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고백, 그 후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난 그만 감기에 걸렸어. 봄을 너무 기다렸나 봐. 좀 따뜻해지자마자 최대한 간단하게 입고 즐겁게 뛰어나갔다가 병들어서 돌아왔네.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 그런데 흥분해서 뛰어나갔다가 병들어 돌아온 게 꼭 첫사랑의 운명이랑 닮지 않았니? 첫눈에 반한다는 걸 믿느냐고? 물론 믿어. 절대적으로. 그리고 넌 내가 믿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 왜냐하면 난 늘 좋은 소식을 기다려왔으니까.

 사실 난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읽으면서 지나이다와 그 아버지가 에로틱한 관계까지 갔을까? 너무나 궁금했었고 그 장면을 초조하게 찾았던 기억이 나. 지나이다 앞에 있을 때 아버지의 이미지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있을 땐 결코 보인 적 없는 ‘우뚝 서 있는 동물’ 같았거든. 강력하고 매혹적인 미혼의 소녀, 그리고 완숙기에 접어든 기혼 남성의 사랑. 그 둘의 사랑에는 어딘지 위험하고 절박한 데가 있을 게 틀림없지. 너는 혹시 그 옛날에 밤의 하숙집을 몰래 빠져나가 스무 살쯤 연상의 여인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 그렇다면 지나이다와 아버지의 고뇌를 단숨에 이해할거야. 이런 사랑에서는 사랑의 자격, 조건, 이해관계, 뻔한 계산 이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리고 마니 난 너무 통쾌해. 그리고 고뇌 없는 행복한 사랑이 차라리 가장 불행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야. ‘이 사랑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나?’ 혹은 ‘무엇을 위해 사랑을 대가로 바쳤나?’ 난 이런 질문들이 좋아. 사랑이 자기 판단의 준거인 경우가 좋아.

 첫사랑에 관한 모든 소설들이 그렇게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사랑 이후가 나와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렇게 뜨거웠던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나 원하는 것이 있어. 그것도 바로 눈앞에. 그런데 그걸 얻지는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난 뒤에 우리들은 어떻게 살게 될까? 그 얻지 못한 사랑에 끝까지 충실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아! 모든 위대했던 감정들, 감각들은 얼마나 사소해졌던가? 그런데 그렇게 사소해져 있는 우리 뒤에 있는 첫사랑의 광채는 또 얼마나 찬란하던가? 생활이 비참할수록 첫사랑의 광채는 기억 속에서 마치 환각인 것처럼, 꿈인 것처럼 나날이 찬란하게 빛나지.

 첫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의 시간들일지도 몰라. 첫사랑을 경험하는 자는 반드시 뭐든 귀한 것을 잃게 돼. 사랑의 경험은 상실의 경험이고 그 상실에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까지 포함돼.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잃더라도 타인을 받아들이려 또 타인 속으로 들어가려 했던 그 경험만큼 내가 용기 있었던 적이 또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난 첫사랑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배운 것도 같아. 『좁은 문』의 주인공 제롬과 알리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그 둘의 사랑이 어떤가 하면 각자 편지로 이렇게 말하고 있어. 나중엔 둘 중에 누가 한 말인지도 구별하기 힘들 지경이야. ‘너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될까?’ ‘네가 내 곁에 있어야만 나는 진정한 나일 수 있고 그 이상일 수 있어.’ ‘그는 나 자신에게 나를 드러내준다.’ ‘그 없이 내가 존재할 것인가?’ ‘그와 함께 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있다.’ ‘그 없이 겪어야하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내게 기쁨이 되지 못한다.’

 제롬과 알리사의 이런 고백은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두고 하는 말 “ 나는 너야”와 함께 내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어. 나는 이런 고백들을 숭배하며 맘속에 내 뜨거운 사랑의 원형 같은 것을 만들어 왔다고도 할 수 있어. 그런데 알리사가 제롬에게 한 말 중 내가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진전(발전)이 없는 상태를 소망할 수는 없다”야.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선 이런 말을 해.

   
  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없다면 내게 삶이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소설 좁은 문에서 알리사의 입을 통해 “제 아무리 행복한 것일지라도 발전이 없는 상태란 나로선 바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발전이 없는 기쁨이라면 경멸할 것입니다.”라고 한 말은 바로 내 마음의 표현이다.  
   

 내게 사랑의 맹세는 앙드레 지드의 이 말과도 비슷할 거야. 내게 사랑의 맹세는 순간의 황홀한 경험이 아니야.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의지적 선언 같은 거야. 그래서 난 사랑은 형용사의 나열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 이후, 사랑의 약속 이후, 두 사람이 어떤 진리를 함께 생산해 내느냐의 문제라고 봐. 모든 끈질기고 진실한 사랑은 고뇌와 함께 분명히 희망을 담고 있어.

 그런데 『좁은 문』의 알리사는 왜 그 사랑의 길을 제롬과 함께 걷지 않고 홀로 좁은 문으로 들어 가려했을까? 우선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알리사의 행복관인 것 같아. 알리사는 여동생 쥘리에트(사실 제롬을 사랑했으나 언니를 위해서인지 재빨리 맘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 난 이런 행동이 짜증나. 이거야말로 선량함을 가장한 복수 아니니? 악이 되어버리는 선 아니니?)의 결혼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해.

   
  ‘어쩌면 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너무나도 실용적이고 너무 쉽게 얻어진 것 같고 또 마치 자로 잰 듯이 완벽하다고 느껴져서 영혼을 옥죄어 질식시키는 것처럼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으로 가는 도정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오! 주여 너무 쉽게 다다를 수 있는 행복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소서! 당신 곁에 이를 때까지 저의 행복을 미루고 멀리 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옵소서’  
   

  넌 이런 행복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행복관에는 숭고한 면이 있어. 그러나 난 아무리 생각해도 알리사가 미덕과 행복을 착각한 것이라고 밖엔 보이지 않는데다가 그리고 솔직히 이런 행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사랑하는 남자를 떼어 놓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 사랑이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녀는 쉽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야.(사실 행복은 각자가 외롭게 추구해야할 어떤 목적이 아니야. 그녀는 자기 입으로도 행복은 과정, 도정이라고 해놓고선 사실상 그걸 부정해. 우린 어떻게 좁은 문을 함께 통과할 수 있을까? 알리사는 왜 그 고민을 지상에선 풀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쉽게 얻은 행복을 마뜩찮아 하는 그녀의 시선은 존중해. 그녀는 좀처럼 타협이라곤 하지 않았으니까. 언젠가 행복에 대해서도 우리 이야기해보지 않을래? 나는 지금 알리사의 눈빛이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어. 그리고 그 때문인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던 너의 눈빛이 겹쳐서 떠올라. ‘우는 자는 행복하다’는 말을 이해하는 데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걸까?

  그런데 「만추」에서 탕 웨이의 연기가 그렇게 빛났니? 궁금하다. 난 어제 네루다의 시낭송을 들었는데 너무 너무 좋았어. 큰 바위에 큰 파도가 부딪히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안녕.

