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눈다는 것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드디어 네 글을 보고 말았어. 한 마리 새가 날아가면서 그 청아한 목소리로 온 산을 흔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네 글을 읽으니까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서 어떤 날들이 떠오르는구나. 학교를 졸업하고 한번도 기억해 보지 않았던 대화 같은 거 말이야. 내 기억이 맞다면 우린 언젠가 데미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어. 우리는 부화되는 새가 알을 깨뜨리는 것과도 같이 뭔가를 깨뜨려 나가는 것이 삶의 과정이란 건 아무래도 맞는 말인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어. 그날도 눈부신 봄날이었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앞에 뭐가 기다릴까 갑자기 숙연해졌고 둘 다 마치 빛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는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딴청을 부렸었으니까. 그때 그렇게 눈부신 빛이 없었더라면 또 어디에 우리의 떨리는 마음을 투영할 수 있었을까? 난 그때 벌써 다가올 일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을 느꼈어. 이상하지 않니? 어떻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을까? 깨뜨려야 하는 이 세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짝이란 걸 느꼈던 걸까? 사랑하는 많은 것들까지도 깨뜨리고 나가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을까? 난 수많은 상처와 생채기들이 벚꽃 잎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걸 본 기분이었어.

 네 글은 수많은 것들을 상기시키면서 이상하게도 내 앞에 수많은 풀과 나무와 구름을 끌고 오는 것 같아. 너는 그 사이로 풀피리를 불고 춤추며 씨 뿌리면서 오는 거니? 헨젤과 그레텔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돌멩이를 뿌렸지만 넌 어디로 돌아가기 위해 씨를 뿌리는 거니? 아, 그래! 넌 순수한 영원 회귀의 공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피리를 불고 씨를 뿌리는구나. 그 순수한 공간에도 달 뜨고 꽃 피고 이파리 달리고 한 줄기 빛이 떨어지겠지. 그 그늘 아래 쉬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발을 뻗고 기대고 어디선가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 주는 걸 느끼며 고개를 들어 저 먼 아득한 곳을 봤으면 좋겠다. 나는 작은 새가 이슬을 쪼아 먹는 걸 본 적이 있어. 배가 파란 새였어. 지금 내 가슴은 이슬을 쪼는 작은 새, 아니 이슬 속에 잠긴 작은 새의 부리 같아. 심장 소리가 퐁당퐁당 소리로 들려 .

 그리고 쉼보르스카의 시를 상기시켜 줘서 고마워. 그 시는 실은 내가 나의 런던 여행기에 한 번 인용했었어. 트라팔가 광장에서 사람들을 볼 때 그 시가 생각났던 건, 아이스크림을 먹고 전화를 걸고 풍선을 쫓아가는 무심한 동작 속에서도 어떤 간절함을 봤기 때문일 거야. 누군가의 인생에 뛰어들어 가고 싶다는 간절함이겠지. 그렇게 보니 광장의 평범한 계단도 누군가에게는 운명의 제단 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어. 네가 말했던 것처럼, 혹은 그 옛날 보르헤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혹은 사람들은 서로서로의 파편, 서로서로의 분신이겠지.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선을 그어본다면 수많은 삼각형, 수많은 마름모꼴, 수많은 다이아몬드, 수많은 별자리가 그려질 거야. 그 선들이 저마다의 운명의 선일까? 우리는 수많은 중력과 수많은 만유인력을 볼 거야. 수많은 반쪽짜리 사과와 달을 볼 거야. 우리는 또 그 봄의 눈부신 햇살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눈을 뜨고 짐짓 의연한 척 왼팔 오른팔을 흔들며 그 형형색색의 도형들 속을 걸어 나가겠지.

 그렇지만 이십여 년의 세월을 뚫고 네가 쓴 글 중 다른 날이 아닌 오늘, 무엇보다도 내 맘을 사로잡는 건, 너의 이런 표현이야.

   
  난 슬픔 가득한 이 생애의 어떤 순간, 포착해 주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 버리는 모든 것들, 아무도 껴안아주지 않아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잔해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 그 인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더 뚜렷해졌어. 누려야 할 만큼 누리지 못한 채, 그저 의무적으로 소모되며 잊히는 삶, 그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기쁨, 고통, 희망, 절망, 분 노, 용서를 부여잡고, 움켜쥐고 싶어. 그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이 있어.  
   

 네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라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뻐. 네가 너라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하지만 오늘은 슬프게도 거기서 하나의 질문이 나와. 너도 뉴스 들었지? 영화 시나리오를 쓰다가 굶어 죽음에 이른 최고은이란 사람 말이야. 난 방송사에서 우리 쌀로 만든 정성 가득한 도시락을 피디들과 나눠 먹다가 그 이야길 들었어. 그녀는 누구였을까? 나는 그녀가 잠들듯이 스르르 죽어버린 순간을 생각해 봐. 그녀는 눈을 감으면서 내일 아침에 눈뜨면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서 시나리오를 써야지, 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다신 눈을 뜨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언젠가 세상이 내 노력과 ‘작은 기쁨, 고통, 희망, 절망, 분노, 용서’를 알게 될 날이 있겠지, 라고 생각했을까? 난 지금 많은 질문을 던져보지만 이 이야긴 미스터리가 아니야. 명백한 현실이야. 영화계와 우리 사회의 모순이 한 연약한 육체에 쏟아져 내렸어. 그녀는 왜 그렇게 약해졌던 걸까? 그녀의 여윈 마지막 모습에도 꿈이란 게 남아 있었을까?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 “난 산 채로 죽었어요!” 너에게도 묻고 싶어. 이 모든 이야기들이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만들까?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눈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아마도 무척 슬픈 일이겠지.

