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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의 길
헤르만 파이너 지음, 정환용 옮김 / 전남대학교출판부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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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를 보는 순간 뇌활동이 정지하는 현상을 보이는 입장에서 번역서가 가지는 가치라는 것은 책값으로 환산할 수가 없는 거다. 그리하여, 외국어가 현저하게 딸린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필요한 자료가 번역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에는 번역자에 대해 일단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때때로는 이게 도대체 제대로 번역된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라도 대게는 그 경우, 번역서를 읽고 있는 본인의 난독증이 발동한 것이리라 간주하며 제 머리를 쥐어 뜯게 되는 일이 다반사다. 간혹 이건 진짜 원문과 대조해보고 싶다는 강력한 욕구가 불끈 솟구치더라도, 특히 원서가 유럽 언어로 씌여있을 경우 맥을 놓아야만 한다. 사실 쬐끔 볼 줄 안다고 생각하는 영어나 일어로 된 책 역시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

그럴 때는 그저 '내가 번역하는 것보다는 이 번역서가 더 나을 거야'라는 자위를 하며 책을 읽어야 한다. 어찌되었건 간에 이렇게 힘들게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해준 사람들이 있는 덕분에 남의 나라 이야기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겪어볼 수 있는 거 아니겠나. 그래서 항상 번역하는 사람들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정말 어쩌다가 한 번씩은 분노하게 되는데, 이번에 구매한 한 권의 책이 딱 그런 분노를 솟구치게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어떤 작업의 완성을 위해 여러 자료가 필요한 터에 마침 어떤 책이 번역되었다고 하길래 냉큼 온라인 구매를 했는데 그 책이 바로 "반동의 길".

Herman Finer의 1946년 저서인데, 페이비언 사회주의자였던 Finer가 Hayek의 The Road to Serfdom(국내에는 "예종의 길" 혹은 "노예의 길"로 번역되어 있음)에 뿔받아서 이를 비판한 책이다. 원 제목은 "Road to Reaction".

노예의 길을 써서 계획경제를 악의 근원으로 규정하고 시장만능과 자유경쟁을 지고지선으로 승격시킨 Hayek는 Keynes를 비롯한 당대의 적수들을 실날한 어조로 비판했었는데, 그런 Hayek조차도 이 책을 증오와 독설로 가득찬 책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이 책을 통해 Finer는 Hayek를 '원색적'이라는 말이 무색하도록 주어 팬다.

워낙 오래된 책인지라 이후 Hayek의 이론적 진척까지 다루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일군의 사회주의자 그룹이 Hayek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고전에 속하는 책이 이 책이다. 바로 그 책이 번역되었다고 하니 Hayek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일파의 이론들을 열심히 씹어먹고 있는 입장에서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리하여 책을 구입하게 되었고, 밤중부터 이 책을 읽게 되었는데...

곤파스의 바람끝이 나무뿌리를 밑둥째 흔드는 새벽에 이르러 행인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따위 번역을 해놓고 책까지 출판해서 권당 13000원을 받아먹을 생각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의문과 분노가 책을 더 이상 읽지 못하게 만든 거.

띄어 쓰기나 단어표기 등의 맞춤법을 수시로 틀리는 것은 예사고, 이미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외래어나 인물명의 표기를 틀리게 하는 것도 다반사. 여기까지는 그래도 용서해줄만 한데, 정작 비문 투성이에다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것에는 대책이 서질 않는다.

워낙 성질이 고약한 행인, 처음에는 황당하다가 점점 승질머리가 곤두서더니 나중에는 허무하기까지 해서, 보던 책을 던지고 온라인 검색을 시작했다.

일단 원서가 존재하는지를 검색했다. 검색능력의 부족인지는 몰라도 국내 도서관 어디에도 이 원서 Road to Reaction은 소장하고 있는 곳이 없었다. 온라인 서점을 물색해봐도 기껏해야 아마존에 중고책의 가격이 올라와 있긴 한데 이걸 팔겠다는 건지 어떤 건지 확인이 안 된다.

