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에 대하여 -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문형배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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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의에대하여 #문형배 #에세이 #헌법재판소

호의

[명사] 친절한 마음씨. 또는 좋게 생각하여 주는 마음

누군가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혹은 그러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위를 우리는 '호의'라고 부른다. 양보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은 자신을 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상대의 성공이나 이익으로 반드시 연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해가 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엄마, 아빠의 잔소리도 넓게 보자면 호의지만 그 호의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지 않은가. 사실 이 호의라는 것이 애매한 것이, 권장되는 미덕이지만, 일회성 호의와 지속적 호의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진다. 이를테면 일회성 호의는 종종 선심성 행위나 마지못한 면피성 행위로 호도되기도 하고 처음에는 호의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그렇지 않은 것들은 그 시작과 정체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착하면 호구된다'는 말은 이제 너무 공공연하게 퍼져있어서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착함, 친절과 같은 미덕은 언제나 공격받으며 행하는 사람들은 마치 약자로 전락하고 만다는 일종의 공포같은 게 퍼져있는 거 같다. 지난 12월 착하게 살아왔던 국민들을 호구로 본 내란 세력이 계엄 선포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국민들은 스스로 호구가 아님을, 그리고 약하지 않음을 온몸으로 보여줬다. 그리고 4월,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은 기어이 탄핵되었다. 그 탄핵의 가운데 문형배 전 재판관이 있었다. <호의에 대하여>라는 그의 에세이가 나온다는 소식에 지지 구매를 했다.

"아름다운 사람이 너무 많다. 절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희망과 절망을 오가며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

그 보통의 삶을 관찰하고 성찰한 기록

표지 제목 아래에 이와 같은 카피 문구가 쓰여있다. 내용과는 좀 거리가 있는 거 같지만, 그렇다고 아주 아닌 건 아니어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다.

이 책은 문형배 재판관의 일상과 생각이 담겨있는 <일상은 소중하다>와 읽은 책의 내용과 생각을 기록한 <일독을 권한다>, 그리고 법 집행에 있어 어떤 부분이 보완되면 좋을지 제안하는 <사회에 바란다> 이렇게 3부로 구성되어있다.

그는 첫번 째 장에서부터 이렇게 말한다.

"과연 착한 사람에게 법은 필요 없는 것일까?" 그러면서 그는 "착한 사람일수록 법을 알아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법관의 역할은 약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아니다. 법이 정한 바대로 적용하는 것, 그것이 법관의 역할이다. 여기에 정의와 도덕은 개입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착한 사람일 수록, 양한 자일 수록 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재판은 예방을 위한 게 아니다. 결과에 대해 판단하고 공권력으로 심판하는 것이다. 법은 권력자들이 만들고 그들이 사용자가 되므로 법의 심판을 받더라도 피해가거나 양형이 낮아질 수 있다. 법은 권력자를 위해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은 대개 법 앞에서 초라해진다. 그러니 미리 알고 그런 상황이 되지 않도록 하거나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야한다는 게 문형배 재판관의 생각인 거 같다.

"과연 아침 네 개, 저녁 세 개가 아침 세 개 저녁 네 개와 같을까? 대부분의 분쟁은 저녁이 아니라 아침에 네 개를 차지하겠다는 데서 생기는 것은 아닐까?" (80쪽)

"우리 사회의 개혁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개혁을 반대해 서라기보다는 과도기의 손실을 누가 감수할 것인가에 대 한 합의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83쪽)

"결론적으로 역사의 진보를 믿는 자가 이를 감수해야 한다 고 본다.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는 것은, 변화해야 하며 그 변화가 내일은 될 거라고 믿는 사람이므로 오늘 당장 보상받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84쪽

문형배 재판관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의 보상이 없음을 '감수'할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질 뿐이다. 이때엔 더 고차원의 보상이 필요한거다. 될 거라는 믿음, 나의 감수가 헛되이 되지 않을 거라는 신념 같은 것들 말이다.