 ------------------------------------------------------------------------  

 

  <좁은 문> 

   앙드레 지드 / 이혜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의 고백, 그 후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난 그만 감기에 걸렸어. 봄을 너무 기다렸나 봐. 좀 따뜻해지자마자 최대한 간단하게 입고 즐겁게 뛰어나갔다가 병들어서 돌아왔네.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 그런데 흥분해서 뛰어나갔다가 병들어 돌아온 게 꼭 첫사랑의 운명이랑 닮지 않았니? 첫눈에 반한다는 걸 믿느냐고? 물론 믿어. 절대적으로. 그리고 넌 내가 믿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 왜냐하면 난 늘 좋은 소식을 기다려왔으니까.

 사실 난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읽으면서 지나이다와 그 아버지가 에로틱한 관계까지 갔을까? 너무나 궁금했었고 그 장면을 초조하게 찾았던 기억이 나. 지나이다 앞에 있을 때 아버지의 이미지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있을 땐 결코 보인 적 없는 ‘우뚝 서 있는 동물’ 같았거든. 강력하고 매혹적인 미혼의 소녀, 그리고 완숙기에 접어든 기혼 남성의 사랑. 그 둘의 사랑에는 어딘지 위험하고 절박한 데가 있을 게 틀림없지. 너는 혹시 그 옛날에 밤의 하숙집을 몰래 빠져나가 스무 살쯤 연상의 여인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 그렇다면 지나이다와 아버지의 고뇌를 단숨에 이해할거야. 이런 사랑에서는 사랑의 자격, 조건, 이해관계, 뻔한 계산 이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리고 마니 난 너무 통쾌해. 그리고 고뇌 없는 행복한 사랑이 차라리 가장 불행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야. ‘이 사랑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나?’ 혹은 ‘무엇을 위해 사랑을 대가로 바쳤나?’ 난 이런 질문들이 좋아. 사랑이 자기 판단의 준거인 경우가 좋아.

 첫사랑에 관한 모든 소설들이 그렇게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사랑 이후가 나와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렇게 뜨거웠던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나 원하는 것이 있어. 그것도 바로 눈앞에. 그런데 그걸 얻지는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난 뒤에 우리들은 어떻게 살게 될까? 그 얻지 못한 사랑에 끝까지 충실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아! 모든 위대했던 감정들, 감각들은 얼마나 사소해졌던가? 그런데 그렇게 사소해져 있는 우리 뒤에 있는 첫사랑의 광채는 또 얼마나 찬란하던가? 생활이 비참할수록 첫사랑의 광채는 기억 속에서 마치 환각인 것처럼, 꿈인 것처럼 나날이 찬란하게 빛나지.

 첫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의 시간들일지도 몰라. 첫사랑을 경험하는 자는 반드시 뭐든 귀한 것을 잃게 돼. 사랑의 경험은 상실의 경험이고 그 상실에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까지 포함돼.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잃더라도 타인을 받아들이려 또 타인 속으로 들어가려 했던 그 경험만큼 내가 용기 있었던 적이 또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난 첫사랑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배운 것도 같아. 『좁은 문』의 주인공 제롬과 알리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그 둘의 사랑이 어떤가 하면 각자 편지로 이렇게 말하고 있어. 나중엔 둘 중에 누가 한 말인지도 구별하기 힘들 지경이야. ‘너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될까?’ ‘네가 내 곁에 있어야만 나는 진정한 나일 수 있고 그 이상일 수 있어.’ ‘그는 나 자신에게 나를 드러내준다.’ ‘그 없이 내가 존재할 것인가?’ ‘그와 함께 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있다.’ ‘그 없이 겪어야하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내게 기쁨이 되지 못한다.’

 제롬과 알리사의 이런 고백은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두고 하는 말 “ 나는 너야”와 함께 내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어. 나는 이런 고백들을 숭배하며 맘속에 내 뜨거운 사랑의 원형 같은 것을 만들어 왔다고도 할 수 있어. 그런데 알리사가 제롬에게 한 말 중 내가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진전(발전)이 없는 상태를 소망할 수는 없다”야.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선 이런 말을 해.

   
  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없다면 내게 삶이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소설 좁은 문에서 알리사의 입을 통해 “제 아무리 행복한 것일지라도 발전이 없는 상태란 나로선 바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발전이 없는 기쁨이라면 경멸할 것입니다.”라고 한 말은 바로 내 마음의 표현이다.  
   

 내게 사랑의 맹세는 앙드레 지드의 이 말과도 비슷할 거야. 내게 사랑의 맹세는 순간의 황홀한 경험이 아니야.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의지적 선언 같은 거야. 그래서 난 사랑은 형용사의 나열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 이후, 사랑의 약속 이후, 두 사람이 어떤 진리를 함께 생산해 내느냐의 문제라고 봐. 모든 끈질기고 진실한 사랑은 고뇌와 함께 분명히 희망을 담고 있어.

 그런데 『좁은 문』의 알리사는 왜 그 사랑의 길을 제롬과 함께 걷지 않고 홀로 좁은 문으로 들어 가려했을까? 우선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알리사의 행복관인 것 같아. 알리사는 여동생 쥘리에트(사실 제롬을 사랑했으나 언니를 위해서인지 재빨리 맘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 난 이런 행동이 짜증나. 이거야말로 선량함을 가장한 복수 아니니? 악이 되어버리는 선 아니니?)의 결혼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해.

   
  ‘어쩌면 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너무나도 실용적이고 너무 쉽게 얻어진 것 같고 또 마치 자로 잰 듯이 완벽하다고 느껴져서 영혼을 옥죄어 질식시키는 것처럼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으로 가는 도정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오! 주여 너무 쉽게 다다를 수 있는 행복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소서! 당신 곁에 이를 때까지 저의 행복을 미루고 멀리 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옵소서’  
   

  넌 이런 행복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행복관에는 숭고한 면이 있어. 그러나 난 아무리 생각해도 알리사가 미덕과 행복을 착각한 것이라고 밖엔 보이지 않는데다가 그리고 솔직히 이런 행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사랑하는 남자를 떼어 놓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 사랑이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녀는 쉽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야.(사실 행복은 각자가 외롭게 추구해야할 어떤 목적이 아니야. 그녀는 자기 입으로도 행복은 과정, 도정이라고 해놓고선 사실상 그걸 부정해. 우린 어떻게 좁은 문을 함께 통과할 수 있을까? 알리사는 왜 그 고민을 지상에선 풀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쉽게 얻은 행복을 마뜩찮아 하는 그녀의 시선은 존중해. 그녀는 좀처럼 타협이라곤 하지 않았으니까. 언젠가 행복에 대해서도 우리 이야기해보지 않을래? 나는 지금 알리사의 눈빛이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어. 그리고 그 때문인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던 너의 눈빛이 겹쳐서 떠올라. ‘우는 자는 행복하다’는 말을 이해하는 데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걸까?

  그런데 「만추」에서 탕 웨이의 연기가 그렇게 빛났니? 궁금하다. 난 어제 네루다의 시낭송을 들었는데 너무 너무 좋았어. 큰 바위에 큰 파도가 부딪히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안녕.

 ------------------------------------------------------------------------  

 

  <좁은 문> 

   앙드레 지드 / 이혜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타티스 2011-03-03 0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동안 책 내용의 중심에서서 설명해주시는 기분입니다. 쥘리에트..
 

