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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비밀
톰 녹스 지음, 서대경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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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어로 “배꼽 언덕”이란 뜻을 가진 괴베클리 테페(Gobekli Tepe). 1964년 터키 남동부 어느 외딴 곳을 조사하던 미국 고고학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이 역사적인 유적지는 1994년 본격적으로 발굴되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된다. 탄소연대측정 결과, 이 석조 구조물 유적지는 놀랍게도 1만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수렵, 채집생활을 하며 동굴에서 생활하던 당시 인류가 만들어냈다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엄청난 규모의 거석들과 그에 새겨진 정교한 동물조각 등은 기존의 학설들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참고로 유명한 이집트 피라미드의 경우 4500년 전에, 영국의 스톤헨지는 4000년 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기원전 8000년경 농경문화(신석기 혁명)가 시작되면서 누군가에 의해 괴베클리 테페가 의도적으로 땅 속에 파묻혀졌다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인류 최고(最古)의 건축물이자 신비에 싸인 괴베클리 테페를 전면에 내세운 톰 녹스의 [창세기 비밀(The Genesis Secret)]은 분명 여러 면에서 흥미를 자아내는 소설임에 틀림없다. 성서 속 “에덴 동산”일지도 모른다는 터키 남동부 쿠르디스탄 지역의 괴베클리 테페 유적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허구의 이야기는 작가의 탄탄한 고고학적 지식과 풍부한 고증 그리고 설득력있는 가설로 인해 미스터리 팩션의 묘미가 한껏 살려진 작품이다. 신화와 종교, 악마를 숭배했던 비밀 결사(헬파이어 클럽)와 신비로운 종파(예지드 파)가 얽히고설킨 이야기 구조는 어느덧 독자로 하여금 지적 호기심의 세계로 빠져들게 만든다. 


   소설은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어 나간다. 하나는 런던 경찰국의 포레스터 반장이 추적하는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우연히 괴베클리 테페를 취재하게 된 <타임스>지 기자 로브 러트렐이 겪는 사건인데, 이 두 이야기가 번갈아 쓰여지며 병행 전개된다. 그런 가운데 인류가 쌓아올린 역사와 종교의 근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던져진 여러 의문들(예를 들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유, 고대 종교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신 공희의 기원 등)은 막바지 괴베클리 테페로 귀착하여 그 모든 수수께끼가 풀린다.

   눈여겨 볼 점은, 저자가 “에덴 동산” 이야기를 알레고리(일종의 은유)로 해석하며 고증된 인류사와 미스터리한 괴베클리 테페의 존재 그리고 작가의 상상력을 한데 묶어 하나의 가설로 풀어내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를 창세기 속 “에덴 동산”으로 규정하고 아담의 원죄(=인류의 원죄)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한 이 부분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독자 개개인에게 맡겨진 것이겠지만 적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너무 그럴싸한 가설이 주는 신선함은 인정할 부분이라 할만하다. 


   또한, 저널리스트로 오랫동안 활동하며 겪은 다양한 경험들이 고스란히 투영된 (납치 부분 같은) 상황 묘사라든지 기자 출신답게 꼼꼼한 관찰력으로 터키 쿠르디스탄 지역을 담아낸 필치는 그만큼 생생하고 현실감있게 다가온다. 고고학이 선사하는 흥미와 살인 사건의 스릴러적 요소가 교차하며 스피디한 전개를 이루어낸 부분과 가독성이 뛰어난 부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라 하겠다. 


