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어지다: 궁극의 욕망을 찾아서 - 명상가 한바다와 종교학자 성해영의 만남
한바다.성해영 지음 / 김영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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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에 따르면, 물고기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 물병자리 시대가 도래했다. 물고기 시대가 종교의 시대라면, 물병자리 시대는 영성의 시대이다. 종교의 시대는 수직적, 위계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영성의 시대는 수평적, 상호적인 성격이 도드라진다. 그렇기에 물고기 시대의 전달 형식이 스승의 제자를 향한 일방적 선포라면, 물병자리 시대의 전달 형식은 멘토와 멘티가 주고받는 쌍방향 대화이다.

 

 

아마 종교에 관심있는 독자분이라면, 나의 말에 바로 반기를 제기할 것이다.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 곧 대 스승들은 모두 대화를 통해서 가르침을 주지 않았던가, 그들이 남긴 경전은 모두 그들이 서재에서 집필한 원고(글)가 아니라 그들이 거리에서 주고받은 대화(말)를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 그들의 대화를 현대적 기준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대화는 사제간의 평등한 상호작용이 아니다.

 

 

(주로 -칼 야스퍼스가 말한- 차축시대에 등장한) 대 종교의 창시자이자 대 스승들에게 대화는 매우 중요한 매체이다. 한 면으로 제자들(그 중에서도 스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내부 핵심 집단-inner circle-을 우선한다)과 밖의 무리에게 가르침을 내려주는 주요한 형식이며, 다른 한 면으로 각각의 상황과 대상에 따라 역동적으로 반응하는 면에서 대화는 유용한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스승은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스승은 제자가 봉착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스승은 제자의 기대가 투영되는 스크린이라 해도 무방하다(이런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책이 바로 우치타 타츠루의 <스승은 있다>이다). 반면 지금의 뉴에이지 영성은 쌍방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틀 안에서 작동한다. 멘토는 멘티와 함께 걷는 구도자이다.

 

 

뉴에이지 시대에 부합하는 종교학자 성해영 교수가 대화 형식으로 책을 펴낸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쓴 공저 8권과 역서 한 권(프로이드의 <문명과 불만>), 그리고 연구서 한 권(<수운 최제우의 종교 체험과 신비주의>)을 제외하고, 대중을 상대로 내놓은 저작은 두 권이다. 하나가 오강남 교수와의 대화를 담은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와 한바다와의 대화를 담은 이 책이다.

 

 

이는 뒤집어도 동일하다. 뉴에이지 시대의 명상가인 한바다 님 또한 대화를 통해 자신의 영성 세계를 펼쳐보이고자 하였다. 성해영 교수와 오강남 교수의 공저를 보며, "'이거다!' 하고 공감을 하"고, "명상을 평생 벗삼아온 저와는 입장이 좀 다르겠지만, 대화가 진행되다 보면 좋은 이야기들이 많이 나올 거라고 믿"는다(11쪽). 도그마를 선포하기보다 대화를 통해 좋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자 한다.

 

 

'선포와 대화'를 한바다 명상가의 '예언과 비전'으로 옮겨도 무방하다. "비전이나 예언은 언어에 있어서는 거의 같은 내용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 비전은 가능성을 내포한 소통의 언어이고, 예언은 가능성을 고착하는 언어에요."(21쪽) 예언은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만 던진다. 반면 "비전은 가능성의 언어이기 때문에 한 개인이 열려나가는 과정을 중시합니다."(22쪽) 잠재성 발현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둘의 대화 또한 열린 과정이며, 독자들도 이 과정 속으로 초대된다. "오늘 이 만남은 결론을 내리려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탐구해보는 과정입니다. 그 자체가 새로운 만남의 경험이기도 하고요. 어떤 것도 정해지지 않은 만남이지만, 우리 안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여정에 독자들을 함께 동승시켜서 어떤 결론이 나오는지 함께 알아보고 싶습니다."(59쪽)

 

 

다시 말해서 확정된 진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열린 대화를 통해 각자가 창조적 깨달음을 얻기를 바란다. "우리는 어떤 고정된 신념이나 관념을 가르치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성이 어떻게 삶을 행복으로 이끌어가는지, 우리의 마음이 다른 사람과 만날 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함께 물어보자는 겁니다."(59쪽) 이는 새 시대(new age)의 영성에 걸맞는 접근이다.

