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 나를 살리러 떠난 곳에서 환자를 살리며 깨달은 것들
김준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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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잘 죽는 것은 우리 삶의 마침표를 잘 찍는 것과 같습니다.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들을 잘 가꾸며 살다 보면 언젠가 다가올 죽음 또한 잘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52쪽)


죽음이란 무엇일까. 산다는 건 무엇일까. 다분히 철학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며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것일까?


아마 이런 질문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직군이 의료계 종사자, 특히 first responders 즉 파라메딕이 아닐까. 아플 때, 다쳤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119를 떠올리고 필요하면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면 소방서의 구조 대원들은 초 단위까지 줄여 가며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현장에 도착해 요구조자를 돕는다. 이는 일견 무척 당연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우리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살갗이 찢어져 몸속이 훤히 보이고, 뼈가 부러져 피부 밖으로 빠져나와 있고, 무언가에 깔리거나 짓눌려 있는 사람을 구조해야 하는 그들의 일상을, 그들의 마음을.


그들의 입장이 직접 되어 볼 수는 없겠지만 간접적으로 경험할 방법은 있다. 캐나다에서 파라메딕으로 근무하고 있는 저자 김준일의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에는 파라메딕으로서 그의 일상과, 사람들을 구하고 도우며 느끼는 감정, 파라메딕으로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뇌 등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응급구조사의 면면이 정리되어 있다.




일반인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어쩌면 끔찍할 수도 있는 온갖 상처와 죽음 들을 일상적으로 목격해야 하는 사람들. 죽음의 문으로 끌려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 돌아오게 만들어야 하는 그들 직업의 무게. 파라메딕이라는 직업을 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고뇌해야 하는 것들. 다름 아닌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기 때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생각들. 누군가를 돕지 못했다는 생각이 내가 다침으로써, 용서를 받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용서를 구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라는 거대한 죄책감과 자기비난으로 돌아오는, 과중한 짐을 짊어지는 직업.


물론 119 대원들이 늘 생사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때는 처마에 벌집이 있다거나, 들개나 멧돼지가 사람들을 위협하고 다니는 등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다. 그럴 때 우리는 당연하게 응급구조사를 찾는다. 그런데 우리가 잊고 있는 게 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밥벌이를 위해 일을 하는 (물론 사명감을 갖고 이 직업을 택한 분들도 많을 거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근로자라는 측면에서)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업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들의 어깨에 얹힌 타인의 생명이라는 무게는 사람으로서 쉬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일 테다.



현장에서 환자의 벗겨진 얼굴 가죽을 보았을 때 우리가 받았던 충격 역시 그 브리핑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로써 눈을 감아도 여전히 보이는 보글거리는 피거품을 포함하여, ‘환자 케어와는 별 상관없고 중요하지 않지만 우리 눈과 귀와 마음속에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

우리는 어서 다음 출동을 준비해야 했다. (…) 하지만 내 마음속에 불어닥친 소용돌이는 가라앉을 줄 몰랐고, 그 탓에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능력이나, 무엇을 보고 느끼는 행위 모두 엉망진창이 되어서 나는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26쪽)


환자가 살아 있는 동안 만나는 마지막 사람이 되기 싫다는 이유로 도망치듯 멀어지고자 했던 내가 결국 다시 불려 들어와 그의 가슴을 누르게 된 것은 그가 살아 있던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본 사람, 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사람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마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4쪽)


나는 지금 훌륭한 파라메딕으로서 그가 가졌던 평안함과 침착함을 얻고자 애쓰는 중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실력 있는 파라메딕이 되기 위한 대가가 그저 내 시간과 노력에서 그칠 것인지 아니면 C처럼 나의 내면까지 바꿔야 하는 것일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57쪽)


몸은 뒷마당에 앉아 새파란 하늘을 보고 있는데도 머릿속은 시뻘건 피바다 속에서 허우적대며 ‘그때 그 환자, 그걸 이렇게 했으면 뭐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80쪽)


신고자가 전하는 말을 그대로 듣고 있을 수밖에 없고,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낼 수 없으며, 먼저 전화를 끊을 수도 없는 911 신고 접수자에게 그것은 단순한 감정 노동의 수준을 넘어서는 가학적 폭력이었으며,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자신의 심장에 날카로운 칼이 푸욱 꽂혀 순식간에 수백수천 번 토막 나는 난도질 같은 것이었다. (82쪽)

→ 마지막 가는 길, 혼자 가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왜 그 순간에 911 직원을 죽음의 목격자로 만들어 버린 걸까. 그 직원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있는데. 죽은 순간이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산 자에게 상처를 남기는 지독한 이기심.


화상을 입거나 다치면 아이들에게 좀 덜 미안해질까? 그러면 나중에 내가 죽을 때 면죄부 한쪽 귀퉁이라도 잡고 빌어볼 수 있지 않을까? (90쪽)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를 읽어 보려 마음먹었던 건 단순한 호기심에서였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점차 내 마음도 함께 무거워져갔다. 그리고 의외의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오늘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기 시작한 거다. 책은 죽음을 목도하기에 한편으로 깨달을 수 있는 살아있음에 대한, 오늘도 평범한 일상을 살았음에 대한 감사함을 일깨운다. 지금 이렇게 잘 살아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이고 운이 좋은 건지, 행복한 건지.


