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동쪽별! 첫눈은 봤니? 난 일요일 밤에 인천의 영안실에 가는 길에 첫눈을 봤어. 영안실 가는 길에 보는 첫눈의 느낌은 어떤 절실함의 감각을 불러일으켰어. 가로수 나뭇가지들은 모두 창백했고 눈은 내 쪽으로 사정없이 쉴 새 없이 날아왔어. 가로등의 노란색은 접시같이 큰 눈으로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했어. 저 깃털같이 날아가는 눈이 어쩐지 우리 삶을 말해 주는 것 같지 않니? 사라지는 삶, 사라지면서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삶. 그런데 눈들은 마치 꼭 있어야 할 곳을 찾아가는 사람같이 급히 날아가지 않니? 아직 사라지기 전의 모습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고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더 황급히 가버리는 것 같지 않니? 그러니 저 눈은 사람의 속마음을 꼭 닮지 않았니?
나와 동행한 후배는 숲 해설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어. 나는 그에게 물어봤어.
“저렇게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를 보고도 그 이름을 알 수 있어?”
“네, 선배 알 수 있지요. 나무껍질과 그리고 순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나는 눈 속에서 마치 자작나무처럼 희끄무레하게만 보이는 나무들을 유심히 바라봤어. 찬미할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한 나무들은 일순간 하얀 노인들처럼 보였어. 나는 나무순과 나무껍질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고 속으로 생각했어. 입에 성에가 끼는 기분이 들었던 건 내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것이 뭉클하게 올라와서였을까?
그날 돌아와서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마저 쓰려고 끙끙댔어. 어쩐지 하얀 기사의 시가 계속 생각이 났어.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해. 잠시 무릎에 너의 따뜻한 손을 올려놓고 들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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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기사의 노래
그대에게 모든 걸 다 말하겠어요.
말할 게 거의 없지만요.
문 위에 앉아 있던,
늙다리 남자를 만났지요.
“누구신가요, 어르신?” 내가 물었지요.
“어떻게 사시나요?”
그러자 그의 대답이 내 머릿속을 졸졸 흘렀네.
체 사이로 물이 빠져나가듯이.
그는 말했네. “나는 나비를 찾고 있었지.
밀밭에서 잠자는 나비를.
나는 나비를 양고기 파이로 만들어
거리에서 판다네,
거친 바다로 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나는 밥을 벌어먹는다네.
조금 들어보겠나.”
하지만 나는 수염을 녹색으로
물들일 생각을 하고 있었지.
그리고 항상 커다란 부채를 쓰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겠지.
그래서 노인이 한 말에
대답할 거리가 없어서
나는 외쳤지. “여보세요, 어떻게 사시는지 말씀해 달라니까요!”
그리고 노인의 머리를 탁 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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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시 속의 어떤 사람은 한 노인을 만나서는 누구냐고 물어보고는 속으로는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어. 노인의 말이 머릿속에 남아 있을 턱이 없으니까 그는 도리어 버럭 소리 지르는 거지. “여보세요, 어떻게 사시는지 말씀해 달라니까요!” 그럼 노인은 또 자기 이야기를 계속해. 길을 가다가 시냇물을 만나면 나무껍질에 하얀 표적을 새긴다고도 하고 대구의 눈을 사냥해서 조끼 단추로 만든다고도 하지. 하지만 노인의 말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은 그가 딴생각을 마친 후의 일이야. 그런데 이 시는 그렇게 무심하게 끝나지만은 않아. 먼 훗날 갑자기 노인이 생각이 나는 거야. 그게 언제일까? 바로 이럴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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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내 손가락에 풀이 묻거나,
오른쪽 발을 미친 듯이
왼쪽 신발에 구겨 넣는다면,
혹은 발등에 아주 무거운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한다면
나는 울어버릴 거야. 그러면 꼭
예전에 알았던 그 노인이 생각나거든.
겉모습은 상냥하고 목소리는 느릿느릿하고
머리카락은 눈보다 더 희고,
얼굴은 까마귀를 닮은,
(……)
오래전 여름날 저녁,
문 위에 앉아 있던 그 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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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느낌이 들어? 후회와 좀 늦게 찾아온 양심의 회복을 말하는 걸까? 그래서 구슬픈 느낌이 드는 걸까? 여름날 저녁에 문 위에 앉아 있던 노인은 아마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엔 없겠지? 사실은 우린 이미 다 알고 있어. 지금 흰머리의 노인들을 우리가 최고로 사랑하고 있진 않지만 그러나 먼 훗날은 사랑하게 되리라는 걸. 그것은 어린 시절 마당에 심겨 있던 느티나무를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언젠가 엉뚱한 실수를 한 뒤 무안함 속에 고개를 들 때, 뭔가를 애도하고 있을 때, 잘못 신은 신발을 갈아 신듯 엉킨 실타래를 풀고 바로잡고 싶을 때,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우리 귀에 흘러들어 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몰라. 약간의 회한, 약간의 우수, 약간의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 속에 어렵사리 우리는 뭔가 배우게 되겠지. 상실 속에서 뭔가 배우게 되듯이. 물론 이 모든 일들은 웬만큼 인생의 맛을 본 다음에야 일어날 일일 거야. 왜냐하면 삶이 매끄럽지 않다는 걸 알아야 맘 속 깊은 곳에서 비밀스러운 화해를 원하니까.
모험을 하느라 온갖 기이한 일을 겪은 우리의 앨리스는 이 시를 듣던 날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해. 마치 어제 일처럼, 그 기억 속에서 하얀 기사의 두 눈은 부드럽고 푸르고, 저물녘 햇빛은 기사의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고. 기사의 말은 목에 고삐를 건 채 조용히 이리저리 걷고. 그들 뒤로 앨리스는 숲 그늘을 바라보고 있었어. 우리의 순수한 어린아이는 아직은 삶이 이유 없다는 걸 모르니까 이 장면에서 어떤 결핍도 못 느껴. 그래서 앨리스는 “노래를 불러줘서 정말 감사해요!” 하고 씩씩하게 외친 다음 기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수건을 흔들고 시냇물을 폴짝 뛰어넘어 여덟 번째 칸으로 달려가. 여왕이 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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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나라의 앨리스 - 펭귄 클래식 72>
루이스 캐럴 지음, 존 테니얼 그림, 이소연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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