해서 관련 논문들을 검색했더니 일부 논문에서 원서의 인용문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인용문들을 검색해본 결과 이 번역서의 번역은 완전히 엉터리였다. 몇 건의 인용문들을 번역해본 결과도 그렇고, 기왕에 한국에서 번역된 Hayek 관련 서적들에서 Finer의 책에 인용된 Hayek의 글들을 비교해본 결과도 그렇다. 비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의미 자체가 달라져버리는 경우가 매 페이지마다 발견된다.

이렇게 확인한 결과, 첫째 번역자가 이 분야에 대해선 전혀 기본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이고, 둘째 필수적 관련서적-예를 들자면 Road to Reaction과 대조되어야만 할 The Road to Serfdom-과의 대조조차 해본 바가 없으며, 셋째 아예 번역 자체를 해본 적이 없거나 해본 경험이 현저하게 부족한 상황이고, 넷째 책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과정에서 번역자는 물론 출판사의 편집인조차 퇴고를 하지 않았다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과연 이 추측이 합당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번역자의 프로필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번역자인 "정환용"이라는 사람은 영국 Sheffield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데다가 현재 전남대학교 교수로 재직중이다. 영어로 된 Road to Reaction을 번역할만한 충분한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분 전공이 지역개발학이다. '개발'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함의는 물론이려니와 그 '개발'이 특히 개인의 인성에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물질에 관계된 것이다보니 신자유주의 이론과 아예 관계가 없는 분야라고 치부하기에는 좀 어렵겠다. 이건 이 분야에 대한 행인의 무지때문이기도 한데, 어쨌든 그렇다 치고.

따라서 이 번역자는 충분히 번역을 할 자질을 갖추고 있고, 해당 분야에 대해 일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얼마든지 해당 지식을 갖출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만 하다.

더불어 역자 서문을 살펴보면 "본 역서와 하이에크의 역서를 비교평가하여, 계획의 경제적 적법성 논거확립에 일조하고, 계획인론의 정립에 보태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라고 번역의 변을 밝히고 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 이 사람은 Hayek의 The Road to Serfdom을 보았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따라서 위에 언급한 몇 가지 추측 중에 첫째, 둘째, 셋째 부분은 가정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더구나 역자 서문에 따르면 이 책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학과교수들이 도움을 주었고 특히 번역자의 아내가 초고를 교정까지 해줬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넷째 가정, 즉 퇴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 역시 번역자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행인이 추측했던 위 네 가지 조건은 다 아니라는 것이 정황상 나타난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이따위 번역서가 나오게 되었는가? 결론은 단 하나다. 이거 본인이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다. 최소한 이 번역자의 프로필과 그의 말(역자 서문)을 믿는다는 전제에서 보자면, 이 책은 본인이 번역한 것이 아니다. 혹시 대학원 석사 1학기 수업 과정에서 원서 하나 교재로 정해놓고 원생들에게 번역발표 시킨 다음에 그 원생들의 번역문을 묶어서 자신이 번역한 것처럼 발표한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번역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는 원인이 설명되긴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이름을 건 행위 자체가 용납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초벌번역이라고 하기에도 영 어설픈 이 번역서에 대해 번역자 본인은 "본서를 번역함에 있어 우리말로의 의미가 통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가급적 의역을 삼가고 직역하여 저자의 뜻을 전달하려 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건 심하게 말해 직역도 아니고, 거의 구글 번역기에 돌린 수준이다.

그냥 손가락 빠는 것도 이젠 지겨워서 가끔 소금과 설탕을 번갈아 찍어 빨아먹을 정도로 궁핍에 적응되기 시작한 백수 3년의 행인이 거금(!)을 들여 구매한 책이 이따위라는 건 너무나 화가 나는 일이다. 번역자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으나 이건 거의 거지 똥구녘에서 콩나물 대가리 빼먹은 거 아니겠나...

이 책을 구매하는데 소요된 비용이며, 책을 읽다가 뇌가 가열되어 상당한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입은 것이며,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을 잠도 못잔채 웹서핑을 하느라 날려버린 것 등등에 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고픈 생각도 있으나 일단 그건 참기로 하고.

