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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의 정석 - 당신의 후반부 인생을 지탱해 줄 4개의 기둥
문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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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retirement란 차에서 내릴 때가 아니라 바퀴tire를 갈아re 끼울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66쪽)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실제 평균 수명이 100세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인간의 수명은 길어졌다. 아주 많이. 그말인즉슨, 정년퇴임 연령이라는 60~65세 이후에도 여생이 수십년이나 된다는 의미다. 사회 및 경제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정년 이후 우리는 직업도, 건강도, 때에 따라서는 취미도 잃는다는 데 있다. 수십년 동안 돈도 벌지 않고 하는 것도 없이 대체 어떻게 산단 말인가.


그렇기에 취직을 하고 나면 생각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은퇴 이후의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계발, 이직 등등 고민해야 할 건 많을 거다. 그러나 은퇴 후 삶도 건강처럼 적금 들 듯이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그 때 닥쳐서 무언가를 하려면 늦는다. 우리네 부모님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아닌 분들도 물론 있겠지만).



그래서 관심을 갖고 읽게 된 문진수 사회적금융연구원 원장의 <은퇴의 정석>. 아직 중년도 되지 않은 나이에 무슨 은퇴 관련 책이냐, 싶을 수도 있지만. 은퇴는 언제 생각해도 이르지 않다. 심지어 요즘은 젊을 때 열심히 달려서 조기 은퇴하는 ‘파이어족’의 삶이 또 유행이지 않은가.


<은퇴의 정석>은 크게 세 파트로 구분된다. 1장은 생애 주기 곡선의 변화, 정년과 은퇴를 바라보는 시선, 반환점을 통과한 이들의 실제 삶, 삶의 후반부를 떠받치는 기둥에 관하여 논한다. 2장은 본론으로 들어가, 은퇴 후 삶에서 중요한 네 기둥, 즉 돈, 건강, 놀이, 관계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솔루션을 제시한다. 좋은 삶을 살려면 어떤 요소가 필요한지 살핀다. 3장은 주체적인 태도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저자의 제언이 담겨 있다.


미국 심리학자 캐럴 리프Carol Ryff에 따르면, “좋은 삶을 구성하는 6가지 요소”는 "자기 수용, 개인의 성장, 자율성, 숙련, 만족스러운 관계, 삶의 목적”(12쪽)이라고 한다. 안다, 우리 모두가 안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도 심적으로도 안정이 필요하다는 걸.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고, 방법을 모르는 이가 태반이라는 게 또 다른 문제다.


우리는 대개 중장년을 거친 뒤의 인생 곡선을 하향 곡선으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아래의 그림처럼, 마치 낙타의 등과 같이 두 개의 봉우리가 존재하는 그래프가 인생 곡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명이 짧았던 머나먼 과거였다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산 모양의 그래프가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80세를 훌쩍 넘어 사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진 지금, 후반부 인생의 삶의 질을 그래도 중간으로라도 유지하기 위해서 이제는 산봉우리 그래프는 맞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도 일견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양봉 그래프를 만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년에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돈, 건강, 놀이, 관계’라고 저자는 제시한다.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건강이 전제되어야 하며, 자신만의 놀이가 있어야 하고, 주변 사람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한다”(58쪽)


책에 제시된 2023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60대 이상 인구의 생활비 충당 방식은 아래와 같다.


- 돈 걱정 없이 사는 사람: 10%

- 연금 소득으로 사는 사람: 22%

- 계속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 44%

-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 24%


우리는 막연하게 ‘나이 들면 좀 편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돈은 절로 생기지 않는다. 돈은 벌어야 한다.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하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저금은 어렵다. 아이가 있다면 (부부의 수입이 높지 않은 이상) 불가능에 가깝다.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한 두 쌍의 부부 중 자식을 낳고 기른 부부는 하위 64%에 포함되어 있었고, 딩크족으로 산 부부는 예외 없이 상위 10%에 들어 있었다.”(77쪽) 


그래도 결국 해답은 아끼는 것, 그리고 모으는 것이다. 뛰어난 재산 운용 능력이 있어서 한 해에 몇십 퍼센트 씩 자산을 늘릴 수 있는 게 아니라면(이 역시 기본 자산이 있어야 가능하다), 답은 하나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답을 기대했다면 조금 실망할 수 있지만, 정석은 괜히 정석이 아니다.


건강 역시 말할 것도 없다. 아프면 돈이고 뭐고 다 소용 없다. 게다가 아프면 나만 힘든 게 아니라 온 가족이 고생한다. 젊을 때 건강은 노년의 건강을 빌려다 쓰는 거라고, 저축처럼 건강도 젊어서 관리해야 하는데. 아는데. 그게 참 쉽지 않다.


