찍혀 있는 사진을 읽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사진이 보여주는 걸 보되 그 사진이 감추고 있는 게 무엇인지 추리하는 것이다. 사진은 필연적으로 보여준다. 필연적으로 감춘다. 보여주는 동시에 감추는 사진의 이중성은, 사진을 보는 데 멈추지 말고 읽으라고 요구한다. 프레임 안에 갇히는 동시에 탈출도 모색하라고 속삭인다. - P23
사진은 가위질이다. 이어진 시간을 찰칵, 펼쳐진 공간을 싹둑 잘라낸다. 시간과 공간을 프레임 안에 가둔다. 의미는 바느질이다. - P47
사진 안에 선의가 있는가 없는가를 판가름할 잣대는 없다. 사진은 결국 콘텍스트(맥락)에 의존하는 텍스트일 뿐이고, 어느 맥락에 사진을 놓을 것인가, 어느 맥락으로 사진을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을 뿐이다. 사진은 결코 착한 매체일 수 없다. 어떤 ‘선의‘도 쉽게 ‘악의‘로 변질시킬 수 있고, ‘악의‘마저 ‘선의‘로 포장할 수 있는 교묘한 매체다. 선악의 판단 기준은 사진 그 자체가 아니라, 사진이 놓인 맥락일 수밖에 없다. - P92
한 번의 전쟁을 직접 치르는 것과 여러 번의 전쟁을 목도하는 것의 무게는 어떻게 다른가. 겪는 것과 보는 것의 감도와 무게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무게를 계량화할 수 있는가, 잴 수 있는 감도인가. 나는 내가 진 짐의 무게도 몰라 허우적대며 살아왔다. 다른 이가 진 짐의 무게를 가늠하려 더듬이를 세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가늠이라는 사실을 안다. 어려운 일이다. 타인이 진 고통의 무게를 잰다는 것은. 본 것이 쌓였다해서 겪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더듬이가 부러진다. - P162
해마다 1월이면 나는 검붉게 타오르는 불 앞에 다시 선다. 이 불은 온기조차 없는 사진에 불과하지만, 가만히 바라보는 나를 그 때 그 자리로 끌고 간다. 만약 그 불기둥이 사람을 기름 삼아 타오르고 있음을 정확히 알았다면, 혹은 불타는 사람을 보았다면 사진기를 든 나는 무엇을 달리 행동했을까. 화염 속에서 죽을 줄 알았다면 철거민들은 망루를 세웠을까, 망루에 올랐을까. 대형 참사가 벌어질 줄 알았다면 공권력은 무모한 진압 작전을 전개했을까. 마피아처럼 악랄했던 건설 자본의 태도는 또 어땠을까. 애당초 망루는 파란색이었다. 그것이 사람과 함께 시뻘겋게 달아오를 줄, 시커멓게 숯이 될 줄 알았던 사람은 없었다. - P191
과거로 날아간 ‘만약‘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건 늘 현재다. 어떤가. 우리는 용산 참사로부터 10년만큼이라도 멀어졌는가, 자유로워졌는가. 망루의 불은 꺼졌지만, 망루에 불을 붙인 거대한 탐욕의 불도 함께 꺼졌나. - P192
사진을 믿는가.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다루되,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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