게 된다. 도대체 그게 왜 없어져 버렸지, 영문 모를 일을 겪어 억울한 마음에 여러 번 방을 뒤집으며 책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최근 이북 버전의 소공녀를 구매해서 읽어 보았는데, 그 때의 그 느낌은 아니었다. 상당부분은 기억 왜곡에 의한 것일 테고 또 상당부분은 문체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세라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지껄이고’, 존댓말을 쓸 때는 ‘읍니다', 하고 말했었는데, 그런 고풍스러운 언어가 요즘 출판된 책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묘하게 각운이 맞는 번역은 산문도 운문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었고 나는 문장자체로 아름다운 그 이야기를 마음 깊이 좋아했다. 옛날 내가 보던 소공녀는 아주 우아하고 매력적인 말투를 구사했지만, 지금 화면 속의 세라는 그냥 조금 특이하고 불쌍한 어린애다. 외가의 책장을 빠져나와 사라진 순간 그 때의 세라는 죽고 없는 것 같다. 



외할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혼자 남은 외할머니는 많이 무르고 녹녹해졌다. 엄마를 무섭게 다그치던 기운 센 노인은 기억 저편으로 물러서고 이제는 수줍게 웃으면서 왔니, 하고 문간까지 마중 나오는 할머니만 남았다. 일 년에 많아야 두 번 방문하는 외가에서나 차별을 겪었던 나는 많은 여성들 중에서도 아주 운이 좋은 축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일상 대부분의 과정에서 사랑받았기에 그런 차별에도 주눅 들지 않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으며, 외할머니를 미워하지도 않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운이 좋은 여자아이였어도 때로 나의 길에는 비합리와 부조리가 아스팔트 같은 모양으로 새카맣게 고이곤 한다. 이제 생각하면 이 시기에 소공녀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처음으로 쓰는 글은 소공녀에 대한 것이 좋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