특히 공감되는 부분은 ‘놀이’였다. “퇴직과 정년, 은퇴의 강을 건너면 보통 짧은 휴식기를 갖는다. (…) 하지만 여가와 휴식의 유효 기간은 길지 않다. 반복될수록 흥미가 줄고 한계 효용이 체감한다. (…) 그리고 이 시기가 지나며 불안과 우울, 공허감 같은 감정이 밀려온다. 긴 세월 동안 일에 중독된 사람들이 마주하는, 일종의 금단현상이다.”(111쪽) 그러나 정작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다. 결국 종일 집에서 TV나 스마트폰을 보며 하루를 보낸다. “우리나라 중장년과 시니어들은 어떻게 여가를 보내고 있을까? (…) 40대 이상 연령층의 주중 여가 활동 내용을 나타낸 것이다. 동영상/콘텐츠를 시청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비율은 매우 높지만 취미나 스포츠, 문화 예술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많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쉬는 것 이외에 ‘놀이’에 할애하는 시간은 적다는 뜻이다.(134쪽) 


우리 부모님만 봐도 알 수 있다(물론 아직 경제활동을 하고 계시지만 간혹 쉬는 기간이 생길 때). 주민센터나 구청에서 진행하는 문화 강좌 같은 것을 추천해 드리려고 해도, 일단 그마저도 ‘수강신청’이 치열하고,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꺼려하는 경향 탓에, 결국 종일 집에서 TV를 보시거나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신다. 유일한 활동은 하루 두 번, 2시간 씩 산책 나가시는 것. 그거라도 하셔서 정말 다행이다 싶다.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정년퇴임 후 다시 돈 버는 일에 나설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도 놀이가 없는 이보다 자기만의 놀이를 가진 이가 훨씬 건강한 삶을 살고 있었다.”(132쪽) 사실 당연한 이야기다. 모두 아는 이야기인데, 이게 정답이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살지 않는다.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그 안에서 기쁨과 보람을 얻는다. 누군가의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 누군가를 흉내 내려고 애쓰지 않고, 고유한 색깔과 모양으로 인생이라는 작품을 조각해 나간다.”(250쪽) 이는 비단 인생 후반부를 사는 사람만이 아니라 전연령대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주체적으로 삶을 사는 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게 어렵다.


“인생은 시간, 돈, 꿈의 함수다”(251쪽) 결국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는 누구에게나 (양은 다를지언정) 동일하게 주어진다. 그것을 얼만큼 불리고 빼고 곱하고 나누어서 어떤 값을 도출하는지는 (거의)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다. ‘주체적인 삶’, ‘주인이 되는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 책. 삶의 방향과 가치, 혹은 은퇴 이후의 삶에 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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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 복지 - 공장식 축산을 넘어, 한국식 동물복지 농장의 모든 것
윤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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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종식 선언을 한 지 약 1년이 지났다.


팬데믹을 언제 겪었냐는 양, 사람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듯 보인다. 영화관에서는 아무런 불편한 없이 음료를 마시고, 공공장소에서도 마치 내 침을 최대한 멀리 분사하겠다는 듯이 공중에 대고 재채기를 하는 사람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확진되고 있고, 이제는 코로나19를 넘어 타국에서는 기존의 그리고 새로운 감염병이 등장해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다.


인간이 동물을 가축화한 이래로 인간과 동물을 전염병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항체가 없던 초기에는 물론 치명적이었겠지만, 가축 산업이 본격적으로 공장화되기 전까지는 그리고 지구가 ‘세계촌’이 되기 전까지 인간은 그럭저럭 괜찮았을 것이다(흑사병 같은 특이 사례를 제외하고). 하지만 가축업이 공장화가 되어 동물에게 온갖 약물을 투입하고 비행기가 전 세계를 누비며 세계를 하나의 마을로 만들어 버린 뒤로 전염병은 인간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다. 당장 3년 전 경험하지 않았나.


“왜 돼지가 행복해야 할까?”




윤진현 전남대 동물자원학부 교수가 최근 출간한 <돼지 복지>는 묻는다. 왜 돼지가 행복해야 하냐고. 가장 간단하고도 직관적인 답은 이것이다. 인간이 돼지를 먹기 때문이다. 돼지의 복지와 건강이 인간의 건강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보건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용된 항생제는 사육 단계에서 항생제 내성균의 발현과 전이를 초래하고, 결국 그 화살은 인간에게 돌아와 인간의 건강까지 위협하게 된다. 가축 사육 단계에서 항생제를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200)


“최근 슈퍼 박테리아라고 불리는, 여러 가지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병원체들이 생겨난 것도 그동안 축산농가에서 항생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해 온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밝혀지기도 했다. 이제는 항생제 내성균이 인간의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다. 가축에서 시작된 항생제 내성균이 사람에게 전파되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2019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10가지 위험 중 하나로 항생제 내성균을 꼽기도 했다.” (219)


그리고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간다면, 동물들에게도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도 고통과 통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유일한 지성체이자 의식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비록 다른 동물 대비 두뇌가 크게 발달해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만이 의식이 있고 고통을 느낀다는 건 오만하며 잘못된 생각이다.


“고통과 스트레스를 경험하고 있는 실험용 생쥐들은 안구 주위가 둥근형에서 타원형으로 변하고 콧잔등과 뺨이 부풀며 귀는 등 쪽으로 젖혀지고 수염은 얼굴 반대 방향으로 뻗친다.” (112)


살아 있는 문어나 주꾸미를 끓는 물에 넣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게 된다. 다른 생명체를 펄펄 끓는 물에 산 채로 집어넣다니. 입장을 바꿔서 한 번만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 단번에 이해될 것이다. 