 

  맨 처음 사랑만이 첫사랑은 아니다

  
민규동(영화감독) 

 

 안녕, 나의 커피진주.

조용히 네게 속삭이기 시작한 지 벌써 2주가 지났구나. 그 사이,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여주인공 마리아 슈나이더가 지병으로 죽었고, 또 병약하고 가난했던 한 영화인이 세상을 떴고, 또 압제에 맞선 수백 명의 죽음을 승화시킨 이집트의 혁명 소식이 전해졌어. 하루하루가 한 개인의 역사가 정점을 맞이하고 있고, 세계사도 못지않게 클라이맥스 챕터를 기록하고 있어. 신의 프리즘으로 지금 이 지구 상 인생들의 빛들을 분해해 본다면, 어떤 인간에겐 맑은 피 한 방울이 시급하고, 어떤 이는 밥 한 숟갈과 김치 한 점에 만족하고, 또 어떤 이는 마지막 자유의 공기 한 모금 가쁘게 들이마시며 뜨거운 불꽃 속에 산화하고 있겠지. 미시와 거시를 오가는 이 숨 막히는 싸움 속에서 어쩌면 또 많은 이들이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을 거야. 그것이야말로 당장 목숨을 내놓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확신한 채 말이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에게 절박하지 않은 순간이 있을까. 스스로 목숨을 놓는 순간조차도 살아야 할 이유를 절박하게 떠올리고 있지 않을까.

오늘 얘기하려는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속에도 그런 사적으로 빛나는 역사적 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한 남자가 등장해. 인생의 황혼기에 이른 남자, 블라디미르 페트로비치가 젊은 날의 특별한 기억을 털어놓는데, 그 기억 속엔 압도적으로 매력적인 여인 지나이다가 등장하고, 그 주변엔 절대복종하는 여러 남자들이 있어. 카리스마 넘치는 지나이다는 그 남자들을 맘껏 조롱하지만, 의문의 한 남자에겐 헌신과 희생의 모습을 보이는데, 그 의문의 사내가 실은 그토록 냉정하고 엄격했던 자기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충격에 빠져 ‘사랑'과 '열정'의 의미를 되묻게 돼.

   
  베아트리체를 처음 본 순간, 아무도 볼 수 없는 마음의 방에 살고 있는 내 영혼은 너무도 격렬하게, 작은 맥박 소리에도 마음을 털어놓고 부들부들 떨었다. _ 단테.

갈라를 처음 본 순간,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운명의 여인, 필생의 여인임을 확신했다. _달리.
 
   

여느 아티스트들의 기본적인 포트폴리오처럼 투르게네프도 강렬한 첫 경험의 인상으로 이 이야기를 시작해. 깨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첫사랑은 꼭 ‘첫눈에 반한다’는 우연과의 한판 전쟁을 치른 후에 시작된다고 믿는 사람처럼. 어때, 넌? 너도 첫눈에 반하는 사랑을 믿니?

문득 너에게 반했던 그 순간이 떠올라. 벚꽃이 마구 흩날리던 봄날, 산기슭 오솔길 사이로 한 여인을 봤는데, 소설 『태백산맥』 한 권을 옆에 끼고, 긴 머리 바람결에 흐트러뜨리며, 사뿐한 발걸음으로 식당으로 향하고 있더라. 오징어 다리 한 가닥 질근거리며, ‘몸에 열이 많아서 옷을 얇게 입어야만 해…….’라고 투덜대는 듯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블라디미르처럼 이런 한 문장이 떠올랐었어.

“뭐든지 줄 수 있다…….”

그리곤 속으로 이런 결심을 했어. 저 난데없는 여인을 앞으로 두 번 더 보게 된다면, 그땐 말을 건네리라. 우연이 운명으로 화학적 변이를 거치려면 ‘최소한 세 번의 반복은 있어야 한다’고 믿어왔으니까. 그렇게 운명을 확인해 왔었으니까. 기다리기로 했어.

몇 달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나쁜 사상을 몰래 공부하는 지하 동아리 연합 합숙에서 믿기 어렵게도 너랑 세 번째 조우를 하게 됐어. 그런 시공간에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너의 등장에 깜짝 놀란 난, 초점이며 후각, 청각, 주파수, 초능력까지 모든 감각을 밤새 너에게 집중했었어. 뭘까, 도대체 저 여인은. 왜 나의 영역에서 자꾸 맞닿을까……. 어찌어찌하여 그날 새벽, 우린 북한산 중턱 어느 바위에 둘만 나란히 앉아 있게 됐어. 새벽까지 깨어 있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북한산 정상을 올랐다가 길이 엇갈리고 우리만 남은 거지. 그래, 너는 내 운명!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사이에 “내게 정말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고, 그녀가 나타나기 전의 나는 아무것도 몰랐으며,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꼈어. “이렇게 나는 그녀 앞에 앉아 있다. 나는 그녀와 알게 되었다……. 행복하다, 세상에, 이런!” 정말 블라디미르처럼 “내 안의 피는 늘 방황했고, 심장은 달콤하면서도 간지럽게” 죄어들었으니까. 물 한 방울만 떨어져도 넘칠 듯 꽉 찬 우물처럼, 순식간에 사랑에 빠질 거라는 예감이 “내 마지막 피 한 방울에까지 스며 혈관을 따라 흘러들었다”라고 기억해. 넌 결국 “그 아름다운 손가락이 내 이마도 건드려주기만 한다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라고 생각하게 만들 정도로 소년을 송두리째 함락해 버렸어. 지나이다가 블라디미르에게 그랬듯.

이런 현상을 두고 어떤 학자는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과 아드레날린 같은 화학 물질이 신경 중추인 편도핵을 자극해서이다, 혹은 DNA에 잠재적인 감정 지수가 예민하게 내장된 본능적인 유전인자의 속성 때문에 이성을 압도한 ‘감정의 이성 납치 현상’에 걸려든 것이라고 우기기도 해. 하지만, 이런 마법을 그저 생물학적인 반응으로 폄하해서, 우린 어떤 위로를 받게 될까? 신화를 현실로 끌어내리려는 속마음이 뭘까. 실제로 첫눈에 반하는 사랑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부족하고 또 경험이 부재한 자들의 질투 아닐까? 

   
  나는 가만히 앉아서 주의를 둘러보고 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 그 어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 넘쳐흐른다. 그 속에는 우수도, 환희도, 미래에 대한 예감도, 희망도, 삶의 공포도, 그 밖에도 온갖 것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이런 것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내 마음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어떤 것에도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혹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하나의 이름, 즉 지나이다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너도 예상할 수 있듯, 이 소설에서 내 이목을 끈 사람은 단연, 지나이다야. 아킬레스건을 가진 팜므 파탈이지. 지고한 여성, 부서질 듯 파멸로 이끌려가며, 현명하면서도 생기 있는, 우스우면서도 비극적인, 자유로우면서도 고고한 충동적 욕망을 끝까지 좇는 여성상이야. 문득 누가 생각나네……. 너, 커피진주.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여자야. 