다만, 혹시라도 이 블로그의 글을 번역자나 또는 책을 출판한 전남대학교 출판부 관계자들 중 일부가 보게 된다면 부탁이 있다. 학자적 양심을 걸고, 또는 교육계와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걸고 이 책 전부 수거해서 다시 찍던지 아니면 그냥 폐기하던지 해주시면 감사하겠다.

물론 당연히 이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은 혹여라도 이 책의 내용이 궁금하시더라도 쌩돈 13000원 주고 사서보실 생각 마시고 가까운 도서관에 가셔서 열람하시기 바란다. 열람해 보다가 급 흥분하거나 좌절하여 책을 집어 던짐으로서 발생하는 파본은 당연히 본인이 책임지셔야할 것이고.

더불어 만일 블로그 보시는 분들 중 이 책 원서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제본을 해서 한 부 보내주시면 감사하겠다. 번역할 능력은 되지 않지만 유용하게 잘 보도록 하겠다고 약속드린다.

아우... 돈 아깝고 시간 아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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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다시보기
박홍규 / 필맥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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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을 들은 기억이 없으나, 소크라테스는 항상 "세계 4대 성인" 중 한 위를 차지하는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외워야 했던 도덕과 윤리교과서의 한 인물이었고, "악법도 법"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 인물로 암기되었다. 산파술이니 지혜에 대한 사랑이니 하는 것은 거기에 딸린 덤이었고. 물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이고.

머리가 굵어지면서 "세계 4대 성인"이라는 것은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인물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들이 남긴 도덕윤리라는 것이 과연 인간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탐구에서 나온 것인지도 의심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제자연 하는 자들이 현실세계에서 자행하고 있는 수많은 악덕에 신물이 나기도 했던 까닭이다. 각설하고...

그 와중에 플라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계기는 전적으로 칼 포퍼 때문이다. 2부작 번역서로 출간된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1부 전편을 할애하며 칼 포퍼가 두드려 팼던 플라톤. "세계 4대 성인"의 한 명인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동시에 수많은 대화편을 통하여 지(知)와 덕(德, 최근에는 탁월함 등으로 번역되는 용어)을 가르쳤던 철학자이자 철인정치(哲人政治)를 주창한 플라톤이 왜 칼 포퍼에게는 '적'으로 규정되어 뭇매를 맞아야 했을까?

고전의 맛에 흠뻑 빠진 기쁨도 잠시, 플라톤의 대화편을 거의 전권을 독파하면서 느꼈던 최초의 감정은 말 그대로 감정적인 것이었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내 앞에 나타나 그의 독특한 '산파술'을 동원하여 나와 대화를 했다면, 아마도 단언컨대 30분 내에 주먹이 날아갔을 것이다. 그의 생각이 옳고 그름을 떠나 부정하는 순간 대화가 단절될 수밖에 없는 전제를 선언하고 그에 따라 자기 논지를 강요하는 그의 대화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깔'을 탄생시키기에 충분한 '산파술'이었다.

'국가, 정체'로 번역된 그의 Politeia는 칼 포퍼로 하여금 플라톤이 '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여지를 남긴다. 물론 다른 대화편에서도 마찬가지 논리가 전개되고 특히 말년의 작품인 '법률 Nomoi'에서 역시 플라톤의 '닫힌 사회'적 성격은 여실히 드러난다.

재밌는 것은 칼 포퍼는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플라톤의 사상을 구분하고 있다는 점. 여기서 약간의 혼란을 느끼게 되는데, 아무리 봐도 '변명'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법률'에 나타나는 플라톤의 사상이 과연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박홍규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나 그놈이 그놈이라는 판단을 한다. 예를 들어 박홍규는 칼 포퍼가 부정적으로 바라본 플라톤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나 칼 포퍼가 긍정적으로 바라본 소크라테스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는다(책 148쪽).