“관행 농가에서는 새끼 돼지가 생후 2~3일이 되었을 때 거세와 꼬리 자르기를 한다.” (33)


“산란계 품종의 수평아리는 알을 낳지 못하고 육계보다는 성장이 뒤처지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분쇄기로 이동 후 생을 마감한다. 분쇄된 사체는 ‘생산성’이 더 나은 동료들의 먹이로 이용된다.” (90)


마취도 하지 않은 채로 새끼 돼지를 물리적으로 거세하고(칼집을 내어 나머지는 잡아 뜯는다고 책에 적혀 있다,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꼬리를 잘라 낸다. 막 태어난 수컷 병아리는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산 채로 분쇄기에 넣어져 다른 병아리의 사료가 된다. 


“(…)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설과 기술이 농장동물의 삶에 긍정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꾸준히 개발되고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산 시스템에서 농장동물들의 행동, 습성, 감정 등은 고려되지 않는다.” (89)


틀에 옆으로 누운 채 기계적으로 새끼 돼지들에게 수유를 하고 있는 어미 돼지의 모습.


공동 사육 공간에서 지푸라기 위해 누워 수유하고 쉬고 있는 새끼 돼지와 어미 돼지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한 이래로 인간의 바이오매스를 급격히 늘려 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먹이가 되는 가축의 바이오매스도 급격히 늘었다. 그리고 또 그 과정에서 야생 동물의 바이오매스는 급속도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나의 종이 전 행성에 걸친 생태계 전체를 이렇게나 재편하다니, 어떤 면에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만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다. 다른 생명체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대기를 데우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상기후와 전쟁, 식량난 등의 형태로 고스란히 인간에게 돌아오고 있다.



나는 조금 감정적으로 접근했지만, 윤진현 교수의 <돼지 복지>는 동물복지를 조금 더 실증적으로 탐구하고, 데이터를 제시하며 현실적으로 복지를 고려한 농장 운영 방안을 제안한다. 


“이 두 가지 문항*의 결과로만 보면, 동물복지 축산농장 인증제도의 참여율이 저조한 이유는 양돈 농가가 동물복지에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동물복지 농장을 운영하는 것이 투자 대비 수익이 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306)

* 동물복지 농장으로 전환할 의향이 있는지, 동물복지 농장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 예상되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양돈 농가의 60%는 동물복지 농장으로 전환할 의향을 보인다. 그러나 정작 실제 인증을 받은 농장은 0.3%에 그친다. 그들에게 농장은 생업인데, 그것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없다면 손해를 내면서 복지 인증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까닭이다. 해외 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며 우리나라에 적용 가능한 방안을 제시하는 이 책을 축산업 관계자와 정부 관계자들이 꼭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건강한 먹거리를 찾는 소비자라면 마트에 진열된 돼지고기를 구입할 때도 당연히 원산지, 신선도, 친환경, 무항생제 등 최소한의 항목은 따져보고 구입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마도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어떻게 키워지는지 그 진실을 알게 된다면 다른 식재료를 구입할 때와 달리 불편한 감정을 마주해야 하기에 더욱 쉽게 외면한 것이 아닐까.
- P39

최근 슈퍼 박테리아라고 불리는, 여러 가지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병원체들이 생겨난 것도 그동안 축산농가에서 항생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해 온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밝혀지기도 했다. 이제는 항생제 내성균이 인간의 건강까지 위협하고 있다. 가축에서 시작된 항생제 내성균이 사람에게 전파되면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2019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10가지 위험 중 하나로 항생제 내성균을 꼽기도 했다.
- P219

양적인 면에서 보면, 전체 항생제 사용량 중 축산농가의 단위당 항생제 사용량이 가장 많다. 특히 양돈 농가는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다. 현대식 양돈 농가의 경우 돼지의 성장 정체를 유발하는 질병들이 전 세계적으로 만연해 있는데, 이러한 사육 환경에서 항생제는 가장 저렴하고 일손이 덜 가는 해결 방법이다. 그러나 항생제의 약효는 오래가지 않는다. 바로 병원균들이 내성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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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한 미식가 - 나를 돌보고 남을 살리는 초식마녀 식탁 에세이
초식마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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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6억 1900만 명입니다. 우리는 사흘마다 그만큼의 동물을 죽입니다.” (236)


인간만큼 동족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생명을 희생시킨 종이 있었을까.


어려서는 어떤 날에만 먹을 수 있던 고기가 이제는 일상적으로 반찬, 국, 찌개가 되어 밥상에 올라온다. 나는 고기를 찾아먹는 편은 아니었다. 돼지고기에서는 돼지 냄새가 났고, 닭고기는 퍽퍽했다. 소고기는 비쌌다. 그랬던 나의 식단에 이제 고기는 일상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처음에는 큰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점차 환경에 관심을 갖고 이런저런 지식을 접하다 보니, 인간 식량으로 소비하기 위해 기르는 가축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우리의 예상을 훨씬 웃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의류와 가축 산업이 교통 산업보다 탄소 배출에 기여하는 바가 더 크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비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완전한 비건이 될 자신은 없지만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적어도 고기 없는 식단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메뉴가 고민이었다. 고기를 제외하니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내게 좋은 영감을 줄 것 같아 읽게 된 책이 바로 초식마녀의 <비건한 미식가>이다.