혹시라도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매일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 가끔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지? 그렇다면 당신 일상 중 어떤 하루는 눈앞에서 가족이 사고를 당하는 모습, 심지어 그 가족의 목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날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면 당신이 느끼는 그 지루함에 오히려 감사하게 될 것이다. (70쪽)


하지만 잔뜩 출력한 이력서를 가슴에 품은 채 보이는 회사마다, 공장마다, 식당마다 들어가 나를 써주지 않겠냐고 매달리던 그 절박함을 아로새기고,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을 감사히 되새기면서 이 길을 끝까지 뚜벅뚜벅 가볼까 한다. (109쪽)


참 별것 아닌데… 우리가 매일 가족들과, 사랑하는 이들과 스쳐 지나가듯 나누는 사소한 일상일 뿐인데, 신기하게도 삶의 끝에 다다르면 그런 사소한 일상은 죽기 전 마쳐야 하는 신성한 의식이 되고 만다. (…) 오히려 바로 그런 사소한 일상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행복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것들이고, 행복했던 기억만큼 우리 삶에서 중요한 건 없기 때문일 것이다. (206쪽)


분명 누구나 꿈꾸는 이상적인 환경은 아니었지만 저와 제 가족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제법 잘 살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제가 만족하는 법을 모른 채 불만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던 것뿐이었지요. (251쪽)



나의 상처와 죽음도 중요한 고민거리지만, 타인의, 특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처와 죽음에 관해 우리는 얼마나 생각해 보았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가족이 곁에서 사라질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콧날이 시큰해진다. 책을 읽으며 눈가가 젖었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의 존재가 희미해진다는 게, 사라진다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저자가 현장에서 겪은 이야기를 읽으며 저도 모르게 눈가가 글썽 해졌다.


이제 아이들의 마음까지 다치지 않게 지켜줄 차례였는데 정작 마음이 아프기 시작한 건 나였다. 외상 흔적을 살피기 위해 들어 올린 아이들의 머리카락은 곱게 땋여 있었다. 아마도 제 엄마의 솜씨였겠지만 이제 그녀의 손길이 이 아이들에게 닿을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다 아까 사망한 엄마의 맥박을 확인하느라 그녀의 손목을 잡았던 기억이 났고, 잠깐 멈칫했던 것도 같은데 내 손을 아이들의 머리, 뺨, 그리고 손에 살포시 얹어주었다. 부질없는 짓인 줄 알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에게 제 엄마의 마지막 손길을 전해주고 싶었다. (73쪽)


하지만 돌아갈 수도 없을 만큼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 상태로는 가까운 미래에 자신의 삶이 멈출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본인들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186쪽)

→ 응급실에서 의사를 포함해 모두에게 외면을 당하고 흐느끼던 노숙자의 뒷모습이 상상된다. 한 인간의 가치, 존엄의 타락. 측은하다. 그러나 자신의 존엄을 떨어뜨린 건 다름 아닌 그 자신. 아마 그 지점이 가장 처절하게 후회되고 슬픈 지점 아닐까.


그리고 베이스로 돌아와서 평소와 같이 업무 일지를 작성하는데 내 근무복 단춧구멍에 매달려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이 눈에 띄었다. 아마 좀 전에 그녀를 뒤에서 안아 일으킬 때 붙었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바닥에 누워 있던 환자에게 거기서 그렇게 잘 거냐고 냉소했던 나는 내 옷에 붙은 그 머리카락을 보자 그만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마치 ‘나, 더 살고 싶어요. 제발 붙잡아 주세요’라고 소리 없이 외치는 것 같아서… (228쪽)


“힘들게 해서 미안해… 같이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여기서 더 힘들게 있지 말고 어서 가… 사랑해…” (249쪽)



<버스에서 읽으며 현웃 터졌던 장면>



한 편의 메디컬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 책에 묘사된 이야기들은 현실이고 드라마와는 다르지만, 너무 생생하게, 파라메딕으로서 보고 느끼는 것을 설명하고 있어 마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했다.


경험이 부족한 내게 파라메딕이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인물은 둘뿐이다. <고스트 위스퍼러>의 주인공인 멜린다의 남편 짐, 그리고 <경찰서 옆 소방서>의 송설. 가상의 두 인물에게서는 공통적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들도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근로자일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이 나뉘는 최전선에서 애쓰는 사람으로서 지니는 사명감이나 책임감도 있겠지만, 저자 역시 어쩌면 그저 한 명의 근로자에 불과할 테다. 특별한 성인saint이 아니라 그저 일반인이며, 그저 일터가 생사의 최전선일 뿐인 것이다. 그가 캐나다에 처음 자리 잡던 때 먹고 살 일을 걱정하며 절박하게 일을 구했던 시절을 묘사했듯, 파라메딕이 처음 되었을 때 불타는 사명감보다는 ‘이제는 그래도 직업이 생겼으니 우리 가족을 조금은 안정적으로 부양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듯, 이 역시 밥벌이를 위해 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는 일에는 자신이, 타인이 부과하는 커다란 부담이 있다. 그가 ‘돕는’ 것이 바로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 예상한 바와는 달리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건 역설적이지만 ‘삶’이었다. 죽음을 바라보며 오히려 삶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매 순간이 마지막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라메딕의 일상과 그들의 고민이 궁금하다면 물론 추천하지만, 지금 나의 삶이 정체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사방이 꽉 막혀 숨이 막혀 일상이든 뭐든 그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쓸 수 없다면, 일상과 삶의 가치에 관해 고민하고 싶은데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일독을 권한다. 추천한다.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잘 죽는 것은 우리 삶의 마침표를 잘 찍는 것과 같습니다.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돌아보면서,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들을 잘 가꾸며 살다 보면 언젠가 다가올 죽음 또한 잘 맞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P252