박홍규의 논리에 일정부분 동의하는 한편,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은 결과 개인적으로 내린 판단은 아예 소크라테스의 독자적인 이상이라는 것이 존재했었는지 자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밝혀야겠다. 즉, 플라톤이 '법률'을 제외한 모든 대화편에 등장시키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변명'이나 '향연', 또는 '파이돈'과 '크리톤'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어쩌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라는 권위를 빌어 자신의 입장과 사고를 '소크라테스'의 입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자기 논리를 그리스사회에 효과적으로 알리고자하는 전략을 가진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한편 박홍규의 "플라톤 다시보기"는 전작인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의 개정 증보판 정도의 성격을 가지는 책이다. 전작에서와 마찬가지로 박홍규는 대화편의 내용들을 열거하면서 플라톤이 독재의 이론가였고 실제 그러한 독재를 하고자 했던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최근 정암학당의 공동작업과 원로철학자 박종현의 노고를 통해 플라톤 대화편 거의 전부가 완역되었다. 플라톤에 대해서는 철학적 연구는 물론이려니와 정치, 법, 사회, 문화 등 많은 분야에서 활발한 선행연구들이 있고 그 양도 매우 풍성하다. 구글 학술검색에 검색어로 플라톤을 넣어보면 끝도 없는 저술들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

그러한 연구들을 폭넓게 확인하는 것은 역량을 넘어가는 것이고, 다만 전공분야인 법학 및 정치철학쪽에서 본다면 박홍규의 플라톤 비판은 상당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박홍규의 전작인 "소크라테스 두 번 죽이기"나 이 "플라톤 다시보기"는 칼 포퍼의 논리구조 혹은 아렌트나 럿셀의 비판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까칠하게 말하자면 들인 품에 비해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물론 서양의 정치학자나 철학자들이 했던 비판과 달리 한국적 정서에서 바라볼 수 있는 비판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나름 효용이 있겠다. 예를 들어 플라톤을 찬양하던 한국의 일부 철학자들이 어떻게 군사독재에 협조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했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책 12~13쪽)같은 것이 그렇다.

반대로 바로 이 부분이 박홍규의 저서가 가진 한계일 수도 있다. 칼 포퍼 등에 의해 진작에 확인된 플라톤 이론의 반민주성은 그 옹호자들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박홍규는 이 전거와 자신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걸음 더 나갔어야 한다. 즉, 예를 들어 박홍규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옹호하고자 했던, 다시 말해 플라톤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알려진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를 다시 부활시키자던가 뭐 그런 거. 그런데 그런 내용은 상당히 미흡하다.

과거 박홍규는 "그들이 헌법을 죽였다"라는 책을 통해 한국 헌법학계의 거물들이 자기 논리를 조석변 하듯 뒤집으며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것에 대해 일침을 놓은 바가 있다. 그런데 그 책에서도 역시 박홍규는 뭔가 새로운 헌법이론을 제시하진 않았었다. "플라톤 다시보기" 역시 그런 형국이다. 큰 기대를 갖고 펼쳤다가 그저 몇 번 고개만 끄덕거렸더니 책이 끝나 버리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아직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플라톤 다시보기"를 권할 수 있을지 약간은 망설여진다. 이 책을 먼저 읽음으로써 선입견을 가지고 플라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지긋지긋한 산파술의 동굴을 빠져나간 후에 이 책을 읽으라고 하기에도 뭔가 찝찝하다. 그걸 언제 다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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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문제적 인간 1
장 마생 지음, 최갑수 머리말, 양희영 옮김 / 교양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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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프랑스에서 도덕이 이기주의를, 정직이 체면을, 원칙이 관행을, 의무가 관례를, 이성의 지배가 관습의 독재를, 악덕에 대한 멸시가 불행에 대한 멸시를, 자부심이 무례함을, 관대함이 허영을, 명예 대한 사랑이 돈에 대한 사랑을, 어떤 사람인가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공로가 음모를, 타고난 재능이 범용한 재주를, 진실이 화려함을, 행복의 매력이 쾌락의 권태를, 인간의 위대함이 위인들의 옹졸함을, 관대하고 강력하고 행복한 민중이 친절하고 경박하고 비참한 민중을, 다시 말해 공화국의 모든 덕성과 모든 기적이 군주정의 모든 악덕과 조롱거리들을 대신하기를 원합니다."


- 이 책, 533쪽.