   
  나는 내가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하는 그런 남자를 사랑할 수 없어요. 내게는 나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하고 맞닥뜨릴 것 같지는 않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죠! 난 누구의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이런 무서운 여자에게 반한다면 누구든 이런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히게 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려 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걸요.” 이렇듯 야심만만한 지나이다는 뭇 남성 숭배자들 사이에서 끝까지 여왕의 자세를 지키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소년의 아버지 앞에선 한낱 여자로 전락해. “그래요. 나는 꼭 가겠어요. 내가 그분에게로 가려고 하면 어떠한 힘도 나를 막을 수는 없지요. 나는 그분의 품속으로 뛰어들어 그분과 함께 정원의 어둠 속으로, 살랑거리는 나뭇잎 소리와 분수의 물소리 그늘 아래로 자취를 감추고 말 거에요…….” 멋지지? 원한다면 진정으로 욕망의 포로가 되는데 주저함이 없는 여자야. 내 스타일! 그래 그런 틈바구니조차 없는 여자라면 여행하는 새들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이름 없는 돌부처만 못한 존재일 테니까.

“나는 한 작품만을 만족스럽게 되풀이해 읽곤 한다. 그것은 『첫사랑』이다. 『첫사랑』에는 어떤 가식도 없으며 오직 사실만 그려져 있어서, 다시 읽을 때마다 여러 인물이 마치 살아 있는 인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는 이렇게 강조했어. 실제로 투르게네프의 아버지는 기병 장교였는데도, 도박에 방탕한 생활로 파산하는 바람에, 못생기고 포악한 여섯 살 연상의 부유한 지주와 결혼해. 돈을 노리고 한 결혼이니 당연히 부부 싸움이 끝없이 이어졌지. 어쩌면 불행한 결혼 생활이 투르게네프의 어머니를 더욱 추하고 모난 여자로 만들었을 거 같아. 그런 과거사 탓인지, 작가의 주장대로라면 자신은 ‘여성성이 가득한’ 남성이고, 사랑에 의한 ‘존재의 채움’을 경험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었다고 해. 또 ‘매 번의 사랑이 사람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폭풍우나 회오리바람 같고, 그 회오리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믿었어. 음…… 이쯤이면 귀엽다고까지 할 만한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건 투르게네프가 결혼은커녕, 평생 짝사랑의 고통만 겪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야. 그렇다면, 더욱 궁금해져. 반추해 보면 감추고 싶은 과거일 수도 있는데, 투르게네프가 굳이 이 소설을 그렇게까지 아껴 자전이라고 널리 알린 이유가 뭘까.

지금 떠오르는 소설이 있는데, 너도 봤을 거야.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라고. 그 작가는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작품 세계를 정의하면서, 자기 작품도 ‘소설’이라고 안 부르고 ‘진실한 이야기’라고 불렀어. 그래서인지 그 소설을 읽을 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읽게 돼. 상상력과 리얼리티의 경계는 읽는 자의 경험치에 따라 삼투되는 방식이 달라지는 거잖아. 투르게네프도 어린 시절부터의 오랜 상실과 그로 인한 평생의 결핍에 너무 힘드니까,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허물고 자신을 제발 껴안아 달라고 독자에게 위안을 구했던 게 아닐까. 여자에 대한 불신과 배신을 통해 「흡혈귀」 같은 작품을 그렸던 뭉크처럼 말이야. 이쯤 되면 그토록 소심한 투르게네프에겐 “사람들은 내가 여자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생각해봐야 할 것 중 그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죠?”라고 되묻던 로댕의 뻔뻔함을 선물하고 싶어져.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를 보면, 도스토옙스키가 어린 시절 지독한 자린고비였던 아버지 덕에 돈에 대한 제대로 생각을 갖추지 못한 채 성장하고, 훗날 어떻게 평생 돈과 얽혀 헉헉대며 살았는지를 알게 돼. 어린 시절 기이한 첫사랑을 경험했고,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살아간 투르게네프도 그에 빗대어 『투르게네프, 사랑을 위해 펜을 들다』라고 그의 일생을 정리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는 서문에 이렇게 쓸 수 있겠지. “나는 그런 심정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 생애에 한 번도 그런 감정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는 자신을 불행하게 여겼을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사랑이 베르테르만큼 원숙하고 헌신적이지는 않지만, 나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한동안 추억에 빠져들게 돼. 그리고는 노곤해진 마음 위로 같은 제목의 괴테의 시가 떠올라.

   
 

첫사랑


아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이냐,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의 그때를.
아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이냐,
그 아름다운 시절의
다만 한 토막이라도.

쓸쓸히 나는 이 상처를 키우며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슬픔에
잃어버린 행복을 슬퍼하고 있으니,
아아, 누가 다시 가져다줄 것이냐,
그 아름다운 나날
첫사랑의 그 즐거운 때를.

 
   

어때? 첫사랑, 그 즐거운 때를 너도 기억하고 있니? 아직 네 얘길 들어보질 못했어. 언젠가 꼭 들려주길 바라. 네가 나의 첫사랑을 묻는다면, 잠시 주저하겠지만, 일단 떠오르는 순간이 있어. 일곱 살 때, 빨간 내복을 입고 강가에서 잡은 새끼 가물치의 화형식을 지켜보며 울먹이던 은심이. 그리고 다음 초등학교 시절, 여름이면 속옷 없이 흰 블라우스만 입고 단추 하나를 풀어놓고 다니던 노처녀 담임선생님. 또 텅 빈 복도에 외나무 학다리처럼 서서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순식간에 날 매혹시켰지만, 결국 털북숭이 야구부 친구를 좋아했던 말라깽이 소녀. 그리고 끊임없이 집 앞을 헤매며 뭐라도 훔쳐보려 애썼던 F단지 147호의 새침데기 반 친구. 고교 시절 내내 사제를 꿈꾸며 신학대학으로 가더니 목사 오빠랑 순식간에 결혼해 버린 소울 메이트 꺽다리. 반에서 밥을 가장 오랫동안 먹던 재수학원의 식탐녀. 전경들에게 쫓기고 있다고 구해달라고 전화를 해 밤새 을지로역을 헤매게 했던 신입생 후배. 불타는 탱고를 함께 소화해낼 수 있었던 유연한 허리 소유자였던 내 공연팀 멤버. 종아리가 열무 같았던 탓에 열무김치에 몰입하게 만들었던 작가 지망생 등등.

난 내 이십 대 초까지 펼쳐진 첫사랑의 프롤로그만으로도 몇 날 며칠을 얘기할 수 있어. 왜냐고? 어떤 영화엔 이런 낙서가 나와. ‘맨 처음 사랑만이 첫사랑은 아니다.’ 맞아. 사랑도 진화를 한다고 믿는 난, 내 생애 최초의 사랑이 첫사랑이 아니라, 내가 그 상대에게 열정을 품는 순간, 헌신의 각오를 하는 순간, 그리고 자기희생조차도 감미로워지는 순간, 그 대상과 겪는 첫 번째 사랑이 첫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 처음 시작된 사랑이 시간이 지나도 퇴화하지 않고 끝없이 성장을 거듭할 때, 그리고 매 번의 도약 때마다 돌이켜보는 그 사랑의 실체가 오로지 진심이었음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때, 그제야 첫사랑은 하나의 신화가 되고, 영원한 기억으로 자리 잡게 되는 거니까. 