몸은 뒷마당에 앉아 새파란 하늘을 보고 있는데도 머릿속은 시뻘건 피바다 속에서 허우적대며 ‘그때 그 환자, 그걸 이렇게 했으면 뭐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 P80

화상을 입거나 다치면 아이들에게 좀 덜 미안해질까? 그러면 나중에 내가 죽을 때 면죄부 한쪽 귀퉁이라도 잡고 빌어볼 수 있지 않을까?
- P90

혹시라도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매일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이 가끔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지? 그렇다면 당신 일상 중 어떤 하루는 눈앞에서 가족이 사고를 당하는 모습, 심지어 그 가족의 목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날이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면 당신이 느끼는 그 지루함에 오히려 감사하게 될 것이다.
- P70

"힘들게 해서 미안해… 같이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 여기서 더 힘들게 있지 말고 어서 가… 사랑해…"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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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
강재훈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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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왜 찍느냐? 나무의 어떤 풍경을 찍느냐? 스스로 자문해 보면 아마도 어린 시절의 고향 풍경을 잊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싶다.(185쪽)”

나무는 공기와 비슷한 존재다. 늘 우리 주변에 있지만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당연한 존재로 여기며 감사할 줄 모른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무가 과연 있을까, 반추해 봤다. 딱 한 그루 있더라. 장장 25년을 살았던 고향과도 같은 동네에 있던 느티나무. 우리 집이 있는 골목과 그 앞 큰 길 사이의 계단 턱에 있던 나무였는데, 크기도 컸고 위치도 눈에 띄어 학교를 오가는 길 늘 한 번씩은 눈길을 주곤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는 나무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고, 이름도 붙여 주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같은 동네에 살았던 친구인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듯 나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204쪽)”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의 저자 강재훈 사진가는 다르다.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나무를 마치 친구 집을 찾듯 매해 방문해 인사를 하기도 하고, 허무하게 잘리고 남은 밑동을 보며 연민할 줄 아는 사람이다. 30년 동안 분교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나무들을 발견하고 친구가 될 줄 아는 사람이다. 사진 기자로서의 직업의식이 아니라, 그 자체가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책 내내 가득한 따뜻함과 애정 어린 시선, 그리고 그것이 반영된 그의 사진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강재훈 사진가의 사진 에세이 <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은 (조금 유치한 표현이지만) 힐링 에세이다. 물론 저자가 독자의 힐링을 목표로 에세이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힐링, 즉 치유되는 느낌은 ‘깨끗함’에서 오는 치유감이다. 오늘날 쏟아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콘텐츠는 죄다 자극적인 것뿐이다. 요즘은 소위 ‘매운맛’을 찾지, ‘순한맛’은 찾지 않는다. 하다못해 먹는 것도 매운 음식으로 넘쳐나는 걸 보면 참 힘든 세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중에 이렇듯 깨끗하고 맑은 콘텐츠를, 글을 접하게 되면 저도 모르게 치유받는 느낌이 든다. 최근에 본 영화 <리바운드>가 그랬고, 이 책 <친구 같은 나무 하나쯤은>도 마찬가지다.


“둑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물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보기도 한다. 하지만 풍경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사진이 되기 힘들다는 오랜 경험이 있어 쉽게 셔터를 누르지 못한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계조를 살려 내는 구성이 따라야 원하는 사진이 그려질 수 있다고 했던가. 차분히 앉아 생각을 멈춰 본다. 시선을 한곳에 두니 생각이 나간 자리에 고요한 빛이 들어와 사진 한 장을 남기고 간다. 내가 훨씬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50쪽)” “나무에 기대어 서서 불안한 마음과 분노와 비관을 털어놓자. 화는 건강에 안 좋을 뿐 아니라 지혜롭지 못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다. 나무는 그 모든 이야기를 물러서지 않고 들어줄 것이다. 나무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 앞에서 계절마다 ‘셀카’라도 찍어 보자. 희망을 향해 변해 가는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나무보다 더 커진 당신이 그 나무 앞에 서 있을 것이다.(206쪽)” 비단 나무뿐만이 아니라 나아가 생태계, 자연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에세이집.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면서도 읽으며 부끄러운 부분도 많았다. “나무는 사람을 살리는 생명체인데 사람은 나무를 너무 이해타산적으로만 대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199쪽)” “생각해 보자.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4대 메이저 국제 스포츠 대회를 모두 개최한 나라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가 사는 나라 중 어떤 것이 더 자랑스럽고 자부심이 큰 일인지. (…) 이러한 산림 문화가 정착되기 위해선 무엇보다 무자비한 산림 벌채를 막아야 하며 화마가 휩쓰는 거대 산불 등에 의한 기후 변화와 인위적인 자연 파괴로 인한 재앙 수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삼림은 단순한 탄소 저장소나 배출원만이 아니다. 수만 종의 수목과 함께 그 숲의 품에서 살아가는 많은 동식물의 서식지로 인식해야 한다.(246쪽)”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도 많았다. “나무의 맨 꼭대기 우듬지가 하늘을 치받지 않고 하늘이 허락하는 대로 자라듯, 사시사철 변화에도 역정 내지 않고 순응하며 느리게 자라듯, 비를 맞고 눈을 맞으며 하나도 안 자란 듯 겸손하게 자라는 나무처럼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내가 먼저 나무가 되자. 그렇게 되면 길 위에서 어떤 나무를 만나든 나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72쪽)” ​“눈으로 보기에 앞서 마음으로 보기를 반복하면 내 눈앞의 사물 형태 혹은 색에 얽매이지 않고 그 사물 본연의 모습을 향한 깊이 있는 사색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사물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곧 명상으로 이어지고 명상은 치유로 이어지는 것 아닐까… 사진가가 그런 마음 자세로 사진을 해낼 수 있으려면 다양한 경험과 독서가 실천되어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행천리로 독만권서!(134쪽)” “선조들의 옛 그림에는 여백의 미가 있다고 배웠다. 그 여백은 정말 비어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려지지 않은 것보다 더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야 제대로 보는 것이다.(132쪽)” 인생도 그러하지 않을까. 비어 있는 공간이라고, 시간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시각을 달리해 보면, 혹은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닐까. 허무하고 무상하다고 여겨지는 인생도 그럴지도 모른다.