   다만, 미치광이 살인마의 충격적인 인신 공희(신에게 사람을 산 제물로 바치던 행위)를 지나치리만치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불러 일으키는 불쾌감에 있어 논란의 소지가 있다 하겠다. 저자 인터뷰에 언급된 의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스릴러로서의 오락성을 다분히 노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유능한 저널리스트에서 마지막엔 놀라울 정도로 고고학적 식견을 가진 인물로 탈바꿈하는 주인공 로브에 대한 개연성 부족과 진부한 결말 처리 그리고 문학적 향기를 맡기에는 다소 부족한 작가의 딱딱한 글쓰기 방식 등도 독자의 감상 여하에 따라 아쉽게 여겨질 수 있는 부분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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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케인
로버트 E. 하워드 지음, 정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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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몬 케인(Solomon Kane)은 펄프 잡지 시대 판타지 소설의 대가인 로버트 E. 하워드에 의해 발표된 작품으로, 방랑자이자 모험가인 청교도 솔로몬 케인이라는 가상의 인물과 근원을 알 수 없는 이교적인 악의 숨막히는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이르는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주된 무대인 원시적인 아프리카 정글은 물론 유럽에서의 모험담도 펼쳐진다. 1928년 8월, 위어드 테일즈 지면을 통해 발표된 <붉은 그림자>를 필두로 단편과 시, 미완성 작품을 포함해 모두 16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단편 7편과 미완성작 2편을 묶어 이번에 눈과마음 출판사에서 발간됐다.
   창백한 피부, 깊고 차가운 눈동자, 전체적으로 마치 음울한 사색가와 같은 인상의 솔로몬 케인은 검은 옷에다 깃털 없는 모자를 반쯤 눌러쓴 채 레이피어, 권총, 단검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는 미지의 적들과 대면한다. 그는 마치 악의 응징자인 것처럼 악 자체를 증오하며, 일종의 방랑벽 같은 모호한 충동과 집념 속에 끊임없이 떠돌아 다닌다.
   로버트 E. 하워드는 이런 솔로몬 케인이란 불가사의한 캐릭터를 중심으로 남성적이고 웅장한 필치와 거침없는 상상력 그리고 미스터리한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는 기이하고 섬뜩한 묘사들로 채워진 독특한 작품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다. 이런 부분들은 어두운 판타지 장르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있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요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본 작품과 연관해서 로버트 E. 하워드의 대표작인 코난 시리즈를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코난 더 바바리안(Conan the Barbarian) 혹은 키메리아 인 코난(Conan the Cimmerian)으로 불리는, 유사시대 이전 가상의 하이보리언 시대 아킬로니아의 야만인 왕 코난을 등장시켜 문명과 야만의 충돌을 장대하게 펼쳐가는 이 유명한 시리즈는 로버트 E. 하워드가 30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한 뒤 후대의 작가들에 의해 또다른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연대기화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1932년 12월 위어드 테일즈 지면을 통해 발표된 <칼날 위의 불사조>를 비롯해 로버트 E. 하워드에 의해서는 총 9편의 단편이 남겨진 코난 시리즈는 훗날 서적은 물론이고 애니메이션, 코믹, 게임 등 각종 분야를 망라하며 시대의 아이콘으로 부상하지만, 아무래도 1982년 아놀드 슈왈츠네거 주연의 코난 더 바바리안(Conan the Barbarian)으로 영화화되면서 국내팬들에게 더 친숙하게 다가오게 된 작품이라 할 것이다. 원작소설의 세계관과 일부 설정이 혼합된 어드벤쳐 액션 판타지 영화를 통해 왕이자 도둑이며 한 마리 야수 같은 사나이인 코난이 펼치는 활극의 세계를 직접 눈으로 바라보던 감동을 잊기란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최근 소식으로 새로운 코난 영화가 제작 중이다).

   국내에 모두 번역되어 나와 있는 두 작품은 여러모로 비교해 볼만한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 우선 공통적으로 미지의 적(인간)과 끔찍하고 치명적인 괴물들이 등장하며 이들과 사투를 벌이는 고독한 영웅 캐릭터인 주인공은 남성다움을 물씬 느끼게 한다. 이들은 단지 완력만을 내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발휘하는 기지를 통해 위기를 넘긴다. 또한 낯선 곳을 탐험하며 겪는 기이하면서 공포스런 분위기는 섬뜩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형언할 수 없는 설렘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된 점 역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차이점이라 한다면, 완력의 상징인 칼과 사악한 마법의 대결 구도를 보다 정형화시킨 코난 시리즈의 이야기 구조가 어느덧 칼과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의 한 장르인 검마소설(sword and sorcery)의 창시로 이어진 부분이라 할 것이다. 거기다 같은 인간들 틈 속에선 무적이나 마찬가지인 코난이란 야만인 캐릭터를 상대하기 위해 등장하는 괴수들의 무시무시한 정도나 대규모 전투묘사, 외계인의 등장 같이 코난 시리즈가 갖는 독특한 판타지성은 차별화된 요소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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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말로우 > 양석일 작가와 함께 하는 [어둠의 아이들] 시사회 후기


조금 늦었지만, 지난 4월 3일(토) 시너스 이수에서 있었던 양석일 작가와 함께 하는 [어둠의 아이들] 시사회 후기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대충 어떤 내용이다라는 것을 인지하고 갔었지만, 실제 영화를 관람하게 되니 보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 속 현실에 어찌할바를 모르겠더군요. 어른들의 그릇된 욕심에 의해 몸은 물론 마음까지 병들고, 심지어는 가녀린 생명까지 잃게 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주인공들의 무력감이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질만큼 압도적인 연출의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아동인신매매 실태에 관한 충격적인 이야기를 그려나가는 가운데, 영화 막바지 사회복지사인 오토와가 남긴 “나 자신에게 변명하고 싶지 않아”라는 말과 기자 남부에 대한 결말 처리에서 감독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전달되어 특히 인상에 남습니다.