그림을 통해 비건에 대한 독자들의 마음속 문턱을 낮추며 주목을 받았다는 비건 인플루언서 ‘초식마녀’가 비건 메뉴 레시피와 함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 에세이 <비건한 미식가>는 비건 요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흔히들 생각하듯 ‘비건이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렵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답하듯 사람들과 소통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더불어,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가 아니라 냉장고만 열면 바로 꺼낼 수 있는 일상적인 식재료로 만들 수 있는 비건 음식 레시피를 그림으로 공유해 주어, 독자가 쉽게 시도할 수 있도록 돕는다. 토마토 비빔밥, 애호박 파스타, 김치 파스타, 고사리전, 고추장찌개(원래 좋아하는 메뉴인데, 있어서 반가웠다!), 토마토 알리오 올리오, 사과 바질 샐러드 등.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듯 ‘나중에 나도 한번 해 봐야겠다’ 싶은 메뉴에 잔뜩 북마크를 붙여 놓았다.



“운이 좋아 누리는 권리를 당연히 여기면 안 됩니다. 끼니마다 고기 반찬을 먹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아니라 당장 문제가 보이지 않으니 그래도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244)


지금까지 우리 인간은 너무 편한 삶을 살아 왔다. 그 결과가 어제와 오늘의 날씨다. 최고 기온은 매해 경신되고, 온열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 수도 계속해서 늘고 있다. ‘이상기후’라고 부르던 아노말리는 이제 뉴노멀이 되어 ‘날씨가 왜 이러지’가 아니라 ‘올해도 만만치 않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모두 인간이 자초한 결과다. 자동차를 타고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고, 계절마다 옷을 사고, 끼니마다 고기를 먹고, 죄책감 없이 일회용품을 사용하고. 일주일에 우리 집에서 나오는 일반/재활용 쓰레기의 양을 보면, 2인 가정에서 대체 이렇게 나올 일인가 싶다.


늘 마음에 죄책감을 품고 있지만, 자동차를 타지 않을 수 없고, 옷을 사지 않을 수 없고, 고기도 먹지 않을 수 없고, 일회용품도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이 모든 걸 그만두려면 자연인이 되어 산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할 수 있는 게 분명 있을 거다. 앞서 말했듯, 완전히 비건으로 전향하기란 현대 사회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고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그러나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적어도 한 끼 정도는 비건식으로 고기 없이, 가능하다면 달걀이나 버터도 쓰지 않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간단히 만들어 먹음으로써 일보 전진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금씩 조금씩 노력의 범위를 확장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꼭 완전 비건은 아니더라도, 어떤 종류든 비건식에 도전하고 싶은데 어떤 메뉴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독자에게 추천한다. 개인적으로는 자주 들춰 볼 것 같은 ‘레시피북’이다.


​* * * * *


‘물 발자국’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네덜란드의 물 공학 교수인 아르옌 훅스트라Arjen Y. Hoekstra가 처음 도입한 개념인 물 발자국은 제품 생산부터 소비, 폐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물이 얼마나 소비되었는지 나타내는 지표입니다. 물 발자국이 적을수록 환경에 부담을 덜 줍니다. 채식은 평균적으로 육식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물 발자국을 남깁니다. (58)



소수에게 나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얼마 전 ‘극단적 채식이 건강을 망친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으면서도 느꼈습니다. 채식의 건강적 이점을 말하면서도, 영양 균형을 고려하지 않으면 뼈 건강을 해치고 탈모, 피로감 등을 느낄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극단적인 ‘채식’이라는 말을 극단적인 ‘식단’ 혹은 극단적인 ‘육식’으로 바꾸어도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영양 균형을 고려하지 않는 식단은 당연히 건강에 해롭습니다. 닭가슴살을 매일 먹는 극단적인 육식 식단이 건강식처럼 대중화된 한국 사회에서 소수의 채식주의자를 저격하듯 ‘극단적 채식’이라는 자극적인 이름을 붙이는 일이 옳은지, 그저 다수의 호응을 끌어내기 좋은 편한 길을 택하는 것은 아닌지, 새로운 언어는 새로운 사고를 창조하는 일인 만큼 신중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66)

→ 이건 특히 우리나라에서 취약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가령 미국 같은 경우에는 워낙 다양한 사람이 섞여 살다 보니 조금 특이하다고 해서 주의를 기울이거나 튀는 경우가 많지 않다. 개인주의가 워낙 강한 탓도 있기는 하나, 어쨌든 덕분에 소위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조금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걸 테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똘똘 뭉치는 게 당연했고, 그렇게 역사를 바꿔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수’가 너무 당연한 문화다. 개인주의가 약하기도 하거니와 눈치까지 보는 문화이기 때문에 ‘소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더 눈에 띄고, 눈에 띄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뭐든 일장일단이나, 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으나 부당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문화다.