   
  내 아들아, 여인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라…….  
   

하지만, 아버지가 죽음 직전에 블라디미르에게 남긴 이 잠언처럼, 그래 어쩌면 이 소설은 결국 성인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기. 그것을 달콤하게만 상상하는 것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겠어.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라는 영화가 떠올라. 그 영화는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 위로 화염병이 서서히 떨어지는 장면으로 시작돼. 그리고는 이런 내레이션이 흐른단다.

   
  마천루에서 떨어진 남자의 이야기를 아니? 한 층 한 층 떨어지면서 자신에게 타일렀대.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하고. 그런데 중요한 건 어떻게 떨어지느냐가 아냐. 중요한 건 착륙이야.
 
   

맞아. 어른이 된다는 것은, 순수했던 시절을 가르며 성인의 사랑을 한다는 것은, 추락하는 게 아니라 착륙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어떻게 발을 딛느냐가 중요한 거야. ‘뇌우에 맞긴 했지만 아주 멀리서 일어난 것이어서 천둥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겪는 사랑이 무엇인지 느낄 새도 없었지만, 첫사랑, 그것이 끝나는 순간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제대로 깨물어볼 수 있다면, 그래서 정상적인 삶으로의 귀환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다음도 버티어 낸다면, 두 번째 사랑, 세 번째 사랑의 가능성이 열린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결국, 삶은 강렬한 순간들 속에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지속되는 시간 속에 있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얘기할게. 블라디미르의 첫사랑은 지나이다고, 지나이다의 첫사랑은 블라디미르의 아버지이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아버지에게도 첫사랑이었을까? 책을 덮으면서 나는 그게 문득 궁금해졌어. 단언컨대, 이 소설을 두 번 읽는다면 재미가 남다를 수 있어. 하지만, 그땐 이렇게 약속을 해야 해. 블라디미르가 쓴 첫사랑을 읽는 게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쓴 첫사랑을 읽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을 남다르게 즐길 수 있고 투르게네프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버전이라고 봐. 

  ------------------------------------------------------------------------  

 
  <첫사랑> 

   이반 투르게네프 / 최진희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눈다는 것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드디어 네 글을 보고 말았어. 한 마리 새가 날아가면서 그 청아한 목소리로 온 산을 흔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네 글을 읽으니까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어떤 날들이 떠오르는구나. 학교를 졸업하고 한번도 기억해 보지 않았던 대화 같은 거 말이야.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린 언젠가 데미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어. 우리는 부화되는 새가 알을 깨뜨리는 것과도 같이 뭔가를 깨뜨려 나가는 것이 삶의 과정이란 건 아무래도 맞는 말인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어. 그날도 눈부신 봄날이었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앞에 뭐가 기다릴까 갑자기 숙연해졌고 둘 다 마치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딴청을 부렸었으니까. 그때 그렇게 눈부신 빛이 없었더라면 또 어디에 우리의 떨리는 마음을 투영할 수 있었을까? 난 그때 벌써 다가올 일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느꼈어. 이상하지 않니? 어떻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을까? 깨뜨려야 하는 이 세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짝이란 걸 느꼈던 걸까? 사랑하는 많은 것들까지도 깨뜨리고 나가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을까? 난 수많은 상처와 생채기들이 벚꽃 잎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걸 본 기분이었어.

 네 글은 수많은 것들을 상기시키면서 이상하게도 내 앞에 수많은 풀과 나무와 구름을 끌고 오는 것 같아. 너는 그 사이로 풀피리를 불고 춤추며 씨 뿌리면서 오는 거니? 헨젤과 그레텔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멩이를 뿌렸지만 넌 어디로 돌아가기 위해 씨를 뿌리는 거니? 아, 그래! 넌 순수한 영원 회귀의 공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피리를 불고 씨를 뿌리는구나. 그 순수한 공간에도 달 뜨고 꽃 피고 이파리 달리고 한 줄기 빛이 떨어지겠지. 그 그늘 아래 쉬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발을 뻗고 기대고 어디선가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주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어 저 먼 아득한 곳을 봤으면 좋겠다. 나는 작은 새가 이슬을 쪼아 먹는 걸 본 적이 있어. 배가 파란 새였어. 지금 내 가슴은 이슬을 쪼는 작은 새, 아니 이슬 속에 잠긴 작은 새의 부리 같아. 심장 소리가 퐁당퐁당 소리로 들려 .

 그리고 쉼보르스카의 시를 상기시켜 줘서 고마워. 그 시는 실은 내가 나의 런던 여행기에 한 번 인용했었어. 트라팔가 광장에서 사람들을 볼 때 그 시가 생각났던 건, 아이스크림을 먹고 전화를 걸고 풍선을 쫓아가는 무심한 동작 속에서도 어떤 간절함을 봤기 때문일 거야. 누군가의 인생에 뛰어들어 가고 싶다는 간절함이겠지. 그렇게 보니 광장의 평범한 계단도 누군가에게는 운명의 제단 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 네가 말했던 것처럼, 혹은 그 옛날 보르헤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혹은 사람들은 서로서로의 파편, 서로서로의 분신이겠지.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선을 그어본다면 수많은 삼각형, 수많은 마름모꼴, 수많은 다이아몬드, 수많은 별자리가 그려질 거야. 그 선들이 저마다의 운명의 선일까? 우리는 수많은 중력과 수많은 만유인력을 볼 거야. 수많은 반쪽짜리 사과와 달을 볼 거야. 우리는 또 그 봄의 눈부신 햇살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눈을 뜨고 짐짓 의연한 척 왼팔 오른팔을 흔들며 그 형형색색의 도형들 속을 걸어 나가겠지.

 그렇지만 이십여 년의 세월을 뚫고 네가 쓴 글 중 다른 날이 아닌 오늘, 무엇보다도 내 맘을 사로잡는 건, 너의 이런 표현이야.

   
  난 슬픔 가득한 이 생애의 어떤 순간, 포착해 주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 버리는 모든 것들, 아무도 껴안아주지 않아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잔해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 그 인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더 뚜렷해졌어. 누려야 할 만큼 누리지 못한 채, 그저 의무적으로 소모되며 잊히는 삶, 그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기쁨, 고통, 희망, 절망, 분 노, 용서를 부여잡고, 움켜쥐고 싶어. 그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이 있어.  
   

 네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라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 네가 너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하지만 오늘은 슬프게도 거기서 하나의 질문이 나와. 너도 뉴스 들었지? 영화 시나리오를 쓰다가 굶어 죽음에 이른 최고은이란 사람 말이야. 난 방송사에서 우리 쌀로 만든 정성 가득한 도시락을 피디들과 나눠 먹다가 그 이야길 들었어. 그녀는 누구였을까? 나는 그녀가 잠들듯이 스르르 죽어버린 순간을 생각해 봐.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내일 아침에 눈뜨면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서 시나리오를 써야지, 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다신 눈을 뜨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언젠가 세상이 내 노력과 ‘작은 기쁨, 고통, 희망, 절망, 분노, 용서’를 알게 될 날이 있겠지, 라고 생각했을까? 난 지금 많은 질문을 던져보지만 이 이야긴 미스터리가 아니야. 명백한 현실이야. 영화계와 우리 사회의 모순이 한 연약한 육체에 쏟아져 내렸어. 그녀는 왜 그렇게 약해졌던 걸까? 그녀의 여윈 마지막 모습에도 꿈이란 게 남아 있었을까?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난 산 채로 죽었어요!” 너에게도 묻고 싶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만들까?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마도 무척 슬픈 일이겠지.