게으름에 늘 굴복하는 탓에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사진이 취미인 사람으로서 참고하면 좋을 조언도 있었다. “둑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물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보기도 한다. 하지만 풍경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사진이 되기 힘들다는 오랜 경험이 있어 쉽게 셔터를 누르지 못한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계조를 살려 내는 구성이 따라야 원하는 사진이 그려질 수 있다고 했던가. 차분히 앉아 생각을 멈춰 본다. 시선을 한곳에 두니 생각이 나간 자리에 고요한 빛이 들어와 사진 한 장을 남기고 간다. 내가 훨씬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50쪽)”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내는 것이 사진의 특성 중 하나인 기록성이라면, 기록되는 현상을 통해 간접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가능해지는 것도 사진의 특성이기에 우리는 사진으로 말을 대신하려고 한다.(57쪽)” “어쩌면 사진은 영감inspiration에 앞서 두 발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카메라를 메고 걷고 있다. 여전히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248쪽)” 책을 훼손하는 걸 무척 싫어하지만 페이지를 잘라 벽에 붙여 놓고 싶은 사진이 정말 많았다. 인상적인 사진을 한두 장만 꼽기 어려울 정도지만, 가장 충격적이면서 인상 깊었던 사진은 역시 철망을 뚫고 자란 나무 사진이었던 것 같다.



“인공적으로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현상과 조형, 나무가 고통을 이겨 내며 날카로운 철망에 찢기고 다시 아물기를 반복한 것은 몇 년이나 되었을까?(196쪽)” 오래전,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나무’라고 답했던 게 생각난다. 매캐한 매연으로 가득한 대로변에 있는 가로수여도 좋고, 오가는 사람 없어 심심하기는 하겠지만 한적한 시골길에 우뚝 솟은 은행나무여도 좋겠다. 이번 생에 덕을 충분히 쌓으면 다음 생에는 나무로 태어나게 해달라 부탁하고 싶다. 왜냐고? 이유는 딱히 없다. 자연의 일부가 되고 싶기도 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지나가는 새가 잠시 앉았다 갈 수 있는 쉼터가 되고 싶기도 하고, 어쩌다 난 구멍에 다람쥐가 숨었다 갔으면 좋겠다. ​갈등과 고난이 없는 자연의 삶을 살고 싶다. 물론 평창 올림픽 때문에 픽픽 쓰러져 나간, 적게는 수십 년에서 백 년 이상 나이 든 나무들처럼, 길게 살지 못하고 잘려 나갈 수도 있을 거다. 그 역시 일종의 순리 아니겠나. 책을 읽으며 마음이 천천히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느리게 걷자, 느리게 보자, 느리게 생각하자. 그러다 주변도 한번 둘러보자’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책이었다. 모든 것이 자극적이고 급한 세상, 잠시 발길을 멈춰 나무를 올려다보듯 여유를 갖고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시간을 ‘즐기기’에 아주 좋은 책이다.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어쩌면 사진은 영감inspiration에 앞서 두 발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카메라를 메고 걷고 있다. 여전히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 P248

둑길을 따라 걷기도 하고 물 풍경을 카메라에 담아 보기도 한다. 하지만 풍경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사진이 되기 힘들다는 오랜 경험이 있어 쉽게 셔터를 누르지 못한다. 마음의 눈으로 보고 계조를 살려 내는 구성이 따라야 원하는 사진이 그려질 수 있다고 했던가. 차분히 앉아 생각을 멈춰 본다. 시선을 한곳에 두니 생각이 나간 자리에 고요한 빛이 들어와 사진 한 장을 남기고 간다. 내가 훨씬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 - P50

나무에 기대어 서서 불안한 마음과 분노와 비관을 털어놓자. 화는 건강에 안 좋을 뿐 아니라 지혜롭지 못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다. 나무는 그 모든 이야기를 물러서지 않고 들어줄 것이다. 나무에게 친구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 앞에서 계절마다 ‘셀카’라도 찍어 보자. 희망을 향해 변해 가는 자신을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나무보다 더 커진 당신이 그 나무 앞에 서 있을 것이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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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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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사람들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는 듯하다. 뭐, 힘들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겠냐마는, 현대를 살고 있는 나는 감히 포식자에 잡아 먹히던 시절, 마녀사냥이 있던 시절,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절, 세계 전쟁으로 수천만 명이 죽던 시절보다 지금이 인간이라는 종에 있어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인 시대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믿을 구석이 없다.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믿고 싶다, 붙들고 싶다. 하지만 그럴 대상이 없다. 인간은 무언가를 붙들지 않으면 살아 나갈 수 없는 존재다.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진보해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두터운 공허 속에 있다.

