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다. 헤닝은 휴가차 방문한 섬에서 어떤 기억을 떠올리고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트라우마를 알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지배해 왔는지도. 편집자인 헤닝이 편집했던 책(아동書)에 대한 설명이 잠깐 나오는데 이제 부모가 된 그는 그 책이 헛소리였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자신의 아이들이 아니라 헤닝 본인에 대한 복선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에 관한 책 이야기도 나온다)목이 마르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경험을 했다. (적은 분량임에도 한번에 읽기 힘든 이유) 문장은 물기없이 바짝 말라있는 것처럼 건조하고 인물들은 제각기 속터지는 면을 가지고 있어서 읽는 동안 물을 많이 마시게 되더라는. (주인공 또한 갈증으로 힘들어 한다)
에세이에 관한 모든 것을 고찰한 글이자 이 자체로 하나의 에세이다. 목차에서 ‘위안에 대하여‘는 총 다섯 번 나오는데, 작가 자신에게 위안이 필요했던 순간들에 대해 썼다. (본인의 우울증과 글쓰기에 관해)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조금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 글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처럼 글 쓰는걸 좋아하지 않고 어렵게만 느끼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세계다.
집을 나설 때마다, 이 작은 도시를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바람에 어디로든 날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래나 물거품이 되고 싶었다. 한겨울이 되자 바람과 파도가 해변의 모래를 산책로 위로 옮겨놓았고, 그렇게 쌓인 모래는 100미터 길이의 흙덩어리로 얼어붙었다(시 의회는 문제는 해결할 자원도 의지도 없었을 것이다). 해가 바뀌고도 한참을 더 그렇게 쌓여 있던 모래는 서서히 건조해지면서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회오리치는 모래바람에 눈이 따갑고 피부가 쓰라렸다. - P111
나는 에세이가 모종의 퇴적물이라는 발상이 마음에 든다. 에세이란 다양한 소재가 퇴적된 글, 또는 같거나 비슷한 소재를 다루는 다양한 방식이 퇴적된 글이라는 발상이 마음에 든다. - P114
검은색을 좋아한다. 옷장에 검은색 옷이 차지하는 지분이 상당하고 (검은색이 아닌 것을 찾는 것이 빠를 것이다) 이 책에 관심이 갔던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다. 무엇보다 검은색으로 이렇게 다양하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군대시절의 일화에서 인류의 피부색에 이르는 21편의 검은색을 읽는 것은 깊고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 피에르 술라주의 작품도 찾아보길 추천한다.
많은 아프리카인의 피부색이 짙은 편이지만 검다고 말할 수 없고, 많은 유럽인이 백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짙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으며, 그저 노란색이라고만 간주되는 아시아인들(그런데 누구의 피부가 노란색인가? 간염 환자?)은 대체로 많은 수의 남유럽 사람들보다 밝은 피부색을 보이며, 검은 물감이나 석탄 조각과 비교할 경우 가장 피부색이 짙은 사람도 곧바로 검은색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 P126
인간이 바라는 보편적 차원에서는 백인도 흑인도 결코 실존할 수 없다. 인류는 그 자체로 색깔이 없다. - P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