 

   본영화 상영 후 원작자인 양석일 작가님과의 씨네토크 시간을 바로 갖게 되었는데, 여러모로 알차고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관객들과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노작가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여러 질문과 답변이 오갔고 그 하나하나가 모두 의미있는 내용들이었지만,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영화나 원작소설에 있어 공히 기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어둠의 아이들]이란 제목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기억이 제대로 맞는지 모르겠지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세계에는 빛과 어둠의 세계가 있고, 그런 가운데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빛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빛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둠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어둠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빛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잘 보인다. 또한 빛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어둠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빛의 세계에서 사는) 관객들이 본 영화 속 이야기는 바로 보이지 않는, 즉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얘기를 듣는 순간 고통받는 어린이 같은 약자들(또는 소수자들)이 사회 어디선가 힘겹게 살아가고 있지만, 모른 채 외면하면서 살아왔다는 반성과 괴로움이 함께 들더군요. 적극적으로 이들에 대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던 영화와 양석일 작가님과의 만남의 시간이 그만큼 저는 물론이고 영화를 봤던 관객들 마음 저마다에 커다란 동요를 일으켰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하는 바람도 갖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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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스 - The Clas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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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교실은 흡사 작은 전쟁터와 같다.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사이엔 보이지 않는 불신의 벽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어 편견과 오해의 감정이 알아챌 새도 없이 쌓여간다. 때때로 이런 감정들은 탁구공처럼 성급히 튀어올라 사방으로 부딪히기도 하는 반면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쉽사리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도 한다. 
  로랑 캉테 감독의 프랑스 영화 <클래스>는 파리 외곽의 그저 그렇고 그런 어느 중학교 학급의 모습을 빌려와 인간 vs 인간으로서의 이해와 소통이 진정으로 필요한 공간인 교실 풍경을 도발적이면서 현실감있게 담아낸 수작이다. <클래스>의 원작자이면서 실제 교사 출신인 프랑수와 베고도가 열혈 프랑스어 교사 마랭 역을, 오디션을 거쳐 캐스팅된 실제 중학생들이 난감하기 이를 데 없는 ‘발칙한’ 아이들을 직접 연기하면서 (한편의 다큐를 보는 듯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있는 그대로의 교실 풍경을 생생히 재현하고 있다. 

 

  <간략한 줄거리>

  9월 신학기를 맞은 학교 모습은 말 그대로 분주하다. 새로 부임한 선생들이나 한 학년 진급한 학생들은 저마다의 환경에 적응하느라 여념이 없다. 벌써 이 학교에서만 4년째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는 선생 마랭은 첫날부터 자신이 맡은 학급 학생들과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랭은 산만하고 다루기 힘든 아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 일쑤고,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담임에게 영 불만이다. 그래서일까? 거침없는 질문의 농도는 점차 심해지고, 자유로운 토론의 논리적 비약은 유치한 말꼬리 잡기로 이어진다. 게다가 마랭의 수업 지도를 이유없이 거부하는 아이들까지 나타나고... 이런 아이들의 행동에 참지 못하고 때때로 다혈질의 성격을 폭발시키는 마랭. 교사로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선생과 반항심만 커져가는 학생들 사이의 티격태격 소동들은 그만큼 오해와 불신을 켜켜이 쌓아간다. 급기야 의도치 않은 마랭의 발언이 뜻밖의 사건을 불러 일으키는데...