그래서 나도 탱크를 원했나 보다.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인 김희재 작가의 장편소설 <탱크>를 읽으며 나도 바랐다. 탱크와 같은 공간이 있기를. 있다면 나도 찾아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로지 나일 수 있는 공간. 그 어떤 방해도 없는 공간. 그러므로 나의 의식과 무의식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 나의 의식과 무의식이 뒤섞여 그저 떠 있을 수 있는 공간. 그래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공간. 내가 그저 나일 수 있는 공간. 나의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어두움 바람 마저 꺼내어 내가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

그래서 둡둡은 이 공간에 매달렸을 것이다. 오롯이 그일 수 있고, 바랄 수 있으니.

얼핏 종교가 없는 종교 소설처럼 보일 수 있는 <탱크>는 실은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전반부를 읽으면서는 계속해서 ‘믿음, 존재, 허무’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하지만 후반부로 나아갈수록 ‘허무’라는 키워드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핑크빛 미래를 그리는 희망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진다는 희망.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거가 된다(267쪽)”는 희망. 살아간다는 희망. 그리고 어떤 식이든, 바람은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희망. 그래서 가장 뭉클했다. 강규산이 퍼레이드를 따라 걷는 장면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실체가 있든 없든, 탱크와 같은 공간이 필요하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정말 원하는 것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책을 추천한다. 흡입력 있게 순식간에 독자를 사로잡는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그간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던 ‘탱크’와 같은 공간, 내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공간을 바라게 되면서 나의 마음을 돌아보게 된다. 얼마나 힘이 있는지 얼마나 지쳤는지, 지금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쉼이 필요할지 살피게 된다.

한겨레출판에서 진행하는 <탱크> 리뷰단, '탱크단' 이벤트에 뽑혀서 읽게 되었던 책. 이렇게 술술 읽히면서도 유려한 문장을 쓰는 작가님의 능력이 부러웠다. 오랜만에 생각하면서 느끼게 하는 독서였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이런 뿌리 없는, 종교도 아니고 작정하고 사람을 홀리는 사이비도 아니고 딱히 자기계발도 아닌, 그야말로 뭣도 아닌 것에 계속 현혹되어 있을 리가 없다. 말이 좋아 자율적 기도 시스템이지, 종교에 자율이 어딨단 말인가. 학습 중에서도 효과가 가장 떨어지는 것이 자율 학습 아니던가. - P50

사람들이 그 공간을 믿는 순간부터 이미 변화는 시작됩니다. 텅 빈 공간에서 기도를 하는 순간,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죠. - P65

컴컴한 공간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과 뿌리 없는 스스로의 상태가 끝도 없이 마음을 괴롭히곤 했다. 그러다 보면 결국 울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처음엔 흐느낌 정도로 시작한 울음은 어느새 오열이 된다. 자의로 울음을 멈추는 건 거의 불가능하고 나중에는 무엇 때문에 울기 시작했는지 잊을 정도로 우는 데 집중하게 된다. 다행히 우는 것도 나름의 효과가 있었다. 스트레스 해소와 마음 정리는 기본이고 덤으로 왠지 홀가분한 기분, 정말 힘든 일은 다 지나갔다는 느낌이 바로 그 효과 중 하나였다. 그런 의미에서 탱크 안에 있는 사람도 나름 필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 P83

특별하다고 생각한 관계는 사실 둡둡이 ‘정상’적인 범주 내에 있을 때만 가능한 관계였다는 사실이 둡둡을 끝없이 괴롭혔다. - P91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그렇게 믿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떤 믿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문제였다. - P106

그런 생각을 하며 사흘 밤을 새운 끝에 양우는 단 하나의 결론에 다다랐다. 결국 떠난 사람은 누군가와 함께한 시간들을 통해서 기억되고 회자된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삶을 나눈다는 것은, 누군가와 어떤 시간을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아니, 어쩌면 삶과 죽음을 통틀어 유일하게 의미 있는 것은 그뿐이다. - P162

언젠가 너는 물었지. 정확히 뭘 믿는 거냐고. 그때 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믿는다, 그것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는다, 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네가 또 물었어. 그러면 탱크는 왜 필요한 거냐고. 나는 기도를 올릴 공간이 필요했다고 말했지. 그러니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니. 너는 그게 나만의 생각이라고 했지.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게 아니라 탱크를 믿는다고. 그리고 바로 그것 때문에 잘못된 숭배가 시작될 수 있다고 말이야. - P181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지만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도 어떤 미래는 오고 그 미래의 모양은 매우 익숙해서 주인공은 그것이 누군가의 꿈이었고 바깥이었던 것을 알아차린다. - P195

"늘 그랬듯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거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쓴다." - P204

이제 손부경은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탱크는 아무것도 아니다. 탱크가 특별해진 것은 탱크가 꼭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탱크는 없어져야 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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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르샤흐 - 잉크 얼룩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다
데이미언 설스 지음, 김정아 옮김 / 갈마바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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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엇일까요?"