로베스피에르가 그렸던 세상은 아마도 유토피아였는지 모른다. 그가 그린 이상향을 위해 로베스피에르는 유혈낭자한 공포정치를 주도했고, 그 공포정치의 와중에 자신의 피 역시 쏟아냈다. 사가(史家)들에 의해 극단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로베스피에르, 그가 신념과 청춘을 불살라 이룩하고자 했던 이상적 공화국은 아마 숭고한 이상주의자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이상에 동조하는 자는 그를 긍정적으로 그릴 수 있겠고, 반대로 그 이상을 허황된 소리라고 치부하는 사람들은 그를 부정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 터.

혁명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공포와 유혈로 점철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혁명은 과연 그렇게 외적인 것으로 완성될 수 있을까? 오히려 지금 더 불길한 징후는, 결계에 속박되어 헤어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아예 그 결계 안에서 안주함으로써 만족하려는 복종의 심리, 그것이 아닐지. 그렇다면 혁명은 자기 외부의 피를 불러오기 전에 자기 스스로의 피를 먼저 흘려야 가능할 것이다. 그것만이 주술에 묶여 있는 봉인을 풀어 결계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성장이라는 환상과 거기서 소외될까 전전긍긍하는 공포가 운명처럼 결계를 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이 흑마술의 봉인을 깰 수 있는 방법은, 결계 밖으로 몸을 뺄 수 있는 방법은 과연 어디에 숨어 있을까. 로베스피에르는 그 해결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제기하면서 내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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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 : 덕치와 공포정치 레볼루션 시리즈 2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 지음, 슬라보예 지젝 서문, 배기현 옮김 / 프레시안북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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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의 발언이 텍스트를 독해한 곳에서 나온다기 보다는 텍스트를 편집한 곳에서 나오는 듯 하다는 느낌은 우선은 내 공부가 일천하기 때문이겠지만. 한편의 극단에서 로베스피에르를 폄하하는 입장에 맞서 지젝은 또다른 극단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자임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서문은 대체로 오바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예컨대 로베스피에르의 한계를 지적하는 안토니오 프레이저를 야유하면서, 지젝은 프레이저가 "미덕에 대한 불신이 동원의 근본 동력이 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비참한 윤리정치적 상황을" 확연히 적시해준다고 비판한다(61쪽). 글쎄...

아무튼 이 책에 수록된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문들은 그의 선의를 충분히 알게 해준다. 비록 그 선의의 결과가 파리를 붉게 물들일만큼 선혈을 흘리게 했더라도.

그런데 로베스피에르의 연설문들을 들여다보면 한가지 묘한 도식을 발견하게 된다. 피아의 분명한 구별. 그리고 적으로 상정된 대상을 반드시 절대악으로 치환하는 것. 당연히 그 결과는 절대악을 응징하고 패퇴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의는 완전한 승리로서 현현할 뿐 적당한 타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상시가 아니라 혁명과정이라는 것이 물론 중요하다. 혁명은 때론 총구의 화염과 인명의 살상조차 영웅적 서사시의 소재가 되니까. 적어도 미덕을 통한 정치가 가능한 평시가 아니라, 공포가 뒷받침되어야만 미덕을 내보일 수 있는 혁명의 시기에, 피아의 구별은 생존의 여부가 달린 경계의 획정이며 그 경계가 보다 확연히 드러날 때에만 진군을 위한 첫 발을 내디딜 수 있다. 드러난 경계는 피아 간 생존을 건 투쟁의 전선이고 그곳에서 미덕은 결판이 이루어진 후 승자에게만 돌아갈 전리품이다. 당장 필요한 것은 절대악으로 상정된 적을 떨게 할 공포다. 그리고 그 공포는 경계 저편으로 시선을 돌릴지도 모를 경계선상의 회색분자들에게 어느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추궁한다. 경계 위에서 양쪽에 발을 걸친자 역시 적이다.