 난 슬프고 답답한 와중에도 인어 공주 이야기가 잠시 생각났어. 알다시피 인어 공주는 소중한 것을 바치고 인간 세계로 들어오긴 했지만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 그래서 그녀는 인간 세계에 남 지 못해. 아침이 되자 그녀는 두둥실 떠올라. 그렇게 인간 세계와 왕자를 돌아본 인어 공주의 마지막 소원은 뭐였을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공기의 딸들에게로…….” 천상의 존재들이 대답했다.
“인어 공주에게는 영혼이 없고 인간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한 영혼을 얻을 수도 없지요. 공주의 영원한 존재는 또 다른 힘에 달려 있어요. 공기의 딸들도 마찬가지로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선행을 통해서 영혼으로 얻을 수 있답니다. 가여운 인어 공주, 그대도 온 마음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세요. 선행을 통해 영혼의 세계로 당신을 끌어올리면 300년 후에는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인어 공주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찼는데 그 눈에 왕자와 그의 신부가 인어 공주를 찾는 모습이 들어와. 그들은 애절한 시선으로 망망대해 진줏빛 물거품을 바라보았지. 그래서 인어공주는 이렇게 행동했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어 공주는 신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왕자에게는 바람을 보낸 다음, 대기 중에 떠 있던 장밋빛 구름 속으로 공기의 아이들과 함께 올라갔다. 300년 후에 우리는 천국으로 떠오를 것이다!  
   

 아! 자신의 두 다리로 굳게 서 있던 인간들은 영혼에 대해 이제 잊어버린 걸까? 인간이 선행을 베풀면 인어 공주는 영혼을 갖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인어 공주는 300년에서 더 오래오래 기다려야 해. 불쌍한 인어 공주들은 영원한 영혼을 갖길 꿈꾸며 우리 곁에 있겠지. 그래도 공주의 영원한 존재는 또 다른 힘에 달려 있다는 말이 나에게 용기를 줘. 나는 그녀의 탄생과 육체와 꿈과 육체와 존재의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그 인간 세계에 사는 한 인간으로 다시 네 글을 읽을 수밖에 없어. 네 글은 타인의 영혼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야.

 ‘난 슬픔 가득한 이 생애의 어떤 순간, 포착해 주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 버리는 모든 것들, 아무도 껴안아주지 않아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잔해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 그 인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더 뚜렷해졌어. 누려야 할 만큼 누리지 못한 채, 그저 의무적으로 소모되며 잊히는 삶, 그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기쁨, 고통, 희망, 절망, 분노, 용서를 부여잡고, 움켜쥐고 싶어. 그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이 있어.’

 나의 오랜 친구는 이런 생각을 품고 내게 제안을 하는구나. 우리 순수하자고. 우리 그렇게 하자. 꼭 그렇게 하자.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누자. 영혼을 걸고 그렇게 하자. 난 이제 다시 앙드레 지드 의 『좁은 문』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 『좁은 문』의 주인공 알리샤와 제롬의 사랑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니? 오늘 내 맘을 사로잡은 알리샤의 기도는 이런 거야.

   
  주여, 제롬과 제가 함께 서로 의지하며 당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여 주옵소서.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형제여, 힘들면 내게 기대게.”라고 하면 “자네를 내 곁에 서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네.”라고 답하는 두 순례자처럼 인생의 길을 따라 걷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아니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길은 좁은 길이옵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좁은 길이옵니다.  
   

  동쪽별. 좁은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좁은 거라고 너도 생각하는 건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알리샤는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아. 자신을 향한 제롬의 사랑을 더 필요한 곳, 더 긴요한 곳으로 돌릴 수 있도록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사랑을 희생하면서 이런 기도를 올려. 하지만 난 아무리 좁은 길이어도 형제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을 만큼은, 딱 그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싶은데 어떡하지? 난 오늘 최고은 씨의 좁은 문을 생각해. 이제라도 그녀의 좁았던 문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넓힐 수는 없나 생각해. 그렇게 하면 그녀의 영혼이 천상의 나라에서 함께 기뻐하지 않을까?

  이제 나도 너의 편지에 답을 하느라 『좁은 문』 이야기는 다음 주로 넘길 수밖에 없어. 그런데 『좁은 문』의 제롬도 너랑 좀 닮았어. 좀 어리숙하단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은 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단다. 수십 년째 반가워. 동쪽별.

  아! 그리고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그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말이야. 난 그날 너랑 헤어지고 하숙집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끝까지 다 들었어. 사파리와 대지와 하나가 되는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아직도 봄밤이면 창문을 열고 해마다 빼놓지 않고 클라리넷 협주곡을 듣는단다. 그런 밤에 하늘은 어찌나 독한 풀냄새를 풍기는지 난 구름들이 다 하늘의 땀구멍으로 느껴지고 그 향기에 취하지 않을 수 없어. 『좁은 문』에 이런 구절이 나와. ‘올바르게 태어난 영혼은 곧잘 감탄과 감사를 혼동한다.’ 우린 올바른 영혼을 보면서도 감탄과 감사를 혼동하게 되곤 하지. 오늘 너에게 무한정 감탄하면서 네가 존재하는 것 그 자체에 감사해.

 ------------------------------------------------------------------------  

 

  <좁은 문> 

   앙드레 지드 / 이혜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피진주와 동쪽별의 책읽기 서문에 대한 답문

  
민규동(영화감독) 

 

 안녕, 나의 커피진주.

 답장이 늦었지? 미안해. 지적인 데라고는 요만큼도 없이 온통 몸을 써대는 촬영 행군이 두 달 넘게 이어졌었거든. 새벽부터, 다시 새벽까지. 눈이 와도, 바람이 불어도, 연평도에 불이 나도, 구제역으로 300만의 서러운 눈물이 넘쳐도, 나는 카메라 앞에서 달려야 했어. 영화를 만드는 데는, 아마 글을 쓴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영혼이 불안에 잠식되는 걸 가위 눌린 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힘겨움이 있단다. 잠에 빠져들 땐 다가올 새벽이 두려워 꿈속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않길 바라기도 해. 그래도 어김없이 일어나, 그렇듯 밧줄 없이 맞닥뜨린 번지점프대 위에서 떨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김없이 너의 편지가 날아왔어. 그건 어느 노래 가사처럼, 홀로 걷는 밤길이 까만 어둠으로 외로울 때 들려온 어떤 이의 부드러운 음성이었고,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슬프게 살아갈 때 어깨에 닿은 어떤 이의 따뜻한 손길이었어.

