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는 측면이 좀 더 낫습니다만
하완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을 위로하는 내용의 가볍게 쓰인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호불호가 있다기 보다는 그냥 처음부터 손이 가지 않았다. 서점에서 잠시 대충 훑어만 봐도 어떤 내용인지 감이 오는데 이걸 굳이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사서 읽을 필요가 있을까. ‘네 자신을 믿어’,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마’, ‘해도해도 끝 없는 세상에서 열심히 살 필요 있나, 되는대로 살자’. 어차피 다 같은 말을 하고 있을 텐데.
굳이 아등바등 살 필요 없다, 는 체념식의 에세이는 사실 읽고 난 후 자연스럽게 ‘맞아! 나도 이제 너무 열심히 살지 말아야겠다.’ 다짐하게 된다. 달라질 내일의 일상을 기대하면서 잠에 들지만, 아침에 다시 일어나 출근하면 마주하는 건 전쟁같은 일상이다. 무엇 하나 대충 넘길 수 없는 빡빡한 일상. 대충 넘기다가 실수가 생기면 결국 내 얼굴에 침 뱉는 격인 상황에서 누가 대충하겠나. ‘대충 살자’는 메시지가 다가올리가 만무했다.

그래서 나는 사실 하완 작가의 전작인 ‘하마터먼 열심히 살 뻔했다’도 읽지 않았다.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오랜 기간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그렇게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텐데 말이다)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쳤다. 하완 작가의 신작 ‘저는 측면이 좀 더 낫습니다만’을 읽게된 계기는 단순하다.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류의 에세이를 싫어한다면서 애시당초 이벤트에 참여한 이유는 뭐냐. 미리보기를 통해 본 책의 내용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숨겨진 쌍둥이인가?’ ‘어떻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거지?’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난 뒤 책의 측면에는 북마크가 한 서른개 쯤은 붙어 있었다.
* * *
하완 작가는 책을 통해 ‘측면’이 대표하는 일반적으로 보통의 모습이라 여겨지는 것과는 다른 작가의 모습을 간략하지만 효과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사실 너무 내 얘기같아서 개인적인 친근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줄거리를 설명할 수 없는 책이니, 깊게 공감했던 구절들을 들려주는 게 이 책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지만 인정을 바라면 곤란한 일이 생긴다. 이 바닥의 생리가 그렇다. 아쉬운 쪽이 언제나 을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사람은 타인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 (p.23)
“솔직히 나를 찾는 곳이 많아지니 조금 두렵다. 살면서 한 번도 주목받아보지 못한 자가 갑자기 주목을 받으면 기쁘기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는 기분.” (p.25)
“여행을 좋아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스스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누군가가 가자고, 가자고, 옆구리를 찔러야 그럼 오랜만에 바람 좀 쐬고 올까 하며 떠나는 타입이다. 그렇게 여행을 가서 누구보다 신나게 노는 걸 보면 여행을 좋아하는 게 분명한데 여행을 가고 싶다는 마음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왜 이러는 걸까?
나만 이러는 줄 알았는데 이게 집순이 집돌이들의 특징이란다. 집순이 집돌이 레벨 테스트도 있다. 테스트 항목 중 박장대소하며 공감한 걸 몇 개 소개하자면 이렇다.
ㅁ 나가는 것 자체가 스케줄이라 생각한다.
ㅁ 나가기 전까진 귀찮은데 막상 나가면 잘 논다.
ㅁ 약속이 취소되면 은근히 후련하고 기분이 좋다.