며칠 전 유튜브에서 칼을 휘두르는 식물을 봤습니다. 잎을 찢은 참가자가 입장하자 식물의 전기 신호를 감지하는 로봇 팔이 칼을 쥔 채로 격하게 움직였습니다. 마치 자신을 공격한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가 다가오지 못하게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225)

→ 사람은 참 복잡하면서도 아둔하다. 어째서 자신만이 고등 생명체이며, 자신만이 의식을 지닌다고 생각할까? IQ가 80에도 이른다는 문어를 끓는 물에 바로 집어넣고, 살아있는 장어의 머리를 못에 박은 뒤 껍질을 벗기며, 산낙지를 조각조각 내고는 잔인함을 신선함으로 둔갑시킨다. 그렇다고 나도 그런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안 먹느냐? 아니, 잘 먹는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생명의 에너지를 흡수할 거면 최소한의 감사함을 가지고 인도적으로 다듬자는 거다. TV에서 살아 있는 해산물을 뜨거운 물에 바로 넣는 모습이 나올 때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불쌍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돌린다. 똑똑한 벨루가는 자신이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고 한다. 꼬리에 그물이 감긴 고래는 인간이 탄 배 근처를 배회하며 도움을 요청한다.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모두 의식이 있다. 그 점을 잘 상기하며 살면 조금 더 좋은 세상이 될 텐데.


비거니즘은 동물을 학대, 착취, 살상하는 산업에 반대하는 일종의 불매 운동이지, 생존을 위해 생명을 취해야만 하는 동물의 숙명인 섭식의 원리를 부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226)



그러나 이분법적으로 생각해봐도, 육식이 채식보다 더 많은 식물을 죽이는 식단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마존의 70퍼센트 이상이 축산업으로 인해 벌목되었습니다. 온실가스의 주범이기도 한 고기와 유제품은 생산되기 위해 전 세계 농지의 83퍼센트를 차지하지만 18퍼센트의 칼로리밖에 제공하지 못합니다. 같은 칼로리를 섭취한다고 가정했을 때, 채소를 하나도 먹지 않고 육식만 하더라도 비건으로 먹을 때보다 더 많은 식물을 해치게 됩니다. 고기 대신 제철 채소와 과일을 ‘직접’ 먹으면 동물뿐만 아니라 더 많은 식물도 살릴 수 있습니다. (228)



뜨거워지는 지구에서 인간만이 자신이 필 때와 질 때를 알지 못하고 중독과 무기력의 굴레에 빠져 일생을 시달리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29)



운이 좋아 누리는 권리를 당연히 여기면 안됩니다. 끼니마다 고기 반찬을 먹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아니라 당장 문제가 보이지 않으니 그래도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244)

→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니 일단 하고 보는 것 중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쓰레기 문제. 2025년이 지나면 이제 서울은 어디에 쓰레기를 대신 묻어달라고 간청하게 될까?



사람들은 흔히 자신을 미미한 먼지처럼 느끼곤 합니다. 무한한 우주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유일한 자신을 80억분의 1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비싼 애호박 앞에서 망설이는 스스로를 ‘평범한 소시민’으로 축소하며 자신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방금 식사를 마친 당신은 도축장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도살을 공모한 셈이다’라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처럼 우리의 작은 선택 하나가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 영향이 어디까지 어떻게 퍼질지 전부 알 수는 없지만, 부유하거나 유명하지 않아도 당신의 모든 선택은 끊임없이 세상을 바꾼다는 사실을 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해 이상하리만치 길었던 장마는 홍수를 야기했고, 저는 홍수를 피해 높은 지붕으로, 산비탈의 절로 도망친 소들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안전’하게 ‘구출’된 그들이 돌아간 곳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축사입니다. (257)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운이 좋아 누리는 권리를 당연히 여기면 안됩니다. 끼니마다 고기 반찬을 먹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것은 우리에게 그러한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아니라 당장 문제가 보이지 않으니 그래도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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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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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처럼 세상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96쪽)


언어에 대해 생각한다. 단어와 음을 생각한다. 세상에 있는 수많은 언어가 생기게 된 과정을 상상해 본다. 인간을 생각한다. 이처럼 진보한 문명과 기술을 지니게 된 인간의 역사를 생각한다. 그 중심에 언어가 있다.




문보영 시인의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은 귀엽고 따뜻한 아이오와 석 달 살기(?)를 하는 동안 작성한 일기장이지만, 한편으로는 언어와 사람의 관계를 떠올리게 하는 에세이이기도 하다. 다양한 언어를 모국어 또는 이중 언어로 사용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아이오와 글쓰기 프로그램, IWP에 모인 작가들은 (문보영 시인이 관찰하여 기술한 바에 따르면) 누가 봐도 예술인, 작가들이다. 성향도, 생각도, 출신도 다양한 이들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영어로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신의 언어로 다양한 것을 상상하며 그것을 다시 영어로 표현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언어가 파괴되기도 하고 또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하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언어가 있는 덕분이다.


너무 귀엽다.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내가 사는 곳을 생각한다. 나의 집, 나의 동네, 나의 나라.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은가요?”(28쪽)라고 몇 번이고 던지는 질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우리는 늘 타지를 꿈꾼다. “내가 사는 곳”을 벗어나려 발버둥친다. 하지만 결국엔 돌아오고야 만다. 돌아오고 싶어하고야 만다. “내가 사는 곳”의 이중성. “내가 사는 곳”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의 모순. 벗어나길 바라면서 돌아오고 싶어하는. 