 백만 명이 운집한 이집트의 타흐리르에서 날라오는 매콤쌉싸름한 모래 내음이 찬바람에 실려오는 설날 새벽. 별도, 달도, 바람도, 모두가 한 해의 여행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와 새출발을 하는 오늘. 이렇게 너를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다니, 왠지 흥분이 돼. 올해는 마고소양(麻姑搔痒)이라는 점궤를 선물받았는데, 아무리 떠올려봐도 내 가려운 데를 긁어줄 마고선녀로는 너밖에 떠올릴 수가 없거든. 어때, 설날 아침은? 보통날의 아침과 많이 다르니? 제사는 지내니? 오늘 넌 조부모님들 말고도 또 어떤 영혼에게 절을 하고, 불평을 하고, 기원을 하니? 궁금해. 난 절을 하면서, 얼마 전 돌아가신 박완서 작가가 떠올릴 거 같아. 그날은 나도 모르게, 그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라고 탄식을 내뱉었어. 동시대에 존재하는 게 얼마나 뿌듯한 일인지 실감 못 하다가, 그들이 사라지는 그 반짝-마지막 명멸의 순간에서야 우주의 한 조각이 소멸되는 상실감에 시달리기 시작해. 정말 아름답게 존재했었구나…… 라는 뒤늦은 절감 말이야. 그들이 정말 소멸되기만 한다면, 그 상실감은 회복할 길 없는 절대적인 결핍감일 텐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 그가 내 곁에 머무르는 방식이 화학적 전이를 이뤘을 뿐이니까. 예전엔 물리적으로 꽂혀 있던 책들이었지만, 지금은 그 속으로 스며든 영혼 덕에 훨씬 두터워져 있으니까. 그렇게 서서히 나의 고전으로 변모하고 있으니까. 궁금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일기며, 편지며, 쉴 새 없이 써대고, 또 남의 일기와 편지에도 실시간 답을 다는 시대에도, 어째서 그 작가는 나의 고전으로 자리 잡게 되는 걸까. 글솜씨 때문일까? 많이 썼기 때문일까?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쾌락』에서 이렇게 썼어. “책은 독자에게 ‘당신을 찾듯이 나를 찾아주시오’라고 말을 걸어준다.” 아마도 잃어버린 나를 찾아 헤매다 무심코 그 책에 닿게 되는 순간, 내게 말을 걸어주기 때문 아닐까? 그렇게 고전이 걸어주는 무의식의 마술에 몸을 맡기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그 책의 일부가 되어버리고, 그 순간, 그 책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서 은밀한 대화가 되고, 몸짓이 되고, 나의 앞길을 비추는 빛이 되기 때문 아닐까?

 왜 고전일까 묻는다면, 난 이렇게 생각해. 시대가 강요하는 판에 박힌 평범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무언가에 매달려 탈출해야만 해. 그것이 무엇일까. 또, 그것에 매달렸다가 한번 빠져들면 다시는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이런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에 어찌할지 주저하며 눈치 보기 십상인데, 그 해답을 찾으려면 우린 과거 위대한 인간들의 발자취를 살펴보아야 해. 과감히 그 길을 함께 걸어봐야 해. 결국 안개에 싸인 미약한 대답이 돌아올지라도, 뚫어지게 바라보고 필사적으로 스며들어야 돼. 그래야, 어느 순간 자기 인생과의 접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제서야 남다른 삶의 궤도로 다시 튀어 오를 수 있을 테니까. 그 ‘지적 잠입’과 ‘감성적 도약’의 매개는 각자에게 그 해답이 다를 거야. 어떤 예술가들에겐 고전 작품이 될 것이고, 순진하고 고독한 청년에겐 첫사랑이 될 수 있어. 지금 나에겐 이 새벽의 속삭임을 들어줄 너, 커피진주가 되겠지.

 누군가 왜 고전이냐고 자꾸 캐묻는다면, 이렇게 쉽게 투덜댈 수도 있어. 고전은 그만큼 생존력이 강하다는 증거잖아? 뭘 봐야 할지 모를 땐, 여태껏 이미 많은 검증을 거쳐서 살아남은 글들을 읽는 게 낫지! 야심 찬 시도를 했지만 결국 후회를 부를 멍청한 글들을 읽고는, 자신의 부족한 안목을 자책하며 오랜만에 호기 부려본 독서 의욕마저 몽땅 잃고 괜한 자괴감에 시달릴 필요 없잖아. 무엇보다, 과거만큼 미래를 선명히 보여 주는 부적은 없으니까, 앞날이 불안하게 느껴질수록 우린 뒤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첫 편지에서 ‘도저히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그런 날’, ‘깨달음의 파도가 덮친 날이 내게도 있느냐’고 물었지? ‘새로 태어난 것 같다는 사람들을 만난 적도 있는지, 그런 식으로 내게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제2의 생일 아침, 그런 빛이 있느냐’고 물었지? 그럼, 있어! 그런 날이. 너를 처음 만난 날! 바로 그날이야.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그 시절 얘긴 다음에 들려줄 기회가 있을 거야. 잠시 그날의 느낌을 떠올리면, 키예슬롭스키의 영화 삼색 연작 중 하나인 「레드」에 영감을 준 쉼보르스카의 「첫눈에 반한 사랑」이라는 이 시가 생각나. 한번 들어볼래?

   
  갑작스런 열정이 둘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느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인파 속에서 주고받던 “죄송합니다”란 인사를?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잘못 거셨어요”란 목소리를?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요, 기억나지 않아요.

이미 오래 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운명이 될 만큼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옆으로 슬며시 그들을 비껴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했음에야.
어쩌면 삼 년 전,
아니면 지난 화요일,
누군가의 어깨에서 다른 누군가의 어깨로
나뭇잎 하나가 펄럭이며 날아와 앉았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웠다.
어린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공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손잡이가 있었다.
수화물 보관소엔 여행 가방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 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그래. 내 생각엔 우리가 만난 사건은 이미 결정된 운명적인 관계였어. 놀라운 운명적 만남을 숭배하고 싶어 하는 속내와는 달리, 쉼보르스카가 생각한 것처럼, 우린 사실 어느 회전문이나 잘못 걸린 전화 속에서 미리 만났었던 거야. 내가 널 발견하고, 우리의 역사라는 책이 열렸을 땐, 그토록 오래 우릴 외면했던 우연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이미 운명의 중간 부분이 펼쳐졌던 거야.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파리에서 잠시 귀국해 혹시나 닿을까 하고 너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기억 속에 까맣게 사라졌던 한 사람을 슬로모션으로 떠올리는 너의 동작을 전화기 너머로 읽었었어. 하긴, 휴대폰도 이메일도 없던 시대에 서로의 갈 길로 헤어졌었으니 그 재회도 의외이긴 했을 거야. 그때 넌, 며칠 전에 헤어진 사람처럼 널 대하는 나에게 놀라는 눈치였어. 난 20여 년 전 널 처음 봤을 때부터, 하나도 변한 게 없으니까…… 라고 속으로 속삭였어. 그리고 잠시 후 또 다른 재회를 기약하며 전화를 끊을 때 네가 남긴 마지막 끈, 그 아리아드네의 실은 바로 커피진주라는 암호였어. 그래, 참 잘 어울려, 라고 생각했었어. 길 한가운데에서 널 마주쳤을 때, 방금 쿠바에서 날아온 생기발랄한 커피빛 보석의 현현으로 느꼈었으니까. 그 신비로운 첫 만남 이후로 마음의 영토를 조금씩 빼앗겨 너를 섬기지 않고는 어떤 경작물도 얻어낼 수 없는 조건부 불모지로 변해온 세월이었고, 너에 한해서는,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이라는 시구를 정언명령처럼 섬기고 살며 널 향한 실타래를 놓지 않았었어. 그렇게 다시 펼쳐진 우리의 책 위로 이런 날도 기록되어 있어. 언제가 내가 죽고 싶어 힘겨워할 때 너에게 전화를 했고, 넌 ‘걱정 마. 내가 너의 무덤 속 옆자리에 같이 누워줄게’라고 답해 준 날, 그날도 새로운 세계로 다시 태어난 날의 아침 빛을 보았어.