살면서 다들 한 번쯤은 어디에선가 봤으리라 생각한다. 위의 카드는 '로르샤흐 잉크 얼룩 검사'에 사용되는 10장의 잉크블롯 중 한 장이다. 사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어렵지 않게 10장을 모두 확인할 수 있지만, 사전에 잉크블롯에 노출되어 그림에 대한 선입견을 가져 버리면 검사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노출을 지양하려 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로르샤흐 검사를 발명한 헤르만 로르샤흐의 생애와 로르샤흐 검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로르샤흐: 잉크 얼룩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다'의 저자 역시 출판사와 상의 끝에 몇 개의 잉크 얼룩만 책에 실었다.

 

초등학교에서 미술 시간에 가끔 했던 수업이 기억난다. 스케치북을 한 장 찢어 가운데에 원하는 색의 물감을 바르고 반으로 접은 뒤 펼치는 활동이었는데, 물감이 묻은 이 종이는 사물함 위에 고이 올려놓고 다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교실 뒤 초록색 게시판에 붙여 전시해놓고는 했다. 어차피 12색의 단순한 물감을 사용하는 데 친구들이 만든 결과물은 신기하게도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같은 그림을 보고 강아지, 곰, 벽에 그린 낙서 등 서로 묘사하는 대상도 달랐다. 그림 자체는 우연의 산물이겠지만, 그 그림을 바라보는 모두의 시각은 그렇게나 달랐다.


로르샤흐 검사가 바로 그런 것이다. 주어진 잉크 얼룩을 보고 이를 묘사하는 내용에 근거해 피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로르샤흐 검사는 "수십 년 동안 논쟁이 이어지고 있지만, (...) 미국 법원에서 증거로 인정되고, 의료보험 회사에서 검사 비용을 환급받을 수 있는 검사가 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직무 평가, 양육권 분쟁, 정신과 진료에 이용"되고 있을 정도로 인정받고 있는 심리검사이다."


하지만 이 검사를 발명한 헤르만 로르샤흐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로르샤흐 박사의 삶을 그의 부모에서부터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은 미국의 작가 겸 번역가인 데이미언 설스가 지은 '로르샤흐: 잉크 얼룩으로 사람의 마음을 읽다'가 처음이라고 한다.


* * *


이런 심리검사를 만든 심리학자라면 왠지 딱딱하고 근엄한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하지만 로르샤흐는 "아이들의 놀이를 요리조리 만지작거리며 혼자 연구하던 젊은 스위스인 정신과 의사이자 아마추어 예술가였다." 책을 읽다 보면 로르샤흐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이지만 예술과 여행을 좋아하고, 조용하지만 한 번 빠진 것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탐닉하는 학자의 모습. 게다가 그는 "키가 178센티미터에 몸이 늘씬하고 탄탄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성큼성큼 빠르게 걸었고, 말투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빠른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꼼꼼하게 종이를 오리거나, 세심하게 나무에 조각을 새길 때는 손끝이 신중하면서도 경쾌하고 날렵했다. 공식 문서, 이를테면 스위스 남자들이 평생 지니고 다니는 군 복무 기록 수첩 같은 곳에는 그의 눈동자가 "갈색" 또는 "회갈색"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회색에 가까운 연푸른색이었다."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도 왠지 미국 드라마를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표지에 크게 박힌 브래드 피트를 닮은 로르샤흐의 얼굴이 이미 뇌리에 박힌 탓일까.




이 책은 크게 아래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로르샤흐의 성장기 > 로르샤흐 잉크 얼룩 검사 개발 과정 > 로르샤흐 검사의 전 세계(서구권) 확산 및 대중화 > 로르샤흐 검사의 발전


주석을 빼고 58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서적이지만, 정신과 의사의 생애와 그가 발명한 심리검사를 다루는 책이지만,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 마치 소설 같다. 작가의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과 번역가의 출중한 능력 덕분이 아닐까 싶다. 책은 로르샤흐의 인생에 대하 굉장히 구체적이고 독자 친화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한 세기 전에 살았던 사람의 전기를 읽는 게 아니라 마치 드라마 한 시즌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이 정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구성할 수 있었던 작가의 자료 수집 능력이 감탄스럽다.


로르샤흐의 성장기는 그의 아버지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로르샤흐가 어떻게 정적이면서 예술을 사랑하고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었는지, 그가 왜 심리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 원인을 제공한 아버지의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로르샤흐의 선택과 성장 과정을 독자들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년기부터 미술에 관심을 가졌던 덕분에 그가 미술을 활용한 심리검사법을 발명할 수 있게 된 것일 테다.


마찬가지로, 로르샤흐의 학자로서의 성장 과정 역시 단순히 그에 대한 얘기뿐만 아니라 그의 두 스승, 오이겐 블로일러와 카를 융의 이야기, 그들의 학문적 성향과 차이, 그것이 로르샤흐에게 미친 영향까지 아주 상세하지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로르샤흐를 이해하는 데 아주 크게 도움이 되는 대목이다.