문득 책에 나온 "Iowa is generous enough to forget things and supportive enough to remember things."(262쪽)이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아이오와는 네가 그걸 잊도록 널 관대하게 만들고, 네가 그걸 충분히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거구나"(262쪽). 


아이오와도 그렇게 상반된 것을 가능케 하는 곳이다. “내가 살던 곳”에 관한 것을 잊을 수 있도록 하면서도 기억하고 싶은 것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곳. 조금은 파괴적인 번역이지만, ‘모든 걸 기억하지 않아도 되지만, 충분히 기억할 수 있는 곳. 아이오와는 그 모든 것을 포용한다.’


따뜻하고 귀엽고 시적인 문보영 시인님의 아이오와 석 달 살기 일기장,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햇살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만지면 책상보다 살짝 더 따뜻할 것만 같은 표지의 매력적인 책. 점점 더워지는 날씨에 카페의 외부 테이블에 앉아 해를 맞으며 읽기에 딱 좋은 책.


* * *


부족한 말 솜씨로는 책의 매력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어, 인상 깊었던 본문의 일부를 아래에 덧붙인다. 작가님의 매력에 조금이라도 빠지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은가요? (28쪽)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내가 얼마나 나의 배경에 무심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특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폐쇄적인 사회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42쪽)


I want to live here.

I want to leave here.

살다와 떠나다를 구별할 수 없다면, 내가 여기 살고 싶다고 말할 때 너는 내가 떠나고 싶어 한다고 이해하겠지. 이젠 떠나고 싶다고 말하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지. 그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아름다운 걸까. 그건 어두운 밤, 강을 건너는 새끼 오리 같은 것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들판의 나무들처럼 슬프겠지. 살고 싶다는 말은 떠나고 싶다는 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아이오와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두 단어는 내게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단어였지만 이제 이 단어는 아주 가깝고 유사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요?’ 이 질문은 아이오와에 온 날부터 내 마음 한편에 씨앗처럼 심어졌고 이제는 싹을 틔워버렸다.

웬디는 잘 모르겠으면 ‘live’는 짧게 내뱉어버리고 ‘leave’는 길게 발음한 뒤 약간의 여운을 남기라고 했다. 아아 알겠어.

삶은 짧은 거고 떠남은 긴 거구나. (60쪽)


“난 언제나 출발하는 순간 이미 늦었거든. 그래서 가장 빠른 길을 걸어야 해.” (71쪽)


줌파 라히리는 번역을 장기 이식에 비유했다. 내가 번역을 한다면 원본은 심하게 훼손될 거다. 아니면 실종되거나. (81쪽)


자신의 시를 닮은 시인이 있고 그렇지 않은 시인도 있다. 자신으로부터 멀리멀리 달아나는 시와 자신과 가까워지는 시. 내게는 두 유형 모두 흥미로운데, 두 가지를 번갈아 해야 정신이 망가지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다운 시를 쓴 다음 날에는 나답지 않은 시를 쓰고 싶어진다. (95쪽)

→ 새삼, ‘나답다’는 건 뭘까? 내게 있어 무엇이 나다운 걸까? 글에서 나다운 게 보이려면 글을 얼마나 많이 써야 하는 걸까?


“Oops! That door is unhappy today.”

오늘 저 문은 다른 날보다 덜 행복하네요. 그 말인즉슨 문이 고장 났다는 것. 영어에서 흔한 표현인 건지, 소설가인 존이 즉석에서 지어낸 건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영어라는 언어가 좋아졌다.

그 뒤로 나는 고장 나거나 상태가 이상한 물건을 보면 ‘unhappy’를 붙였다. (104쪽)


물론 영어가 서툴러서 아름다운 문장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름답고 멋진 문장을 쓸 수 없음이 도리어 시를 아름답게 했습니다. 간접적으로 말하거나 비유를 쓰는 대신 본질에 직진하는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완벽한 도구가 없다는 사실이 글을 더 독특하게 만든 것입니다. (112쪽)

→ 글의 해체, 간단한 형식의 직접성.


이 책은 실제로 출간된 책이다. 이르마 블랭크Irma Blank의 <하이퍼 텍스트Hyper-Text>라는 책. (지금 보니 마침 작가 이름이 ‘blank’. 이름에 충실하게 책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빈칸이다.) (123쪽)


참고로 이 일기를 쓰면서도 다른 파일에 틈틈이 오늘의 하위-일기를 쓰고 있는데, 그건 이 일기를 쓰면서 동시에 내 삶이 진행되고 있고, 삶이 진행되면 글쓰기의 부스러기가 생겨 잘 모아놔야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부스러기는 지금 내가 먹고 이쓴 치토스 봉지에 남은 부스러기와 본질이 같으므로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 (123쪽)

→ 글쓰기의 부스러기. 일상적으로 남기는 글의 소중함.