 난 슬프고 답답한 와중에도 인어 공주 이야기가 잠시 생각났어. 알다시피 인어 공주는 소중한 것을 바치고 인간 세계로 들어오긴 했지만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 그래서 그녀는 인간 세계에 남 지 못해. 아침이 되자 그녀는 두둥실 떠올라. 그렇게 인간 세계와 왕자를 돌아본 인어 공주의 마지막 소원은 뭐였을까?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공기의 딸들에게로…….” 천상의 존재들이 대답했다.
“인어 공주에게는 영혼이 없고 인간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한 영혼을 얻을 수도 없지요. 공주의 영원한 존재는 또 다른 힘에 달려 있어요. 공기의 딸들도 마찬가지로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선행을 통해서 영혼으로 얻을 수 있답니다. 가여운 인어 공주, 그대도 온 마음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세요. 선행을 통해 영혼의 세계로 당신을 끌어올리면 300년 후에는 불멸의 영혼을 얻을 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인어 공주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찼는데 그 눈에 왕자와 그의 신부가 인어 공주를 찾는 모습이 들어와. 그들은 애절한 시선으로 망망대해 진줏빛 물거품을 바라보았지. 그래서 인어공주는 이렇게 행동했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어 공주는 신부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고 왕자에게는 바람을 보낸 다음, 대기 중에 떠 있던 장밋빛 구름 속으로 공기의 아이들과 함께 올라갔다. 300년 후에 우리는 천국으로 떠오를 것이다!  
   

 아! 자신의 두 다리로 굳게 서 있던 인간들은 영혼에 대해 이제 잊어버린 걸까? 인간이 선행을 베풀면 인어 공주는 영혼을 갖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인어 공주는 300년에서 더 오래오래 기다려야 해. 불쌍한 인어 공주들은 영원한 영혼을 갖길 꿈꾸며 우리 곁에 있겠지. 그래도 공주의 영원한 존재는 또 다른 힘에 달려 있다는 말이 나에게 용기를 줘. 나는 그녀의 탄생과 육체와 꿈과 육체와 존재의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그 인간 세계에 사는 한 인간으로 다시 네 글을 읽을 수밖에 없어. 네 글은 타인의 영혼에 대한 글이기 때문이야.

 ‘난 슬픔 가득한 이 생애의 어떤 순간, 포착해 주지 않으면 스쳐 지나가 버리는 모든 것들, 아무도 껴안아주지 않아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잔해에 대해 남다른 애정이 있어. 그 인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더 뚜렷해졌어. 누려야 할 만큼 누리지 못한 채, 그저 의무적으로 소모되며 잊히는 삶, 그 속에 숨어 있는 작은 기쁨, 고통, 희망, 절망, 분노, 용서를 부여잡고, 움켜쥐고 싶어. 그 처연한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누고 싶은 절박한 꿈이 있어.’

 나의 오랜 친구는 이런 생각을 품고 내게 제안을 하는구나. 우리 순수하자고. 우리 그렇게 하자. 꼭 그렇게 하자. 구원의 동작을 함께 나누자. 영혼을 걸고 그렇게 하자. 난 이제 다시 앙드레 지드 의 『좁은 문』을 생각할 수밖에 없어. 『좁은 문』의 주인공 알리샤와 제롬의 사랑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니? 오늘 내 맘을 사로잡은 알리샤의 기도는 이런 거야.

   
  주여, 제롬과 제가 함께 서로 의지하며 당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여 주옵소서.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형제여, 힘들면 내게 기대게.”라고 하면 “자네를 내 곁에 서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네.”라고 답하는 두 순례자처럼 인생의 길을 따라 걷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아니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길은 좁은 길이옵니다. 둘이서 나란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좁은 길이옵니다.  
   

  동쪽별. 좁은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좁은 거라고 너도 생각하는 건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알리샤는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아. 자신을 향한 제롬의 사랑을 더 필요한 곳, 더 긴요한 곳으로 돌릴 수 있도록 그녀는 이제 자신의 사랑을 희생하면서 이런 기도를 올려. 하지만 난 아무리 좁은 길이어도 형제가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을 만큼은, 딱 그만큼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싶은데 어떡하지? 난 오늘 최고은 씨의 좁은 문을 생각해. 이제라도 그녀의 좁았던 문을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넓힐 수는 없나 생각해. 그렇게 하면 그녀의 영혼이 천상의 나라에서 함께 기뻐하지 않을까?

  이제 나도 너의 편지에 답을 하느라 『좁은 문』 이야기는 다음 주로 넘길 수밖에 없어. 그런데 『좁은 문』의 제롬도 너랑 좀 닮았어. 좀 어리숙하단다. 하지만 뒤늦게 깨달은 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단다. 수십 년째 반가워. 동쪽별.

  아! 그리고 네가 모르는 게 하나 있어. 그 모차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말이야. 난 그날 너랑 헤어지고 하숙집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끝까지 다 들었어. 사파리와 대지와 하나가 되는 영혼들을 생각하면서. 나는 아직도 봄밤이면 창문을 열고 해마다 빼놓지 않고 클라리넷 협주곡을 듣는단다. 그런 밤에 하늘은 어찌나 독한 풀냄새를 풍기는지 난 구름들이 다 하늘의 땀구멍으로 느껴지고 그 향기에 취하지 않을 수 없어. 『좁은 문』에 이런 구절이 나와. ‘올바르게 태어난 영혼은 곧잘 감탄과 감사를 혼동한다.’ 우린 올바른 영혼을 보면서도 감탄과 감사를 혼동하게 되곤 하지. 오늘 너에게 무한정 감탄하면서 네가 존재하는 것 그 자체에 감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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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문> 

   앙드레 지드 / 이혜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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