나는 영락없는 집돌이다.” (p.57)
“가끔은 내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속에 어린아이가 들어앉아 있는 듯한 기분을 자주 느낀다. 나는 아직 어린애인데 겉모습이 이렇게 늙어버려 어쩔 수 없이 어른인 척하면서 산다.” (p.80)
“맘에 드는 스웨트셔츠 코디가 있다. 스웨트셔츠와 반바지흫 매치해 입는 걸 좋아한다. 활동적이면서 소년스러운 귀여움이 있달까. 하지만 그렇게 입은 기억은 거의 없다. 나이가 걸림돌이 돼서는 아니고 온도 차이 때문이다. 스웨트셔츠를 꺼내 입을 정도의 날씨라면 더위는 지나갔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인데, 그런 날씨에 반바지를 입으면 다리가 너무 춥다. 그리하여 내게 스웨트셔츠와 반바지를 함께 입는다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상체의 더위를 견디든가 하체의 추위를 견디든가.” (p.84-85)
“처음부터 “내 취향이야.”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취향은 한 번에 얻어지지 않고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얻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첫인상만으로 안 맞는다 단정 짓고 멀리하는 건 조금 아까운 일이다. 물론 여러 번 시도한 후에도 여전히 싫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의 시도로 거부한 것이 평생 즐길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 누가 아는가.” (p.128-129)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커피를 즐기기 시작했을까. 아쉽지만 생각나지 않는다. 그런 걸 기억하고 있어야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갈 텐데 나는 기억력이 별로다. 지나간 일들이 잘 생각나질 않는다. 소심한 데 반해 무심한 구석도 있어서 자잘한 일들은 다 잊어버린다. 그래서 과거의 세세한 일들과 감정을 기억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조금 부럽다.” (p.131)
“경쟁력을 가지는 것. 남들보다 내가 낫다는 걸 증명하는 것. 그 방식에 지쳐버렸다.” (p.211)
“그러나 허세였다. 착각이었고, 물론 그들의 영화는 끝내주게 좋았지만 내 취향의 이면엔 특별하고픈 욕망이 더 컸던 것 같다. 영화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옷도 다르게 입고, 다른 음악을 듣고, 다른 책을 읽었다. 유행하는 것은 일부러 피했다. 그러면 특별해지는 줄 알았다. 아니,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보면 이런 의문도 생겼다. 내가 이걸 진짜 좋아하는 걸까, 아리면 남들은 안 좋아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걸까.” (p.226)
“그릇이 작으니 많이 담지 않아야 넘치지 않는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넘치는 건 괴로움이다. 소박하게, 분수에 맞게 살고 싶다. 비워내고 가볍게 살고 싶다.” (p.271)
* * *
비록 앞서 나는 이런 류의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읽으면 위로를 받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원리는 아마도 이것일 테다. “아, 나 혼자가 아니구나. 나 같은 사람이 더 있구나.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 나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됨으로써 받게 되는 위로인 것 같다.
역으로 ‘일반적’이고 ‘보통’이라고 여겨지는 스테레오타입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나, 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된다. 나는 활동적이지 않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에게서 멀어지면 더 안정감을 느낀다. 이런 나는 스테레오타입의 정반대에 서 있는, 좋게 말하면 내향적인 사람이고 악의적으로 표현하면 찌질이다. 예전에는 그런 내 모습을 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활발한 척을 하고,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제스처를 크게 더 많이 하면서 다이내믹한 느낌을 주려고 노력했고, 리액션을 열심히 해서 대화를 주도하지는 않지만 참여하고 있는 느낌은 주고자 노력했다. 이 모든 노력들이 헛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에세이이렇듯 생각을 바꿀 수 있었던 것도 많은 작가들과 사회적 인플루언서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 준 덕분이다. “너 자체만으로도 좋아”, “꾸밀 필요 없어, 너는 너야”, “나는 집에 있는 게 좋아. 너도 그래?”라며 목소리를 내준 이들이 있었던 덕분이다(“아프니까 청춘이다” 이런 개소리 말고). 그런 의미에선 반성한다. 내가 오만했다. ‘슬쩍 훑어보니 대충 무슨 얘기할지 다 알겠는데, 내가 굳이 이 책을 사서 봐야해?’ 그들이 그런 공감백서를 쓰고 널리 널리 퍼뜨려 준 덕분에 나는 내 자신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될 수 있었다. 되려 감사를 보내야하겠다.
그릇이 작으니 많이 담지 않아야 넘치지 않는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넘치는 건 괴로움이다. 소박하게, 분수에 맞게 살고 싶다. 비워내고 가볍게 살고 싶다. - P2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