내게 여행은 무감흥 놀이다. 낯선 곳에서 몇 달씩, 몇 년씩 거주하는 것은 좋지만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호텔을 전전하고, 온갖 명소를 방문하는 모든 행위를 일절 꺼린다. (131쪽)


책이 스티커 북인 거야. 모든 단어가 스티커여서 떼어낼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그 책을 전시해. 혹은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사람들이 단어를 한 장씩 떼어가. 책은 단어를 하나씩 빼앗겨. 다음 사람은 불완전한 문장을 읽게 돼. 많은 사람이 책을 읽을수록, 책은 점점 단어를 잃고, 읽기는 잃기와 동의어가 되지. 더 많이 읽힐수록 책은 불완전해지고, 지워지고, 잃고, 상실하고, 빼앗긴다. 많은 사랑을 받은 책은 단어를 모두 빼앗기고 마침내 빈 종이로 돌아간다. (140쪽)


절단된 문장은 서로 공명했고, 재배치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문장이 발굴되었다. (내 멋대로 이름을 붙이자면 절단 문학…) (143쪽)


나 역시 나의 시를 직접 영어로 번역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생각보다 그 과정은 퍽 즐거웠다. 애당초 번역을 할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에 엉망으로 해버리고도 만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한 언어가 다른 언어와 부딪힐 때 벌어지는 접촉 사고이다. 최근 아이오와에서 ‘네 방에 들어온 파리’라는 시를 썼다. 한국어로 쓰고 영어로 번역해봤는데, 그 과정에서 이야기와 줄거리, 형식까지 몽땅 바뀌고 말았다. (’내 방에 들어온 파리’의 영역 제목은 ‘island’이다.) 이 정도면 전신 성형이 아닌가? 그것은 쓴 시를 발판 삼아 또 다른 시를 쓴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머리를 긁어 추가적인 비듬을 양산한 것을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 원문을 영어로 옮기는 건 내 입장에서 퇴고(혹은 퇴행일 수도…?)이자 그 시의 프리퀄 혹은 시퀄을 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원본을 최대한 정확하게 보존하는 것은 번역의 기본이지만, 나의 호기심을 더 자극하는 일은 ‘어떻게 하나의 아이디어로 두 버전의 시를 쓸 것인가’였다.

어디에서 말하기를, 제2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내려놔야 하는 것 중 하나가 100퍼센트 같은 단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라고 한다. 언어와 언어는 1대1로 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언어가 빨리 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체어가 없다면, 아주 멀어지는 건 어떤가? 새라는 단어를 손전등으로 번역하기, 바꿔버리기, 강탈하기, 중간에 탈환하기, 가로채기, 사기 치기. 하나의 언어가 다른 언어를 건드려 쓰러지게 하며,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내가 지니고 있는 번역에 관한 희미한 인상이다. 쓰러짐과 옮김. 들것으로 싣고 가다가 엎어버림. 그것의 반복. (157쪽)


작가들은 이곳에서 글만 쓰고 온갖 낭독회와 토론회, 수업에만 참여하다가는 미쳐버릴 것이라며, 글과 무관한 경험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경험이란 뭘까. 난 왜 느지막이 일어나 자바 하우스에서 일기만 쓰는 건지. 글로 쓸 만한 재미있는 경험도 없으면서. 그리고 왜 그것으로 만족해버리는지.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경험이라는 것, 그것의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했나?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IWP에서 운전기사까지 붙여주면서까지 보내주는 근교 여행이랄지, 유명한 거장의 콘서트랄지, 하여간 다른 작가들이 IWP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안 나는 너무 내성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막상 파티에 초대되면 스키퍼 본능이 발동해서 슬금슬금 발을 내빼게 된다. (오프닝 파티에서는 화장실에 숨어 1시간 동안 휴대폰만 했다.) 과연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게 있기나 할까. 글쓰기에 경험이 그렇게 중요한가? 경험. 경험. 경험. 난 아무래도 경험이라는 말을 잘 믿지 못하는 것 같다. (174쪽)


귀여운 것을 곁에 많이 두는 것만이 세상에 삐진 우리 자신을 다독일 수 있다. (184쪽)


아이오와. 모든 음절에 ‘ㅇ’이 들어 있어서 좋다. 아이오와. 무해하게 느껴지는 이름이다. 언젠가 몽 씨는 내게 말했다.

- 시인님, 아이오와 광인 같아요… (208쪽)


나는 한국에서도 체구가 아주 작은 편에 속하기에 미국에서는 영락없는 호빗인데, 아이오와 사람들이 간달프처럼 느껴진다면, 뉴욕 사람들은 사루만 같다… (211쪽)

→ 사루만에서 뿜었다 ㅋㅋㅋㅋㅋ 문보영 시인님에게 뉴욕 사람들은 변절한/사악한 마법사 같은 느낌인 걸까.


초경량의 삶! (227쪽)

→ 나도 살고 싶은 삶!