로르샤흐는 러시아 문화와 사람들에 큰 관심을 보였다. 스위스에서부터 러시아 출신 사람들을 자주 만났고, 큰 영향도 받았으며, 결국 결혼도 러시아인인 올가와 하게 된다. 러시아를 여행하고, 머물러보기도 하고, 유럽과는 달리 여성이 단순히 집에서 청소나 하고 애를 보는 사람이 아닌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사회 활동을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러시아 문화에 그는 큰 감명을 받았다. "로르샤흐에게 러시아다움이란 곧 느끼는 것이었다. 강렬하고 진심 어린 감정에 맞닿는 것, 그런 감정을 서로 나누는 것이었다. 그는 편지로 톨스토이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도, 요령을 부리지 않아도, 유식한 말을 쏟아내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부터 이해받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것입니다.""


로르샤흐는 여성인권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1903년 7월 4일, 18세의 로르샤흐는 스카푸시아의 관례대로 회원들 앞에서 연설했다. 완전한 성 평등을 목청껏 호소한 이 연설은 <여성해방> 강연이라고 불렸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여성이 "본래 신체, 지능, 도덕에서 남자에 뒤처지지 않고", 논리에서는 남자와 맞먹을뿐더러 용기는 남자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모자라지 않다. 그러므로 남자가 그저 "여자들의 계산서나 지불하는 연금"이 아니듯, 여자도 그저 "아이를 생산하려고"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로르샤흐는 여성을 '하등한 처우를 받고 있으므로 인권을 증진시켜주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남성과 같은 하나의 개체로 보았다. "프로이트는 여성을 '우리'와 사뭇 다른 기이한 심리를 지닌 존재로 봤고, 융은 여성이 주로 집안일에 관심을 보이며 지성보다 감정을 더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글을 자주 발표했다. 하지만 김나지움에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했던 로르샤흐는 물론 블로일러 역시 프로이트나 융과 달리 그런 편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이 여성을 중심에 놓고 학설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 * *


중반부를 지나며 책은 로르샤흐 검사의 완성과 이것이 자리 잡에 된 과정, 바다 건너 미국에 발을 디디며 광고와 영화, TV 쇼와 같은 대중문화와 투자 시장에까지 침투하게 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검사 자체보다는 로르샤흐라는 사람이 더 흥미로웠고 인상 깊었다. 그는 늘 박스를 벗어나고자 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야말로 눈앞에 닥친 환경의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사람, 어디에서든 지성과 감성이 어우러진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는 평생에 걸친 선택의 연속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로르샤흐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한 세기가 다 지난 지금까지도 활발하게 필드에서 사용되고 있는 잉크 얼룩으로 만든 심리검사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에는 그의 부모님, 두 동생, 러시아의 트레구보프, 그의 두 스승 블로일러와 융, 아내 올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환자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그가 생활한 스위스와 독일, 러시아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 덕분에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잉크 얼룩을 보고 우리의 마음과 그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로르샤흐 검사가 일깨우는 가장 가치 있는 생각은 감정이입이 말이나 이야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감정이입은 곧 통찰하는 힘이다. 이때 우리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 느낀 다음, 거기에서 자신을 보며 양쪽을 연결할 수 있는 무엇을 본다. 감정이입은 반사 환각이자 움직임 반응이다. 그래서 상상이나 어떤 감각뿐 아니라 섬세하고 정확한 지각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려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느껴야 한다.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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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측면이 좀 더 낫습니다만
하완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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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을 위로하는 내용의 가볍게 쓰인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호불호가 있다기 보다는 그냥 처음부터 손이 가지 않았다. 서점에서 잠시 대충 훑어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감이 오는데 이걸 굳이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사서 읽을 필요가 있을까. ‘네 자신을 믿어’,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마’, ‘해도해도 끝 없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 필요 있나, 되는대로 살자’. 어차피 다 같은 말을 하고 있을 텐데.


굳이 아등바등 살 필요 없다, 는 체념식의 에세이는 사실 읽고 난 후 자연스럽게 ‘맞아! 나도 이제 너무 열심히 살지 말아야겠다.’ 다짐하게 된다. 달라질 내일의 일상을 기대하면서 잠에 들지만, 아침에 다시 일어나 출근하면 마주하는 건 전쟁같은 일상이다. 무엇 하나 대충 넘길 수 없는 빡빡한 일상. 대충 넘기다가 실수가 생기면 결국 내 얼굴에 침 뱉는 격인 상황에서 누가 대충하겠나. ‘대충 살자’는 메시지가 다가올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나는 사실 하완 작가의 전작인 ‘하마터먼 열심히 살 뻔했다’도 읽지 않았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오랜 기간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그렇게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쳤다. 하완 작가의 신작 ‘저는 측면이 좀 더 낫습니다만’을 읽게된 계기는 단순하다.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에세이를 싫어한다면서 애시당초 이벤트에 참여한 이유는 뭐냐. 미리보기를 통해 본 책의 내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숨겨진 쌍둥이인가?’ ‘어떻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거지?’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난 뒤 책의 측면에는 북마크가 한 서른개 쯤은 붙어 있었다.