문제는 이 혁명기의 공포상황이 가지는 효과를 평상시에도 도모하는 개인/집단이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적인 위기를 공공연하게 설파한다. 그들에겐 어제도 위기였고, 오늘도 위기이며, 내일도 당연히 위기는 계속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위기여야만 한다. 그 위기는 실상은 자신들의 위기이나 다른이들의 위기로 전환된다. 그로써 자신들의 위기는 해소되며 원래 위기가 아니었던 자들은 돌연히 자신들의 위기로 전환된 상황에 전율한다.

오히려 로베스피에르는 세간에 익히 알려진 것처럼 무조건적인 공포의 도구화를 노렸던 것은 아니었음을 확인 하게 된 것이 이 책을 읽고 얻는 안도감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혁명이 가진 감수성과 돌발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확연히 인식하고 있었고 또 염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애국파의 감정적 폭력행사에 대해 제어하고자 했고, 정반대로 "애국"의 일념을 감당하지 못한채 과도한 행위를 한 자에게 일정한 아량을 베풀고자 한 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는 그 아량의 "미덕"의 기준을 "조국과 진실에 대한 사랑"이라는 주관적이며 추상적인 이념에 맞추었다는 것. 과연 "조국과 진실에 대한 사랑"을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었을까? 혁명의 시기에는 유난히 그 구별이 확실하게 가능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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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서스와 올리브나무 - 세계화가 불러들인 기회와 위험 Nous 6
토머스 L. 프리드먼 지음, 장경덕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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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런 쓰레기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시장의 모순이다. 편파적 저널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원저자(토머스 프리드먼)는 물론이려니와 옮긴이(장경덕)의 사고구조는 오직 경제적관점만이 세계의 현상을 파악하는 유일한 도구라는 인식수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반대시위대의 파괴행위로 인해 저녁거리에 대한 고민에 빠진 역자는 당장 자기 손을 벗어나버리게 된 맥도널드 햄버거에 깊은 애착을 가진다. 그러나 이 역자의 "참으로 단순한" "걱정"은 단지 그의 선택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잠깐 동안 중단된 것에 불과하다. 반대로 맥도널드 매장의 유리를 파손한 시위대의 행동은 생존에 대한 경고를 도외시하면서 역자의 손에서 햄버거를 뺏아버린 넋나간 폭도일 뿐이다.(p5~6)

경제학이 학문이라기보다는 노스트라다무스를 추종하는 예언자들의 밀교가 되어버린 현재에, 그러나 어찌되었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한다는 것, 아니 더 나가 살아남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더 화려하게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을 예언하는 자들은 무수히 많다. 이제 그 예언자집단에는 경제학자들만이 아니라 저널리스트도 동참한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자신의 책을 통해 그 예언을 웅장하게 풀어낸다.

그 예언의 중심 뼈대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하다. 세계화에 동참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아든 십계는 신의 법률이었지만, 세계화된 지구 위에서 토머스 프리드먼이 받아든 석판엔 "황금 스트레이트 재킷"을 입을 수 있는 방법이 시장의 이름으로 새겨져 있다. 신이 되어버린 시장은 전 지구인에게 십계명에 버금가는 황금률을 제시한다.

▷ 민간부문을 경제성장의 주력 엔진으로 삼아라
▷ 낮은 인플레션과 물가안정을 유지하라
▷ 정부 관료조직을 줄여라
▷ 재정흑자를 내지는 못하더라도 최대한 균형에 가깝게 재정을 운용하라
▷ 수입관세를 낮추거나 없애라
▷ 외국인 투자 제한을 없애라
▷ 수입물량 제한과 내수시장 독점을 철폐하라
▷ 수출을 늘려라
▷ 정부소유산업과 공익사업을 민영화하라
▷ 자본시장의 규제를 완화하라
▷ 외환거래를 자유화하라
▷ 기업과 주식, 채권을 외국인들이 직접 소유할 수 있도록 개방하라
▷ 국내시장 경쟁을 최대한 촉진하기 위해 규제를 완화하라
▷ 정부부문의 부패와 보조금, 뇌물관행을 없애라
▷ 은행과 통신을 민간이 소유하고 이 부문의 경쟁이 이뤄지도록 개방하라
▷ 국민들이 상호 경쟁하는 연금 가운에 자신이 가입할 연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고 외국의 연금과 뮤추얼펀드에도 가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
(pp. 162~163)

매우 낯익은 신의 말씀들이다. 1997년 IMF가 경제신탁을 하면서 한국정부에 요구했던 내용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황금률은 단 두 가지 주요 내용으로 축약되는데, 하나는 작은 정부, 둘은 사유화. 이 두 가지 요소는 다시 단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로 합쳐지는데, 그것은 완전자유시장이다.

