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골을 별로 안 좋아했다. 할머니네 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외가가 나를 늘 불편하게 만들었다. 외가는 친가로부터 차를 타고 15분이면 도착하는데, 명절날 점심상을 치우고 나면 나는 엄마의 옆에 드러누워 물었다. 엄마, 외할먼네 가? 엄마는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은 고개를 저었다. 외가에 가고 안 가고는 순전히 엄마의 마음에 달린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 고갯짓이 진짜 대단히 중요하게 느껴졌다. 엄마는 명절을 쇠느라 지치고 피곤하면 그냥 집에 가자고 했고, 지치고 피곤한 와중에도 이모나 외삼촌이나 외할머니를 보고 싶으면 외가에 들리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명절마다 엄마가 많이 피곤하기를 바라게 되었다.
외가는 별로 나쁘지 않았다. 평범한 집이다. 전기세를 아끼느라 거실 불이 검었다. 과일 장사 하는 외할머니가 과일을 상자 째로 들고 와서 끝도 없이 깎았다. 방금 밥 먹고 왔다고 해도, 과일 주고, 밥 주고, 떡 주고, 또 과일 주고, 그 순서가 끝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구석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가끔 한 마디씩 말을 던졌는데 꽤 재치 있는 양반이었다. 옛날 노인네라 요즘 아빠들처럼 딸에게 살갑게 굴지는 않았어도, 엄마를 예뻐하는 티는 났었다. 내가 외가를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은, 거기만 가면 나는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외가의 현관을 여는 순간 나는 강대한 무관심을 느꼈다. 작고 어린 내가, 혹은 나이를 더 먹은 나라도 도대체 어떻게 손 쓸 수가 없는 지독한 것이었다. 종갓집에도 없는 남아선호사상이 그 집엔 지금도 꽤 두껍게 남아있다. 나는 외가에 가서는 객체가 되고, 내 개성이나 인격은 여자애라는 하나의 지표 아래서 깨끗이 표백되고 말았다. 또래 사촌 여동생은 외갓집에 거의 오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외조부모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깔끔한 정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외가에서 관심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진학이나 취업을 했을 때다. 내가 외고에 진학했을 때 친가는 거의 축제 분위기였고 명절 내내 평생 들을 칭찬을 다 들었는데, 불과 15분 차 타고 자리를 옮기고 나자 곧바로 욕을 먹었다. 여자애가 학비 많이 드는 학교에 갔다는 이유였다. 우리집은 가난하지 않았다. 나는 배우는 일에 돈 걱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외할머니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고서야 알았다. 게다가 아빠 회사에서 전액 장학금이 나왔었다. 인문계를 가도 실업계를 가도 특목고를 가더라도 집에서 실질적으로 쓰는 학비는 0원이었다. 엄마가 그렇게 말하자 외할머니는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의 입가에 쪼글쪼글 주름이 잔뜩 잡혔다. 나는 그 주름이 무서워서 고개를 숙였고, 엄마는 속상해했다. 대학에 갔을 때는 더 심했다. 좋은 학교였다. 내 합격이 결정되고서 아빠는 눈에 띄게 가슴을 펴고 다녔고 엄마는 십년이 젊어졌다. 그런데도 외할머니는 짜증을 부렸다. 계집애가 대학을 간다는 사실 자체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침묵했다. 나는 차라리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는 게 나은가 고민했다. 여자애라서 겪는 차별과 멸시는 내 세상에 많이 없었는데, 그 희소한 양이 모두 외갓집에 밀집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그게 너무 싫어서 명절 때마다 엄마의 어깨를 살살 흔들고, 엄마, 외할먼네 가?, 애기 같은 물음을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외갓집 구석방에는 큰 책꽂이가 있다. 엄마와 이모들이 어릴 때 보던 책이 아직도 꽂혀 있는 낡은 것이다. 제일 위 두 칸에는 갈색 양장의 세계 명작 전집이 꽂혀 있다. 책 번호가 종종 빠져 있으므로 몇 권은 이미 잃어버린 것 같다. 70년대 번역투의 걸리버 여행기나 삼총사 같은 책들인데, 내가 글자를 알게 되고 얼마 안 되어 나는 그 책꽂이에서 소공녀를 뽑아 읽었다. 작은 방에 숨어 소공녀를 다 읽는 데 몇 년이 걸렸다. 외가에 올 때마다 조금씩 읽었기 때문이다. 그 몇 년 간은 그래도 외가에 가는 것이 못 견디게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소공녀를 다 읽고 나자 어느덧 훌쩍 자라, 외가의 무관심이 어디서 오는지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과도히 깊은 상처는 받지 않고 외가 방문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소공녀 한 권이 나의 방패가 되어, 이렇게 자라기까지 여아 차별의 가시 아래 왜곡된 가치관을 갖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생각한다.
소공녀는 완역판도 동화책이고, 깊이 탐구할만한 주제가 있다기보다는 소녀의 꿈과 환상이 더욱 반짝이도록 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짧게 편집된 동화책으로 읽었다면 따로 완역판으로 읽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소공녀의 초록색 눈동자와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 수줍게 볼을 붉히면서도 끝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왕성한 상상력은 완역판이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세라로부터 공상가의 기질을 물려받았고 외갓집의 어두운 방에서 깊은 바다나 높은 하늘을 꿈꾸는 법을 배웠다.
소공녀를 다 읽었을 때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는데, 마지막 장을 넘기며 가슴이 두근거려서 어쩔 줄을 모르고 결국 그 책을 서울 집으로 가져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몇 년 지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금박으로 멋들어지게 제목이 새겨져있던 그것이, 사라지고 나니 새삼 그리워 나는 몇 년에 한 번은 꼭 소공녀 생각을 하게 된다. 도대체 그게 왜 없어져 버렸지, 영문 모를 일을 겪어 억울한 마음에 여러 번 방을 뒤집으며 책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최근 이북 버전의 소공녀를 구매해서 읽어 보았는데, 그 때의 그 느낌은 아니었다. 상당부분은 기억 왜곡에 의한 것일 테고 또 상당부분은 문체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세라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지껄이고’, 존댓말을 쓸 때는 ‘읍니다', 하고 말했었는데, 그런 고풍스러운 언어가 요즘 출판된 책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묘하게 각운이 맞는 번역은 산문도 운문처럼 느껴지게 만들었었고 나는 문장자체로 아름다운 그 이야기를 마음 깊이 좋아했다. 옛날 내가 보던 소공녀는 아주 우아하고 매력적인 말투를 구사했지만, 지금 화면 속의 세라는 그냥 조금 특이하고 불쌍한 어린애다. 외가의 책장을 빠져나와 사라진 순간 그 때의 세라는 죽고 없는 것 같다.
외할아버지는 몇 년 전 돌아가셨다. 혼자 남은 외할머니는 많이 무르고 녹녹해졌다. 엄마를 무섭게 다그치던 기운 센 노인은 기억 저편으로 물러서고 이제는 수줍게 웃으면서 왔니, 하고 문간까지 마중 나오는 할머니만 남았다. 일 년에 많아야 두 번 방문하는 외가에서나 차별을 겪었던 나는 많은 여성들 중에서도 아주 운이 좋은 축에 속할 것이다. 그리고 일상 대부분의 과정에서 사랑받았기에 그런 차별에도 주눅 들지 않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으며, 외할머니를 미워하지도 않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처럼 운이 좋은 여자아이였어도 때로 나의 길에는 비합리와 부조리가 아스팔트 같은 모양으로 새카맣게 고이곤 한다. 이제 생각하면 이 시기에 소공녀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처음으로 쓰는 글은 소공녀에 대한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