 자, 또 어떤 얘길 물었더라? 내가 카메라를 사랑하게 된 이유도 물었지? 삶은 본원적으로 슬픈 거라고 생각해. 왜냐면, 삶은 유한하잖아. 결국 우린 모든 걸 잃게 되어 있어. 아, 그 생각에 또 슬퍼지네…… 난 슬픔 가득한 이 생애의 어떤 순간, 포착해 주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 버리는 모든 것들, 아무도 껴안아주지 않아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잔해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 그 인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더 뚜렷해졌어. 누려야 할 만큼 누리지 못한 채, 그저 의무적으로 소모되며 잊히는 삶, 그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기쁨, 고통, 희망, 절망, 분노, 용서들을 부여잡고, 움켜쥐고 싶어. 그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이 있어. 그렇게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 순간 너는 내가 꾸는 꿈인지도 모르겠다. 난 늘 널 납치해서 꿈의 10단계로 인셉션하고, 둘만의 림보에 정착한 후, 그 세계에서 영원히 늙지 않고 동지로 사는 꿈을 꿔. 동시에 난, 그 꿈이 염사되는 렌즈 한 켠의 미궁 속에서, 커피진주라는 내 아리아드네의 끈을 놓치지 않고, 긴 세월 꿈과 현실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 ‘사이’의 비밀을 찾고 있는지 몰라.

 자, 이제 너에게 제안할 게 있어. 들어봐. 며칠 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고 관객들과 대화를 나눴어. 그 영화엔, 서로 이름도 모른 채 우연히 마주쳐 격한 정사를 나눈 두 남녀가 낯선 사랑을 향유하는 텅 빈 아파트가 나와. 누군가 그 공간이 무슨 의미냐고 묻더라. 난 억압으로부터의 일탈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단 역행을 꿈꾸는 회귀의 공간이라고 대답했어. 격식을 벗은 사랑과 소통의 격랑이 펼쳐지는 둘만의 공간. 그래, 그런 곳을 얼마나 오랫동안 꿈꾸어 왔단 말이니. 이제 그들처럼 우리도 이 시공간을 둘만의 아지트로 삼자. 그곳처럼 성별, 나이, 어떤 차이도 상관없고, 가족이나 학교, 교회에서 가르치는 어떤 질서도 비웃으며, 영화 도입에 나온 프랜시스 베이컨의 초상화처럼 서로의 겉모습과 형태의 의미가 사라진, 인간에게 부여된 원초적인 순수만으로 서로를 마주하자. 거리낄 것도, 부끄러움도 없이, 변덕스런 가학과 수치스런 피학마저도, 『인간의 대지』에서 베두인 족이 생텍쥐베리를 향해 돌리는 고갯짓의 의미가 되어버리는 이 공간. 여기서 우리는 언제나 풀샷으로만 만나왔던 과거를 뛰어넘어, 드디어 클로즈업 상태로 현재를 만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의 파편들이 아닐까. 항상 그런 식이었지 않았을까.”                           「홀로그램 장미의 파편들」, 윌리엄 깁슨.

 
   

 넌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20년 전 언젠가 한가로운 봄 햇살 아래, 잔디밭에 누워 뒹굴며 한 약속을 지킬 때가 된 거 같아. 그날은 무료함을 달래려고, 지나가는 사람들 중 상대가 맘에 드는 사람이 찍으면 뛰어가서 데려오자고 낄낄대며 실없는 장난을 치고 있었어. 그러다 대뜸 ‘우리 고전을 읽고 얘기하는 거 어때?’ 라는 얘기가 튀어나왔어. ‘그래?’ ‘좋아! 그럼, 우선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부터 읽자’라며 순식간에 의기투합했어. 뭔가 굉장한 보물지도를 발견해 낸 것처럼 흥분한 우리 둘은, 그 약속을 기념하는 의미로 음악감상실을 찾아 구석에 함께 기대 누웠어. 그때,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주제곡인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만 절정 부분에서 뛰쳐나오고 말았어. 왜냐면, 갑자기 내가 부정맥과 현기증을 호소했거든. 너랑 함께 떠날 미지의 여행에 대한 상상이 그 아름다운 클라리넷 소리와 뒤섞이며 내 모든 혈관들을 터뜨릴 듯 부풀려 버렸던 거야. 정신이 혼미해져 강렬한 햇빛에 넋을 잃은 날 보고 깔깔댔던 네 얼굴이 기억나. 어찌된 일인지 우린 그 바람에 약속 날을 제대로 잡지 못했어. 그러고는 20년이 흘렀고, 오늘 이렇게 그동안 얼어붙어 있던 약속이 되살아난 거야. 그래, 우린 이미 20년 전에 서로 고매성의 협약을 맺었던 거야. 그래, 난, 한번도 그 약속을 잊은 적이 없어. 나는 너의 파편이었니까.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까.

 자, 내가 처음으로 들려주고 싶은 책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야. 그 단어만으로도 너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이 되지? 투르게네프가 42세 되던 해. 그러니까, 나와 같은 나이네? 하하하. 이 소설엔 청년 시절 얌전하고 유약한 몽상가면서 시를 좋아했던 자기 모습을 주인공 '블라디미르'로 분장해 쓴 나름 귀여운 작품이야. 뭔가 나랑 많이 겹치지 않니? 그 소설 속엔 너랑 겹치는 인물도 있단다. 후후후.

 얘기가 길어졌지만 첨이니까 용서해 줘. 마지막으로, 파리의 오래된 소극장에서 봤던 영화인데, 장 뤽 고다르의 SF 영화 「알파빌」의 매혹적인 여배우 안나 카리나의 대화를 들려줄게.

   
  Do you have light?
불 있어요?
Yes, I travelled 9000kms to give it to you.
그럼요. 이걸 주려고 9천 킬로를 날아온걸요.
 
   

 그 무엇보다도 우아한 너의 질문에 그 대사를 이렇게 바꿔볼래. 이 순간, 우리의 대화는 고전이 될지도 몰라.

   
  Do you have a book?
책 있니?
Yes, I travelled 9000days to give it to you.
그럼, 이걸 주려고 20년을 날아온걸.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y 2011-02-09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멋진이들!기대할게요.정말 두분의 글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