"같이 간 아이들 중에는 어릴 적 청력을 잃었다가 원장님의 노력으로 3년 전에 인공와우 수술을 두 차례 받고 언어 치료를 하는 이가 있었다. 아직 말이 아주 서툴렀다. 어릴 때 말을 들을 수 없어서 지금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 였다. 아! 대화란 듣는 게 먼저이고 말하는 게 뒤구나. 나는 말을 먼저 하고 남의 말은 나중에 듣는데···" (95쪽)

"일상의 대화에서 소통이 잘되려면 상대방의 입장에 공감을 먼저 표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을 말하는 게 바람직하다. 상대방의 잘못만 부각하는 방법은 효과적이지 못한 것 같다. 즉 "Yes, But"이 "Yes, Not, Because" 보다 낫다." (123쪽)

"과거의 일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사람들이 기억할 때 그것은 역사가 된다." (129쪽)

"세상에 돌려주는 게 마땅할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두려 운 것은 소멸이 아니라 의미 없는 소멸이 아닐까?(안상헌,

(생산적인 삶을 위한 자기발전 노트 50》)" (131쪽)

일상 日常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

일상은 소중하다. 재판이 일상인 사람도 있겠지만(문형배 재판관과 같이) 대체로 재판은 많은 사람들의 일상을 망가뜨린다. 일상은 늘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해가 뜨면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학교에 가야할 사람은 학교로, 일터로 가야하는 사람은 일터로 가고, 집에 돌아와서는 씻고 TV를 보다가 노곤한 몸을 뉘여 편안한 잠을 청하는 것이다. 심심하고 재미없을지라도 그것은 절대적이고 부서져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폄하하지만 그것이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일상의 미세한 반짝임은 모르지만 그렇다고 일상이 주는 안정감과 힘까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12월부터 4월까지 부단히 광장으로 나갔던 것이다.

재판의 본질은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죄추정주의도 있는 것이고. 하지만 재판은 끝나고 나면 죄에 비해 벌이 약하다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사형을 실행한다고 해서, 양형이 무겁다고 해서 범죄율이 낮아지는 건 아니라는 연구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양형을 낮게 한다고 감화되는 것도 아닌 거 같다. 법이 법답지 않다는 것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의 목소리로 드러나지만, 그건 아마도 법관의 유착, 도덕성, 그리고 법 조항의 모호함으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문제, 적용할 수 있는 법 조항의 부재 같은 것들이 모두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미국의 양형(누적 100년을 넘어가는)을 보며 왜 저렇게 하지 못하는지 안타까워 한다.

"모스크바공국에서는 절도죄를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모스크바공국에서 절도죄를 저지른 사람은 피해자를 죽였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에 나오는 내용이다." (205쪽)

법이 너무 엄정하면 어차피 죽을 거 더 나쁜 짓을 하자는 식으로 빠질 수 있다는 사례가 존재한다. 이는 범죄 예방적 측면에서의 법 집행에 위반된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범죄는 언제나 일어나는데, 일어나는 모든 범죄가 잔혹한 강력 범죄라면 세상이 더욱 혼란하고 불안하겠다 싶다. 어떤 균형점을 찾아야한다는 소리인데 그 균형을 아직도 찾고 있는 인간이 당장 찾을 수 있을 거 같지는 않다.

"이성의 원리에 입각할 때 우리는 신이 있다고도 또 신이 없다고도 확언할 수 없으며, 이 점에서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는 피장파장이다. 그러나 '신이 있다'와 '신이 없다' 중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수지맞는가를 따져보자고 제안한다. 이것은 지극히 타산적인 계산 방법이며 파스칼은 내기의 확률론을 동원하여 '신이 있다'가 압도적으로 이롭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248쪽)

위 내용은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정리한 내용이다. 나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이 부분을 발췌해서 여기에 적어놓았다.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 할 때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다행, 아니면 허탈하고 좀 그럴테지만 손해를 볼 건 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저 사실의 확인할 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 알고보니 없다고 생각했던 신이 존재한다? 그럼 엄청난 불이익이다. 그래서 확률적으로 신을 믿는 것이 유리하다.