나는 요즘 일기를 아주 아주 많이 쓴다. 내가 깨달은 건 난 행복해도 된다는 것이다. 난 행복해도 슬픈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행복한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별로인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멋진 시를 쓸 수 있다. 사랑이 많으면 나는 더 많은 것을, 그리고 더 좋은 것을 쓸 수 있다. 행복할수록 나의 영혼은 더 세분화될 수 있음을, 시인이지만 나도 행복해도 된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난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255쪽)


‘let’s hug throughout the day’라는 문자를 보냈다. ‘throughout’은 한국어로 번역이 잘 되지 않는다. ‘온종일 포옹하자’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throughout’에는 어딘가 즈려 밟는 느낌이 있다. 정성스럽게 쓴 손편지를 봉투에 넣고 침을 발라 모서리부터 꾹 눌러 동봉하는 그런 느낌이 있다. (261쪽)

→ 와.. 역시 시인이시다. throughout에서 그런 느낌을 받다니. 문장을 보자마자 나 역시 ‘오늘은 하루 종일 틈만 나면 껴안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시인님은 어째서 이 단어에서 ‘즈려 밟는다’는 느낌을 받게 된 걸까.


그 이불보는 아마 아이의 세상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 크니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도록 줄인 것 뿐이지요. (295쪽)


전 그들(엑소포닉 작가들)이 특출하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언어를 조금 더 세심하고 입체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같은 색의 면이 붙어 있을 때 인간의 눈은 그것을 입체로 지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긋난 두 개의 평면, 두 개의 서로 다른 색의 면이 붙어 있으면 인간은 그것을 입체로 받아들입니다.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처럼 세상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296쪽)





* * *​


에필로그는 꼭 읽기를 권한다. 한 편의 시와 같다.

아이오와 백팩을 사러 다시 아이오와에 가게 될 시인님을 응원하며.

xoxo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여러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처럼 세상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P296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은가요?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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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점심
장은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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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진짜 불행한 사람인 거야." (41쪽)


그렇다면 나는 진짜 불행한 사람이었다. 나는 1년 중 3월을 제일 싫어했다. 그래서 봄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정말 “좋아해서 좋아하지 않았”(12쪽)다. 나는 이렇게 어두운데 세상 만물과, 따뜻한 날씨와 화사한 꽃을 즐기는 밖의 저 모든 사람은 너무 밝아서, 그래서 미웠다. 하지만 실은 나도 즐기고 싶었던 거다. 질투였던 거다. 그래서 미웠다.

3월이 싫었던 까닭은 학교 때문이었다. 나는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싫어하는 날이 새해 첫 날, 1월 1일일 정도로. 지난 것을 보내기에 아직 미련이 그득그득하고 새로운 걸 시작하며 다시 적응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하는 3월이 그래서 나는 정말 싫었다. 학교라는 조직에서 벗어난 지 이젠 해를 세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오래 된 지금에서야 나는 봄을 조금 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따뜻한 햇볕 아래서 따사함을 즐기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그런 시기의 그런 계절에 봄을 배경으로 하는, 어쩌면 따스한 소설인 <가벼운 점심>을 읽게 됐다. 장은진 작가의 소설집 <가벼운 점심>의 표제작인 같은 제목의 단편 소설은 ‘아버지의 가출’로 시작한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10년 만에 재회한 아버지. 무거운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제목과 나아가 책 표지까지, ‘가볍다’는 형용사가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는 분위기의 소설이었다.


사랑을 위해 가족을 ‘포기’했던 아버지. 그러나 화자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미움보다는 반가움이 더 큰 듯 보인다. 어머니의 전략이 유효했던 것일 테다. 결혼을 앞둘 만큼 나이 든 한 명의 성인으로써 아버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봄의 어느 캄캄한 새벽, 베란다 위에 두 발을 올리고 서 있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10년 만에 패스트푸드 점에서 마주 보고 앉은 둘의 분위기가 무겁지 않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윤주를 떠올렸다. 그녀가 없는 삶을 20년 동안 산다고 상상해봤다. 삶이 끔찍해지면서 모든 의미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돈을 벌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산다는 것의 의미가. 내가 어떤 멋진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해도 그 안에 영양분이 쌓이지 않아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것 같았다." (38쪽)


산다는 건 무엇일까. 삶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지적인 사람이 되는 데에도 분명 가치는 있겠지만 그것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면. 그것을 인정해 줄 사람이 없다면. 함께 기뻐해 줄 사람이 없다면. 그 가치의 무게는 꽤나 가벼워질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찾았다. 그리고 두 자녀가 성인이 될 만큼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인생의 봄을 맞이했다. 그렇게 맞은 인생의 봄에서 인생의 무거운 가치를 찾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신을 미워했던 부친의 영정사진 앞에서 그렇게 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기에 10년 만에 만난 아들 앞에서 가벼운 얼굴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동안 타인이 원하던 삶을 살며 온갖 무게에 짓눌려 있어 늘 무거운 표정을 지었던 것과는 달리.


봄 느낌의 필터를 적용해 찍은 사진 같은 느낌의 소설이었다. 유리창 너머, 만개한 꽃과 막 푸르러지기 시작한 나무를 바라보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읽으면 참 행복할 것 같은 소설집.



* 하니포터8기 활동을 통해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봄이 왔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진짜 불행한 사람인 거야. - P41

나는 윤주를 떠올렸다. 그녀가 없는 삶을 20년 동안 산다고 상상해봤다. 삶이 끔찍해지면서 모든 의미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돈을 벌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며 산다는 것의 의미가. 내가 어떤 멋진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해도 그 안에 영양분이 쌓이지 않아서 아무것도 자라지 않을 것 같았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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