   <영화에 대한 여러 단상>

  영화 <클래스>에서 가장 눈여겨 본 점은 지독할 정도로 철저히 학교의 모습만 담아낸 카메라이다. 담임인 마랭이나 그의 학생들의 학교 밖 사생활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상당히 교묘하다. 영화를 보면서 '아이들이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종종 의문을 던지게 되지만 이유는 알 도리가 없다. 사춘기를 맞은 아이들은 영악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분명 저마다의 사소한 것들이라도 이유는 존재할테지만, 단편적인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정보만을 통해 유추해볼 뿐 개개인의 소상한 깊은 내막까지 알긴 힘들다. 마치 관객은 마랭이 아이들을 보는 시각과 거의 같은 높이에서 아이들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행동에 상당히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도 영화의 메시지를 생각하면 소홀히 다룰 수 없는 것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조용히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 보인다. 관객들은 마랭만큼이라도 아이들을 이해할 마음의 여유가 조금이라도 존재하는가? 굳이 작은 사회인 교실뿐만 아니라 보다 큰 현실 사회의 여러 이해관계에서 부닥치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학교가 갖는 폐쇄성도 연관해서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그 안의 주요 구성원들은 자신들만의 자유와 권익(권리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테두리를 둘러치고 벽을 쌓아놓고 있다-학교는 학교만의, 선생들은 선생들만의, 아이들은 아이들만의 카르텔을 만들어 버린다. 외부의 간섭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뭉친다. 이런 결과 놀라운 점은 예를 들어 아이들간의 다툼에서 비롯된 일이라 할지라도 선생에게로 번지면 어느 틈엔가 학생과 선생의 다툼으로 변질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애시당초 불신의 벽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자초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메시지와 큰 상관은 없지만 추락해 버린 우리 교육 현실을 빗대어 볼 대목도 있다. 영화 속 교사들이 학생의 성적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단순히 성적으로만 최고 점수를 줄 것인가 아니면 태도(인성)를 먼저 두느냐, 그도 아니면 이 둘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현실은 영화 <클래스>보다도 한참 어둡다. 주입식 교육을 통해 성적으로만 줄세우기를 하면서 공교육이 무너져 버린 일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단순히 지식만을 습득하는 장소만이 아닌 올바른 가치관 형성을 통해 바르고 정직한 사회인이 되기 위한 과정의 하나로서 교육이 진정 필요한 것이 아닌가라는 반성과 함께 초심부터 냉정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클래스> 속 교실은 작은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9개월간의 이야기는 강렬한만큼 눈부시고 시리다. 런타임 128분에 이르는 영화는 어떤 해결점도 없이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다. 
  인상적인 마지막 두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끝머리. 긴 방학에 앞서 먼저 지난 9개월 동안 배운 것 중 가장 좋았던 것을 언급하는 부분이다. 학생들은 저마다 관심있던 분야를 소개하지만, 모두가 빠져나간 교실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흑인 소녀가 남긴 대답은 뜻밖이다. 영화 첫 부분 잠깐 등장한 이후로 존재감없던 이 소녀의 대답은 마랭은 물론이고 관객까지 일순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 소녀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저마다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 것 같다. 
  곧이어 뒤이은 장면. 어질러진 텅 빈 교실과 대비되는 밝고 유쾌한 분위기의 운동장에서의 축구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장면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 대립없이 교사와 학생이 함께 어울려 웃고 떠들며 축구하는 장면은 서로의 벽을 허물고 소통과 이해 그리고 화합의 과정을 한순간에 이루어낸 듯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주된 공간이자 선생과 학생이 가장 오래 마주하는 교실을 벗어난 곳에서 희망을 엿보게 된 것은 반대의 의미를 가진 갖가지 상념 역시 자아낼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내포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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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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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네자와 호노부의 <덧없는 양들의 축연>(2008년작)


    [바벨의 모임]이라는 비밀스런 대학 독서 모임에 소속된 소위 부유층의 영애와 그 피고용인 간의 범죄 행각을 다룬 미스터리물이다. 연작의 형태를 띠고는 있지만 각 단편의 주인공은 모두 다르며, 각각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여성 화자의 1인칭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 역시 언급할 대목이다-마지막 편은 비록 3인칭이 가미된 일기 형식이긴 해도 말이다. 
    수록된 단편은 다음과 같다.

    집안에 변고가 생겨서
    북관의 죄인
    산장비문
    타마노 이스즈의 명예
    덧없는 양들의 만찬

    먼저 책 뒤편의 홍보문구인 ‘유례없는 마지막 한 줄의 반전’이란 문구가 상당히 자극적으로 다가오는데, 정통 추리소설의 ‘앗!’하게 만드는 충격적인 반전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 맛은 떫은 감을 베어물기 전부터 예상되는 낭패감과 같다. 이 단편들은 반전에 주의하기 보다는 역자 후기에 언급된 요소 중 ‘왜 그랬는가’에 보다 초점을 맞춰 읽어야 한다고 본다. 특히 마지막에 드러나는 이렇다할 악의, 증오와는 상관없는 범인들의 무덤덤한 살인 행각 속에서 황폐화된 인간성의 부자연스런 괴이감을 맛보게 된다.

    단편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스멀스멀 스며드는 그로테스크한 공포로 몸서리치게 만들지도, 그렇다고 독특하고 기괴한 이야기 구조로 끊임없는 흥미를 자아내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대체로 쉽게 읽히는 소프트한 기담이며, 부유층이 주된 이야기 대상이다 보니 그들의 고상하지만 허영에 찬 모습, 현실보단 환상을 쫓는 나약함, 부나비처럼 부질없는 욕망 등을 통해 인간 군상들의 어두운 일면을 서늘하게 그려나간다.

    단편 저마다 특색이 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맨 마지막 편인 <덧없는 양들의 만찬>이다. 대표적인 희생물인 양을 통한 제의(만찬)로 말미암아 무너져내린 독서모임 이름인 바벨이 뜻하는 상징성(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공허한 오만과 탐욕, 허무 등으로 쌓아올린 환상)이 작품의 퇴폐적 인상을 대변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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