"남녀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의 눈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볼 만한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이 극복하면 될 것이다." (266쪽)

우리는 종종 이전 문헌(위의 내용은 루소의 <에밀>을 읽고 쓴 내용 중에서 발췌)을 볼 때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당시의 상식이 지금의 기준으로는 미달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러한 내용이 가치 없다고 할 필요까지는 없다. 왜 이렇게 이야기했고, 그래서 어떻게 바뀌었으며, 지금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면 될 일이다. '극복'이라는 단어가 좀 갸웃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시민은 절대 복종, 아니면 피신, 아니면 투옥, 아니면 유형, 아니면 총살, 이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정부만 믿고 있다가 서울에서 후퇴도 하지 못하고 역도들 치하에 있는 이상 그들에게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고 보니 조국에 대한 반역 행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89쪽)

국가의 혼란은 아무 행위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나치즘은 동조하지 않았던 모든 국민들조차 죄인으로 만들었다. 방조자로써 잔혹한 범죄를 묵인했다는 죄목으로. 우리나라도 한국전쟁 때 서울에 남아있다가 북한군에게 음식이나 옷을 제공했다고 부역자로 몰려 국군에게 처형당했던 역사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만족을 얻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욕망을 줄이는 방법과 욕망을 충족하는 기회를 늘리는 방법이다. 전자는 안정적이나 현실에 취약하다. 후자는 강하나 불안하다. 인생은 어쩌면 전자와 후자 사이를 헤매는 건지도 모른다." (297쪽)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요즘 나오는 기사를 보면 젊은 세대들이 욕망을 줄이는 방법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식으로 읽을 수 있겠다. 삼포, 오포 같은 말들이 계속 언급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욕망을 줄인다는 게 가능한가. 욕망은 포기가 되는 것인가. 욕망은 혹시 우울이나 불안, 분노 같은 것으로 변환되고 있는 게 아닐까. 충족되지 못한 욕망의 변환물들이 이 사회를, 이 세계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욕망은 허기와 같아서 늘 무언가를 원한다. 허기는 뭔가 먹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으므로 욕망은 오직 원하는 것을 갖는 것으로 채워지고, 해결될 수 있다.

"판사들이 다 가난했던 경험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김훈의 <흑산>을 읽고 나면 가난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배고픔을 면하자면 오직 먹어야 하는데 많은 끼니 중에서도 지금 당장 먹는 밥만이 배를 채운다는 내용이 그렇다. 아침에 먹은 밥이 저녁의 허기를 달래줄 수 없으며, 오늘 먹는 밥이 내일의 요기가 될 수 없음은 사농공상과 금수축생이 다 마찬가지다." (305쪽)

오늘의 밥을 박탈당한 젊은 세대들의 허기는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

"톨스토이는 헨리 조지의 토지 사유권 폐지 주장에 공감하면서 소설 곳곳에 헨리 조지의 사상을 소개한다. 예컨대 농민이 궁핍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말하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들은 땅을 가지지 못했다. 땅은 토지에 대한 특권을 이용하여 농부들의 노동으로 생활해나가는 지주들 수중에 있기 때문이었다."

예전 밈으로 초등학생에게 국회의원에게 바라는 점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더니 "출석이나 잘하세요"라고 했다는 것은 기본부터 충실하라는 말이다. 법관들의 기본은 무엇일까. 나는 "스스로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다"라고 인지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비단 법관들만 생각해야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야한다. 그리고 사건과의 별개의 문제로 심판이 잘못되었을 때, 스스로 책임을 져야하는 무거운 자리라고 생각해야한다. 법원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곳이 아니다.

오늘도 무거운 뉴스기사들을 본다. 피해자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 앞에서 살려달라고 발버둥을 치고, 가해자는 (자신을) 죽일 수 없는 사람 앞에서 (내가 한 일은 모르겠고 어찌되었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을 친다. 이 부조리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법관들은 선례를 만드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예전 재판을 참고하면서 양형을 한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달라지고 있는 세태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거 같다. 법원의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흐르는 거 같다. 하지만 뭐든 처음이 중요하다. 처음은 혼자서 모든 것과 부딪혀야 하는 부담이 있지만 동시에 처음이라서 허용되는 것들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이 처음을 마치 무기처럼 휘둘러서는 나중이 곤욕스러울 수 있지만... 아무튼) 처음에 제도가 바로 서지 못한다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들이 많음을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본다. 생각이 많아진다.

