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열이 높은 이유는 개인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오바마 전 대통령까지 배우고자 했다던 한국의 교육열은, 실은 공부 못한 사람으로 멸시당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치맛바람‘이라는 말로 엄마들을 상스럽게 욕하지만 정작 상스러움은 다른 곳에 있다. 고된 노동이 마치 ‘공부 못한 죄‘로 받게 되는 형벌처럼 여겨지는 것이 그것이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이 보여주듯 노동환경의 많은 문제점은 사회적 의제가 되기보다 ‘능력 없는‘ 개인이 당연히 짊어져야 할 짐이 되었다. - P34
타인의 고통과 억울함에 대한 공감이 없는 공정은 오직 나의 억울함에 대한 집착으로 향한다. 이 집착은 개인의 억울함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억울함은 폭력을 낳는다. - P111
언어는 정치의 장이며 정치는 언어의 장이다. 공적 발화를 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억울함을 번역할 권력을 가진다. 그들은 위치에 따라 자신들의 억울함을 ‘공정‘이라는 개념으로 번역하는 동시에 타인의 억울함을 무능력의 대가로 취급한다. - P115
부당한 낙인과 공격은 당사자에게는 존재를 걸고 증명해야 하는 문제가 되지만 공격하는 이들은 ‘아니면 말고‘ 식이다. - P137
피해자는 어떤 존재인가. 피해자는 신뢰받는가. 피해자라는 정체성은 낙인으로 작용하곤 한다. - P147
이처럼 ‘OO세대‘를 가리키는 말은 사실상 계층, 인종, 지역, 젠더를 교차시켜보면 정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럼에도 마치 보편적인 세대를 아우르는 말처럼 쓰이곤 한다. 주로 중산층 남성의 관점인데, 그 중산층 남성이 ‘보편적 세대‘의 개념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 P161
물론 경제와 시민의 자유는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의 ‘본질‘은 아니며 경제력이 자유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라는 주장이야말로 인권침해적인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시각이 그동안 국가의 성장과 경제발전을 위해 수많은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키는 관행을 합리화해왔다. ‘그래도 경제는 살렸다‘며 독재를 옹호하게 만든다. - P182
공적 영역에 여성의 자리가 없기에 여성들은 ‘엄마‘로서 자리를 구해야 한다. ‘왕자 낳은 후궁‘이든 ‘엄마‘든 재생산을 충실히 수행한 여성만이 권력을 가진다는 암시를 준다. 단지 비난을 위해서는 야망 있는 어머니 (후궁)을 끌어오고, 칭송하기 위해서는 희생하는 어머니를 내세울 뿐이다. - P212
인종주의에 맞서고, 장애인 차별에 맞서는 이들은 꾸준히 동물권 운동에서 연결성을 찾는다 동물이 학대받는 세상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도 오지 않는다. 인간은 계속해서 ‘동물 같은 인간‘을 찾기 때문이다. - P286
시장은 은폐의 언어를, 운동은 폭로의 언어를 쓴다. 당연히 후자가 더 즉각적 불편함을 안긴다. 이 불편함이 제 안에 침투하기를 꺼려서 적극적으로 외면하다 보면 자연스레 반지성을 향해 간다. 불편하지 않고 알아가는 진실은 없다. 일본이 아무리 방사능 오염수를 처리수라 명명해도 그것은 오염수이다. - P286
연민은 강한 정치적 힘을 만든다. 그럼에도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따른다. ‘불쌍한 존재‘는 너무도 무력하다. 부당하게 고통받는 존재들은 그저 이 세계의 ‘불쌍한 존재‘라는 틀에 갇힐 뿐이다. 그렇게 연민의 대상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타자의 불쌍함이 나의 사회적 참여의 감정적 원천이 될 때, 이는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연대 의식으로 향하기보다 불쌍한 대상을 도울 수 있는 나의 대한 우월감으로 빠지기 쉽다. 불쌍한 대상들이 더 이상 불쌍해 보이지 않을 때 순식간에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 P3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