대처와 레이건을 모세와 세례요한쯤에 비유하는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 황금률이 냉전을 종식시킨 핵심이며, "황금 스트레이트 재킷"을 입을 수 있는 신체조건이라고 강변한다. 그에 따르면 황금 스트레이트 재킷은 오직 한 종류밖에는 없고 그 사이즈도 정해져 있으므로 이것을 입으려면 몸을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 각국의 정부, 그리고 그들이 천명하고 있는 정치는 모두 이 재킷의 규격 내에서 가능하며, 정부는 기껏해야 이 재킷에 소매를 약간 덧댄다거나 품을 조절할 수 있을 뿐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입을 통해 구연되는 시장신의 황금률은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신화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끌고 온 것일 뿐이다. 다만 침대 옆의 프로크루테스는 도끼를 들고 있으나 황금재킷의 실소유주인 시장신은 이 옷을 입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굶겨 죽일 수 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보여주는 유일한 가치관은 오직 부의 축적일 뿐이다. 거기엔 어떻게 하면 더 뷰유하게 살 수 있나만이 관심의 대상이고 그 이외에 삶의 가치관은 부(富)에 수반한 부산물일 뿐이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돈에 환장한 속물근성 이외에 이 책에서 평가되는 가치라는 것은 없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는 부의 신전에서 시장신에게 바쳐진 세계화주의자들의 바이블이다.

문제는 이 속물근성으로 가득찬 쓰레기같은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것.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토머스 프리드먼이 원하는 것처럼, 이 책은 "시사관련코너"가 아니라 "역사서 코너"에 자리잡을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세계가 얼마나 속물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서이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이 책을 들여다보면서 오늘의 역사를 돈에 미친 역사로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바로 이 점이 이 책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이 지적하는 것처럼 세계는 이제 하나의 네트워크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승자와 패자는 세계화에 적응하느냐 하지 않느냐에서 판가름난다. 더 정확히는 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혹은 돈을 만들 방법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이 네트워크를 그대로 수용하는 한, 올리브나무는 대지의 한 복판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올리브나무가 돈을 벌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존재의 가치를 판단받게 된다.

네트워크 안에서 순응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황금률을 거부할 수 없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이 네트워크에 순응하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즉 부를 기준으로 삶의 질을 판단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는 이상, 황금률은 여전히 황금률일 수밖에 없다. 그 속에서 적응한 자는 황금 스트레이트 재킷을 입을 것이고 적응하지 못한 자는 상대적 박탈감에 떨어야 한다. 패배한 자들은 "이렇게 얻은 황금은 사회를 위해 쓸 수도 있다"(p.164)는 승리자들의 후덕한 인심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황금 스트레이트 재킷은 그 화려한 외양으로 인하여 프로크루테스의 침대를 연상시키기 어렵다. 그러나 본질은 같다. 빛나는 재킷의 안쪽에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피가 엉겨붙어 있다. 재킷을 입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을 위해 희생당한 수천만, 수억명의 피가 고여 썩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버트란트 럿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논지를 완전히 무로 돌려버리는 수작이다. 배게로도 충분히 쓸 수 있을만큼 두꺼운 책 속에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돈 많으면 장땡"이라는 달랑 한 줄로 요약될 것을 늘리고 불려놓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 비할 때, 달랑 몇 페이지 되지도 않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두고 두고 씹고 불리면서 되새김을 해도 모자랄만큼의 고민거리를 안겨준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세계화라는 네트워크를 순응할 것인지를 판단하게 해줄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네트워크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사람답지 못하게 만드는지 생각하게 한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읽는 동안 내내 인간의 영혼을 고려하던 럿셀이 생각나는 이유는 지독한 가치관의 차이가 가져오는 위화감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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