중언부언했지만... 김장하 선생의 선의가 문형배 재판관을 있게 했고 문형배 재판관의 선고가 있어 대한민국이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선의가 대한민국이 가능하게 한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감히 선의가 이 세상을 지탱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선의가 평범해질 때 세상은 가능하다. 착함의 연대로 선의 힘을 키우자.

p.s. 문형배 재판관은 나무와 독서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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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25-09-15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족과 같은 말을 덜어낼 줄 알아야하는데... 아직 멀었다...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장류진 지음 / 오리지널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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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류진 #에세이 #소설 #핀란드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은 장류진 작가님의 에세이이다. 적어도 서점에는 에세이로 분류되어있다. 15년 전 교환학생으로 다녀온 핀란드로 리유니온(친목 모임)을 떠난 작가와 친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에세이는 -에세이인데!- 재미있게도 <치유의 감자>란 제목의 짧은 소설로 시작한다. 


"핀란드 쿠오피오의 교환학생들은 대부분 렌트가 저렴한 공동주택단지에 살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처음엔 작가가 교환학생을 다녀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럴 것이지만, 어떤 의심이 들었다. 실제 경험을 소설화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정체성이 사실은 소설이라는 것을 능청스럽게 보여주는 건 아닐까, 하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필로그에는 왠지 함께 여행을 다녀온 친구에 대한 감사와 소회 같은 게 있어야할 거 같은데 -내 편견일 수 있겠지만- 작가의 또 다른 소중한 친구의 또다른 여행에서 나눈 이야기와 작가로 활동하며 있었던 이런저런 경험으로 채워져있다. 독자를 자꾸 에세이 바깥으로 던지려고 하는 거 같다는 느낌이었다. 등장하는 인물은 가명이라고 밝힌 것이나 우리라나에서 런칭을 욕심내는 브랜드를 가상으로 만든 것이나... (훗날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다음 직업으로 수입상을 꿈꾸고 있으므로 -내 아이템을 뺏길 수 없지!- 품목과 브랜드명을 바꿨다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이렇게 가정해보자 소설로써의 이 글도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세이인 듯, 에세이가 아닌 느낌의... 여행에세이를 빙자한 소설. 책 곳곳에는 현실(사실)에 입각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과 세계의 일부는 작가가 바꾼 것이다. 이것들 외에도 작가가 교묘하게 숨기거나 비틀어놓은 '진짜가 아닌 것들'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며 읽었던 내용들을 짚어나가다보니 이것이 소설일 수 있다는 생각에 근거가 될만한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나는 저 유리벽 너머 코트 안에서 빠델을 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주말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앱에 접속해 코트를 예약하겠지, 그리고 먼 저 맛있는 브런치를 먹으러 시장에 갈 거야. 유리벽 안에서 빠델을 치고 있는 어떤 사람은 헬싱키에 살고 있는 버전의 나, 다른 유니버스의 자신이다."

279~280쪽


여러 버전의 '나'를 만들어내다 보면 점점 더 나로부터는 멀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이어 이것이 자신의 소설 쓰기의 비밀이라고 밝힌다. 엄청나게 참신한 설정이나 대단한 세계관이 아니라 현실의 상황에서 아주 조금, 딱 한 발짝 나아가는 상상을 하는 것"(281쪽) 이 에세이를 이렇게 읽으면 소설이라 불러도 되는 거 아닌가. 

또 뒤에는 실제의 자신이 소설에 얼마나 들어있느냐는 독자의 질문에 '딸기우유에 딸기가 들어 있는 만큼'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고 답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딸기우유에는 딸기가 얼마나 들어가 있을까?


"우유갑을 돌려 뒷면을 보자. 거기 깨알같이 적힌 성분분석표를 읽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딸기우유의 딸기 함유량은 0퍼센트이다. 한마디로 딸기우유에는 딸기가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음료수의 정체성은 '딸기'이고 실제로 맛도 딸기 맛이 난다. 딱 그런 식으로 내가 쓴 소설에 내가 들어가 있다."