 

 

다시 대화로 돌아가자. 대화는 만남이다. 신기술로든, 신자유주의로든 우리의 만남은 급격하게 증폭되었다. 증폭된 만남은 우리의 궁극적 욕망을 추구하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고 성해영 교수는 말한다. 이는 궁극적 행복이며, 참된 기쁨이다. 원래 종교와 사상을 통해서 우리가 찾고, 두드리고, 구하던 것이다. 영원한 기쁨과 궁극적 행복을 얻고자 영성과 종교가 존재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제 우리는 종교, 정치, 경제,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다른 이들을 더욱 많이 만나게 되었다. 만남은 이어지고 연결되는 것이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이어짐' 속에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면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참된' 명상과 종교는 본디 하나였던 우리 모두를 다시 이어지게 해, 궁극적인 행복의 상태를 '지금 이곳'에서 구현하게 만든다."(6-7쪽)

 

 

저자의 핵심 주장이 담겨있는 세 번째와 네 번째 문장에 동의할 수 있는 지는 논외로 하고, 기본적인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다. 세계화와 온라인 미디어를 통해서 세상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이제 진정으로 지구촌(global village)이 이루어지는 중이다. 그 속에서 여러 종교와 영성 또한 뒤섞이고 있다. 단전과 차크라가 교차하고, 사주와 점성술이 혼재하는 형국이다.

 

 

이렇게 뒤섞일 때에 중요한 것은 기준 설정이다. 물고기 시대가 상정하는  바는 바깥의 기준이다. 하늘의 뜻이다. 혹은 우주의 도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중요한 것은 판단의 준거가 내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는 것이다. 한데 성해영 교수와 한바다 명상가는 그 기준을 자기 안에서 찾으라고 충고한다. 바깥의 정답을 답습하는 것은 편의적이며(153쪽), 외부의 권위에 굴복하는(154쪽) 거라면서 말이다.

 

 

판단의 기준이 내 안에 있고, 오롯이 "나 스스로 책임진다는 떳떳함을 가져야"(155쪽) 한다.  결국 타자와의 대화와 만남을 통해서 내 안의 무언가를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성해영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바깥에 있는 걸 보고 자극을 받아서 내 안에 그게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157쪽) 내 안에 가능성과 역량이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증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해영] "진정한 나는 육체적 개체로서의 내가 아니라, 모든 사물에 열려 있고 타인과 자연, 그리고 신과 교류함으로써 거대하게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잖아요."(167-168쪽)

 

 

[한바다] "그 가능성 전체와 교류하고 이어지는 것이지요. 영혼의 인터넷이지요."(168쪽)

 

 

그 중심에 에고가 있다. 그렇기에 성해영의 자본주의 비판은 어딘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저 역시 종교와 자본주의가 '나'라는 에고 개념믈 매개로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177쪽) 그 종교는 실상 지금의 뉴에이지 영성에 더 잘 부합될 것이다. 참된 자아와 거짓 자아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하는 가운데 실상 에고에 대한 강박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밀려온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허락하는 방식의 나약한 자기가 돼버리기 십상"(179쪽)이라는 성해영 교수의 평가 자체에는 동의한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자아를 (재)형성하기 때문이다. 하나 그게 "초개인적인 차원에 연결된 확장된 자아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탓"(179쪽)이라는 규명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애초에 우리 시대의 영성 자체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형성된 탓에 '나약한 자기' 형성에 가세하고 있다.

 

 

가장 냐약한 자기야말로  가장 강퍅한 자아이다. 구 시대의 종교 전통 안에 자기 자리를 찾다가 그만 종교적 에고가 강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새 시대의 영성 흐름 속에 자기 자리를 두다가 역시 종교적 에고가 강화될 수도 있다. "제일 무서운 에고가 종교적 에고러라고요."(192쪽)라는 한바다 명상가의 말은, 그러므로 물고기 시대의 종교만큼이나 물병자리 자리의 영성에도 부합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새 시대를 이끄는 새 기술 또한 이를 강화한다. 성해영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네, 인터넷이 자기만의 영성을 발견하려는 영적 여정을 엄청나게 돕고 있는 거죠."(318쪽) 한바다 명상가도 이렇게 이어받는다. "결국엔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자신이 직접 발견하는 방식의 종교성이 우세해지리라는 견해군요. 물론 제도화된 종교들도 공존하겠지만요."(318쪽)

 

 

나의 논지를 다시 밝혀둔다. 나약한 자기 혹은 헛된 자아 대신 참된 자아를 강조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게 된다. 한바다 명상가의 지적을 곱씹어보자. "종교 역시 제도화된 틀 바깥에서 종교성 혹은 영성의 근본적 의미를 개인들이 직접 묻게 된 것이지요."(324쪽) 개인이 직접 묻는다는 것은 전통보다 개인이 우위에 선다는 뜻이지 않나? 아무리 천재라도 개인보다 위대한 전통이 우위에 선다.

 

 

이 대담집을 읽고 난 소감은 간단하다. 입담 좋은 두 영성가들이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 뉴에이지 영성이 적절하게 소개되는, 매력적인 텍스트다. 물론 구 시대적인 전제를 갖고 있는 내 입장(-註)에서는, 비록 많은 부분 공감하지만, 기본  논지에 동의하기 어렵다. 하나 이건 책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나의 입장에 대한 천명이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영성에 관심 있다면, 읽어보시길 바란다.

 

 

註 - 개인은 한 시대를 초월할 수 없다(나의 이러한 단언 또한 나의 포지션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자아는 유능한 집사, 혹은 에이전트에 불과하다. 자아를 중심에 두고 주인으로 모시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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