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고백, 그 후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난 그만 감기에 걸렸어. 봄을 너무 기다렸나 봐. 좀 따뜻해지자마자 최대한 간단하게 입고 즐겁게 뛰어나갔다가 병들어서 돌아왔네.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 그런데 흥분해서 뛰어나갔다가 병들어 돌아온 게 꼭 첫사랑의 운명이랑 닮지 않았니? 첫눈에 반한다는 걸 믿느냐고? 물론 믿어. 절대적으로. 그리고 넌 내가 믿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 왜냐하면 난 늘 좋은 소식을 기다려왔으니까.

 사실 난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읽으면서 지나이다와 그 아버지가 에로틱한 관계까지 갔을까? 너무나 궁금했었고 그 장면을 초조하게 찾았던 기억이 나. 지나이다 앞에 있을 때 아버지의 이미지는 가정에서 아버지의 모습으로 있을 땐 결코 보인 적 없는 ‘우뚝 서 있는 동물’ 같았거든. 강력하고 매혹적인 미혼의 소녀, 그리고 완숙기에 접어든 기혼 남성의 사랑. 그 둘의 사랑에는 어딘지 위험하고 절박한 데가 있을 게 틀림없지. 너는 혹시 그 옛날에 밤의 하숙집을 몰래 빠져나가 스무 살쯤 연상의 여인을 사랑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해. 그렇다면 지나이다와 아버지의 고뇌를 단숨에 이해할거야. 이런 사랑에서는 사랑의 자격, 조건, 이해관계, 뻔한 계산 이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버리고 마니 난 너무 통쾌해. 그리고 고뇌 없는 행복한 사랑이 차라리 가장 불행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야. ‘이 사랑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나?’ 혹은 ‘무엇을 위해 사랑을 대가로 바쳤나?’ 난 이런 질문들이 좋아. 사랑이 자기 판단의 준거인 경우가 좋아.

 첫사랑에 관한 모든 소설들이 그렇게 우리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사랑 이후가 나와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렇게 뜨거웠던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나 원하는 것이 있어. 그것도 바로 눈앞에. 그런데 그걸 얻지는 못해. 그런 일이 일어난 뒤에 우리들은 어떻게 살게 될까? 그 얻지 못한 사랑에 끝까지 충실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아! 모든 위대했던 감정들, 감각들은 얼마나 사소해졌던가? 그런데 그렇게 사소해져 있는 우리 뒤에 있는 첫사랑의 광채는 또 얼마나 찬란하던가? 생활이 비참할수록 첫사랑의 광채는 기억 속에서 마치 환각인 것처럼, 꿈인 것처럼 나날이 찬란하게 빛나지.

 첫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의 시간들일지도 몰라. 첫사랑을 경험하는 자는 반드시 뭐든 귀한 것을 잃게 돼. 사랑의 경험은 상실의 경험이고 그 상실에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까지 포함돼.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잃더라도 타인을 받아들이려 또 타인 속으로 들어가려 했던 그 경험만큼 내가 용기 있었던 적이 또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난 첫사랑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덕목들은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에서 배운 것도 같아. 『좁은 문』의 주인공 제롬과 알리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야. 그 둘의 사랑이 어떤가 하면 각자 편지로 이렇게 말하고 있어. 나중엔 둘 중에 누가 한 말인지도 구별하기 힘들 지경이야. ‘너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나는 무엇일까? 어떻게 될까?’ ‘네가 내 곁에 있어야만 나는 진정한 나일 수 있고 그 이상일 수 있어.’ ‘그는 나 자신에게 나를 드러내준다.’ ‘그 없이 내가 존재할 것인가?’ ‘그와 함께 함으로써 비로소 내가 있다.’ ‘그 없이 겪어야하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내게 기쁨이 되지 못한다.’

 제롬과 알리사의 이런 고백은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두고 하는 말 “ 나는 너야”와 함께 내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어. 나는 이런 고백들을 숭배하며 맘속에 내 뜨거운 사랑의 원형 같은 것을 만들어 왔다고도 할 수 있어. 그런데 알리사가 제롬에게 한 말 중 내가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진전(발전)이 없는 상태를 소망할 수는 없다”야.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선 이런 말을 해.

   
  발전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없다면 내게 삶이란 더 이상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소설 좁은 문에서 알리사의 입을 통해 “제 아무리 행복한 것일지라도 발전이 없는 상태란 나로선 바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발전이 없는 기쁨이라면 경멸할 것입니다.”라고 한 말은 바로 내 마음의 표현이다.  
   

 내게 사랑의 맹세는 앙드레 지드의 이 말과도 비슷할 거야. 내게 사랑의 맹세는 순간의 황홀한 경험이 아니야.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겠다는 의지적 선언 같은 거야. 그래서 난 사랑은 형용사의 나열이 아니라 사랑의 고백 이후, 사랑의 약속 이후, 두 사람이 어떤 진리를 함께 생산해 내느냐의 문제라고 봐. 모든 끈질기고 진실한 사랑은 고뇌와 함께 분명히 희망을 담고 있어.

 그런데 『좁은 문』의 알리사는 왜 그 사랑의 길을 제롬과 함께 걷지 않고 홀로 좁은 문으로 들어 가려했을까? 우선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알리사의 행복관인 것 같아. 알리사는 여동생 쥘리에트(사실 제롬을 사랑했으나 언니를 위해서인지 재빨리 맘에도 없는 남자와 결혼해. 난 이런 행동이 짜증나. 이거야말로 선량함을 가장한 복수 아니니? 악이 되어버리는 선 아니니?)의 결혼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해.

   
  ‘어쩌면 이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 너무나도 실용적이고 너무 쉽게 얻어진 것 같고 또 마치 자로 잰 듯이 완벽하다고 느껴져서 영혼을 옥죄어 질식시키는 것처럼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행복으로 가는 도정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오! 주여 너무 쉽게 다다를 수 있는 행복으로부터 저를 지켜주소서! 당신 곁에 이를 때까지 저의 행복을 미루고 멀리 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옵소서’  
   

  넌 이런 행복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이런 행복관에는 숭고한 면이 있어. 그러나 난 아무리 생각해도 알리사가 미덕과 행복을 착각한 것이라고 밖엔 보이지 않는데다가 그리고 솔직히 이런 행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사랑하는 남자를 떼어 놓는 게 무슨 상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어. 사랑이 자신의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녀는 쉽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일 지경이야.(사실 행복은 각자가 외롭게 추구해야할 어떤 목적이 아니야. 그녀는 자기 입으로도 행복은 과정, 도정이라고 해놓고선 사실상 그걸 부정해. 우린 어떻게 좁은 문을 함께 통과할 수 있을까? 알리사는 왜 그 고민을 지상에선 풀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쉽게 얻은 행복을 마뜩찮아 하는 그녀의 시선은 존중해. 그녀는 좀처럼 타협이라곤 하지 않았으니까. 언젠가 행복에 대해서도 우리 이야기해보지 않을래? 나는 지금 알리사의 눈빛이 소설이 진행됨에 따라 변해가는 것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어. 그리고 그 때문인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가던 너의 눈빛이 겹쳐서 떠올라. ‘우는 자는 행복하다’는 말을 이해하는 데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한 걸까?

  그런데 「만추」에서 탕 웨이의 연기가 그렇게 빛났니? 궁금하다. 난 어제 네루다의 시낭송을 들었는데 너무 너무 좋았어. 큰 바위에 큰 파도가 부딪히는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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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좁은 문> 

   앙드레 지드 / 이혜원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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