389쪽


이 부분에 이르자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은 분류가 에세이이고, 그러면 독자들이 흔히 100% 작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이 글은 자신이 0퍼센트가 들어간 '에세이 맛'이 나는 소설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아래 같은 문장도 있었다.


"'내게 있어 핀란드는 완벽한 휴양지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에세이를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96쪽


이 책은 위 문장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물론 다음 구상하고 있는 에세이가 이렇게 시작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책은 아니다!


물론 지금까지는 쓴 내용은 나의 의심이다. 


어찌되었건 에세이로든, 소설로든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은 재미있다. 여행에세이를 읽는 이유는 떠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면 잘쓰여진 여행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써진 여행에세이를 읽으면 내 몸에 '기억된 감각'이 재생된다. 그래서 여행했던 곳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감각들이 -내가 여행한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을 간지럽히며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여행지에서 맡았던 냄새, 살갗에 닿았던 공기의 느낌, 색깔 같은 감각이 저절로 떠올랐고 좋은 여행에세이를 읽었다는 마음에 흡족했다. 

윤슬이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헬싱키 오디도서관에 가보고 싶어졌다. '뉴런을 공유하는 친구'가 있는지 생각해보게했고, 이정도는 해야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도 했다.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해준 장류진 작가에게 감사한다. 


*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장류진 지음, 오리지널스(밀리의 서재), 416쪽,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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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노리타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이아소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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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때도 재미있었는데 2권은 좀더 업그레이드 된 느낌? 아이도 좋아하고 제가 읽어도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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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노리타케 지음, 권남희 옮김 / 이아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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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경험 해봤던 일들이 떠오르며 웃으면서 봤어요.
아이도 상황을 상상하는지 깔깔 거리며 즐거워하네요.
책에 나오는 아이의 표정이 상황에 딱 어울려서
더 즐겁게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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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지성사
엔초 트라베르소 지음, 유강은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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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라는 단어를 나는 이전과는 다른 확연한 변화로 이해한다. 역사를 보면 혁명이라고 칭하는 것들이 그러하듯 -농업혁명, 산업혁명 같은- 이전에는 없었던 것들로 인하여 삶의 양태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볼셰비키 혁명은 뭔가 불편함을 가져온다. 아마도 내가 대척점에 있는 진영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의 말살, 핍박, 착취 등의 이미지가 공산사회주의에는 덧씌워져있다.

하지만 나의 이러한 편견이 단순한 편견이 아니라는 것을 이 책 <혁명의 지성사>가 알려주었다. 전통을 부정하고 각 개인의 정체성을 지우고 오직 하나의 역할과 사념체로 기능하게 한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처음 그들이 내세웠던 유토피아적 상상을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는 점이 그러했다. 저자는 다양한 참고자료를 바탕으로 이러한 사례를 오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실패한 정치체제를 비판하기만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벌어진 아픈 역사를 양분으로 삼아 좀더 나은 혁명을 향해 나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혁명의 지성사>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지난 역사를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거의 100페이지에 달하는 참고 문헌과 각주가 이를 뒷받침한다. 유명한 역사학자 E.H.카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엔초 트라베르소도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혁명사를 통해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 그 대화는 지난 날을 되짚고 앞으로 나아가야한다는 희망적이고 굳건한 의지를 독려한다.

혁명은 좀더 나은 사회, 좀더 좋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나아가려는 진보적 성향을 가지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실패한 역사는 아쉽게도 좋은 취지의 시작 역시도 변질되어 종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다는 뼈아픈 경험을 우리의 뇌리에 심어주고 말았다.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는 나약한 나와 같은 민중의 피로는 극에 달하고 있지만 달라질 게 없다는 패배감에 취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다르고 싶다는 바람, 좀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희망은 버릴 수가 없다. 이걸 버리는 순간 우리는 하루하루 생존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그 옛날의 삶과 다를 바 없이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이걸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는다. "혁명은 일정을 잡을 수 없으며 언제나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
그 때가 되면 이 실패한 역사가 온전히 기억되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양분이 되어주길 바라본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끊임없는 자기비판을 하며 자체의 경로가 거듭 중단된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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