​* * *


하완 작가는 책을 통해 ‘측면’이 대표하는 일반적으로 보통의 모습이라 여겨지는 것과는 다른 작가의 모습을 간략하지만 효과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사실 너무 내 얘기같아서 개인적인 친근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줄거리를 설명할 수 없는 책이니, 깊게 공감했던 구절들을 들려주는 게 이 책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지만 인정을 바라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 이 바닥의 생리가 그렇다. 아쉬운 쪽이 언제나 을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사람은 타인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p.23)


“솔직히 나를 찾는 곳이 많아지니 조금 두렵다. 살면서 한 번도 주목받아보지 못한 자가 갑자기 주목을 받으면 기쁘기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는 기분.” (p.25)


“여행을 좋아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스스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누군가가 가자고, 가자고, 옆구리를 찔러야 그럼 오랜만에 바람 좀 쐬고 올까 하며 떠나는 타입이다. 그렇게 여행을 가서 누구보다 신나게 노는 걸 보면 여행을 좋아하는 게 분명한데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왜 이러는 걸까?


나만 이러는 줄 알았는데 이게 집순이 집돌이들의 특징이란다. 집순이 집돌이 레벨 테스트도 있다. 테스트 항목 중 박장대소하며 공감한 걸 몇 개 소개하자면 이렇다.


ㅁ 나가는 것 자체가 스케줄이라 생각한다.

ㅁ 나가기 전까진 귀찮은데 막상 나가면 잘 논다.

ㅁ 약속이 취소되면 은근히 후련하고 기분이 좋다.


나는 영락없는 집돌이다.” (p.57)


“가끔은 내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속에 어린아이가 들어앉아 있는 듯한 기분을 자주 느낀다. 나는 아직 어린애인데 겉모습이 이렇게 늙어버려 어쩔 수 없이 어른인 척하면서 산다.” (p.80)


“맘에 드는 스웨트셔츠 코디가 있다. 스웨트셔츠와 반바지흫 매치해 입는 걸 좋아한다. 활동적이면서 소년스러운 귀여움이 있달까. 하지만 그렇게 입은 기억은 거의 없다. 나이가 걸림돌이 돼서는 아니고 온도 차이 때문이다. 스웨트셔츠를 꺼내 입을 정도의 날씨라면 더위는 지나갔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인데, 그런 날씨에 반바지를 입으면 다리가 너무 춥다. 그리하여 내게 스웨트셔츠와 반바지를 함께 입는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상체의 더위를 견디든가 하체의 추위를 견디든가.” (p.84-85)


“처음부터 “내 취향이야.”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취향은 한 번에 얻어지지 않고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얻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첫인상만으로 안 맞는다 단정 짓고 멀리하는 건 조금 아까운 일이다. 물론 여러 번 시도한 후에도 여전히 싫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의 시도로 거부한 것이 평생 즐길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 누가 아는가.” (p.128-129)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커피를 즐기기 시작했을까. 아쉽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 걸 기억하고 있어야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갈 텐데 나는 기억력이 별로다. 지나간 일들이 잘 생각나질 않는다. 소심한 데 반해 무심한 구석도 있어서 자잘한 일들은 다 잊어버린다. 그래서 과거의 세세한 일들과 감정을 기억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조금 부럽다.” (p.131)


“경쟁력을 가지는 것. 남들보다 내가 낫다는 걸 증명하는 것. 그 방식에 지쳐버렸다.” (p.211)


“그러나 허세였다. 착각이었고, 물론 그들의 영화는 끝내주게 좋았지만 내 취향의 이면엔 특별하고픈 욕망이 더 컸던 것 같다. 영화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옷도 다르게 입고,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책을 읽었다. 유행하는 것은 일부러 피했다. 그러면 특별해지는 줄 알았다. 아니,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보면 이런 의문도 생겼다. 내가 이걸 진짜 좋아하는 걸까, 아리면 남들은 안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걸까.” (p.226)


“그릇이 작으니 많이 담지 않아야 넘치지 않는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넘치는 건 괴로움이다. 소박하게, 분수에 맞게 살고 싶다. 비워내고 가볍게 살고 싶다.” (p.271)


* * *


비록 앞서 나는 이런 류의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읽으면 위로를 받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원리는 아마도 이것일 테다. “아, 나 혼자가 아니구나. 나 같은 사람이 더 있구나.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 나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됨으로써 받게 되는 위로인 것 같다.


역으로 ‘일반적’이고 ‘보통’이라고 여겨지는 스테레오타입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나, 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활동적이지 않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더 안정감을 느낀다. 이런 나는 스테레오타입의 정반대에 서 있는, 좋게 말하면 내향적인 사람이고 악의적으로 표현하면 찌질이다. 예전에는 그런 내 모습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활발한 척을 하고,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제스처를 크게 더 많이 하면서 다이내믹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고, 리액션을 열심히 해서 대화를 주도하지는 않지만 참여하고 있는 느낌은 주고자 노력했다. 이 모든 노력들이 헛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에세이이렇듯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많은 작가들과 사회적 인플루언서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 준 덕분이다. “너 자체만으로도 좋아”, “꾸밀 필요 없어, 너는 너야”, “나는 집에 있는 게 좋아. 너도 그래?”라며 목소리를 내준 이들이 있었던 덕분이다(“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개소리 말고). 그런 의미에선 반성한다. 내가 오만했다. ‘슬쩍 훑어보니 대충 무슨 얘기할지 다 알겠는데, 내가 굳이 이 책을 사서 봐야해?’ 그들이 그런 공감백서를 쓰고 널리 널리 퍼뜨려 준 덕분에 나는 내 자신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될 수 있었다. 되려 감사를 보내야하겠다.

그릇이 작으니 많이 담지 않아야 넘치지 않는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넘치는 건 괴로움이다. 소박하게, 분수에 맞게 살고 싶다. 비워내고 가볍게 살고 싶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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